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 책 <랩걸> 33쪽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 말고도 이 책에는 가슴에 깊이 간직해두고 싶은, 보석 같은 문장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난 지금껏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예는 많이 보았어도 식물과 관련해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기심이 바탕이 된 경쟁 사회이다 보니 우리의 존재의미는 흔히 동물의 특정한 능력에 자주 비유되고 한다. ‘동물적인 감각이니, ‘...와 같은 예리한 눈’, ‘...의 생존 지혜라느니. 그런데 빛을 향해 자란다는 의미에서 사람이 식물과 같다...” 정말이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구나, 사람은 빛을 향해 자라는 거구나. 나 역시 빛을 향해 자라는 나무 같은 존재였구나.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떤 뿌듯함과 따뜻함을 품을 수 있어 좋았다.

어쩌면 사람은 모두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이 세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보로 가득하다. 그 많은 정보를 모두 이해하고 일일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선별된 정보를 통해 그 내용을 재구성하고, 그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 정보를 수용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기에 같은 사물, 같은 사안을 바라보더라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호프 자런은 자신의 전문 영역인 식물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학자가 아니면 절대 들여다 볼 수 없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는 그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와 풀이었지만, 그것이 삶을 이해하는 하나하나의 생생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랩걸이라는 제목에는 작은 글씨로 부제가 달려 있다.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끌고 가는 키워드가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랩걸>은 과학 에세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은 과학과 나무에 대한 사랑 얘기에 가깝다. 이 책에서 호프 자런은 인간의 시각으로 식물을 보기보다는 식물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길 즐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의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한 우리 인간은 그동안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봐 왔던가? 실제로 식물은 우리 인간보다 지구에 먼저 뿌리를 내렸다. 그런 식물에게 삶의 지혜라는 것이 없을 수 있을까? <랩걸>을 읽어보면 식물이 정말 똑똑한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식물은 물과 햇빛만 있으면, 생장의 과정에서 스스로 여러 가지 취사선택을 할 줄 안다. 언제 줄기를 낼지, 어디로 이파리를 펼칠 것인지... 그런 생명의 주체가 단지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동적이고 마치 생명조차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식물은 무엇보다 기회의 생물이다. 다시 말해 기회를 잘 포착한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 며칠, 몇 달, 심지어 몇 년을 기다릴 줄도 안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와 노력이 적절한 타이밍과 결합하면서 경이로운 생명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씨앗이 토양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그 대표적인 예다. 어떤 씨앗은 중국의 토탄 구덩이에서 무려 2천년을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일까? 작은 기다림에도 조바심을 내는 우리로서는 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무가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는 이유는 오랜 학습 능력에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나무는 계절 변화가 햇빛의 양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여 스스로 경화를 진행한다.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하더라도 햇빛이라는 요소를 신뢰하기에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혹독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나는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이 책에는 과학자이자 한 여성으로서 저자가 겪은 여러 가지 개인사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중에서 오팔 에피소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팽나무 씨를 갈아 만든 가루를 분말을 연구하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대한 발견의 순간 이렇게 말한다. “이 가루가 오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든 동안 나만 아는 지식을 갖게 되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은 법이다. 내가 겪은 특별한 경험, 특별한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스스로 인내하고 실험하고 관찰한 끝에 얻어낸 과학적 발견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과학자로서 자기만의 지식을 갖게 된 자런의 보람이 얼마나 컸을까? 이 오팔 에피소드는 책의 후반부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랜 인고 끝에 아이를 출산한 자런이 자신의 아이를 두 번째 오팔로 부르면서다. 평생 생명을 연구하고 생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과학자에게서 전해지는 잔잔한 감동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유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유가 없다면 이 세상에는 얼마나 삭막한 의미들만 존재하게 될까? 그저 인간은 인간이다보다 인간은 빛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식물과 같다라는 말이 훨씬 더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랩걸>은 그런 풍요로움을 한껏 안겨준 책이다. 과학이 우리의 삶에 보탬이 된다고 해서 모두가 과학자의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랩걸>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과학자가 비유하는 따뜻한 삶의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다. 반드시 뭔가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책은 많은 것을 손에 쥐어준 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실제 진로와 무관하게 어린 시절 누구나가 꿈꿔봤을 법한 과학자의 일상을 엿보게 되는 소중한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