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공간
조종하 지음 / 이상공작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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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5  [ 눈사진 ]

구름이 너무 이뻤다  꽉 쥔 네 손을 잡느라  눈으로 찍어놓았다

꽃이 너무 이뻤다  내 코를 움켜쥔 네 향에 취하느라  눈으로 찍어놓았다

바람이 너무 이뻤다  맘 한구석 스며든 네 따뜻함을 지키느라  눈으로 찍어놓았다


p. 150  [ 무기력 ]

우린 그 날,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대화의 끝이 너와 나의 묵인으로 묻힐 것이라면

너와 나의 끝이 나 혼자만의 무기력으로 잇는 것이라면

우린,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p. 284  [ 달빛 ]

밤하늘 죽어버린 검은 벽지를

초승달 박힌 손톱이

빨간 달로 저물 때까지

벅벅 긁어내다가

끝내 벗겨져 흘러내린 검은 피가

스며든 커피잔을 거뭇한 혀로

세댓잔 투석하며 빌빌대다가

빈속의 허무를 달랠 때쯤

나는 억지로 잠을 참는다



작가님의 책을 보면서 맘에 드는 시와 문장들이 참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저는 '공간' 부분의 글들이 유독 맘에 들었습니다.



p. 70-73 [ 취향 ]

제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오롯한 '나만의 취향'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보석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삶과 환경 속에서 각자의 선택에 의한 취향들은 각기 다른 색깔로 빛이 나니까요.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귀하고, 귀하기 때문에 빛나는 것, 그것이 바로 '취향' 입니다.


p. 84-89 [ 계절 ]

봄은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왜 사람들이 '가을, 겨울, 봄, 여름' 순으로 부르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응로 부르는지 알 것 같아요. 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죽었다고 느껴졌던 것들도 다시 살아나며, 더불어 새로운 것들도 함께 탄생하니 이만한 시작의 느낌이 또 있을까요. 내내 따뜻함을 자아내 지난겨울의 차가움이 언제 있었냐는 듯, 굳어 있던 온 세상이 지저귀기 시작합니다. 힘겨웠던 시절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을 만끽하며 온몸이 풀리는 계절. 그래서, 저는 봄을 사랑합니다.


p. 162-168 [ 비극중독증 ]

"설령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것이 슬픔이라면 사랑하지 말라."

슬픔은 슬픔 본연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그 채도가 무엇보다 진하다.

그렇기에 다들 싫다 말하지만 쉽사리 빠져버리며 아무리 마음이 단단한 이라 한들

그 아름다움에 빠지는 순간, 한참을 녹아내려 허우적거린다.

연약한 인간을 자신 안에 가두곤 다른 행복의 단어들을 선택할 자유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p. 182-186 [ 오래된 노래 ]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특유의 느낌은 따뜻하고 노곤해서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생각을 떠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간이 훅 가버리거든요.



글을 읽으면서 중간중간 왜 이렇게 마음에 와닿았는가 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작가님의 생각이 저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힘들 때 누군가 힘내라며 이런저런 충고를 해주는 것보다

가끔은 그냥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정말 도움이 된다는 걸요.

멋지게 보여지려고 쓴 글이 아닌,

어떤 면에서는 일기같은 느낌이 드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글들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쉽게 읽히되, 그저 그런 가벼운 의미가 아니라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중간의 시를 쓰고 싶다고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생각날 때 마다 계속 읽어보고 싶은 책 <시, 공간>

힘들고 지친 어떤 날, 따뜻하고 조금은 편안해지고 싶을 때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꼭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yoojin2ch/22260684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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