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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의 시작 - 신화에서 계시로
정우조 지음 / 지우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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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라고 하면 나는 맨 처음 단군신화가 떠오른다. 이때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실제로 말을 하는 전설적 존재가 아니라, 각각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고대 부족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존재인 환웅은 외부에서 내려온 선진세력이고, 곰 부족과 섞여 새로운 집단을 이루었을 것이라 해석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화는 고대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전하는 설명체계이다. 그렇다면 계시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모두가 각장 정의하는 바가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우조 목사의 책 <모든 이야기의 시작 - 신화의 계시로>은 계시를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일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대신 당시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대조하며 진정한 계시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일을 설득력있게 전한다.
가령 고대신화에서 나무나 식물은 주로 신들의 전유물인 '영생'을 상징하며, 신들의 변덕에 의해 좌우되는 대상이다.(p109)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하는 선악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하며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더 나아가 신약에서는 선악과를 더욱 혁명적으로 해석한다.(p77) 십자가(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계시한다. 이것은 고대근동의 신화가 이해하는 나무와 생명에 대한 이해에서 단순히 개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원역사는 고대근동 사람들에게 익숙한 상징물과 이미지를 동원하지만, 재해석하고 전복한다.
한편 고대신화는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신적 존재들을 만들어 기원을 설명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p152)
성경에 난해구절 중 하나인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용사들인데, 이들을 신화적으로 해석하자면 힘과 폭력으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원역사는, 그러니까 계시는 이들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반대하고 마침내 쓸어버린다. 이들의 동조하고 저항하지 않는 세상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이것이 계시이다.
아트라하지스라는 당시 고대근동 신화에서는 상급신과 하급신이 등장하는데, 노동을 담당하던 하급신이 자신들의 노역을 하청시키고자 인간을 창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p245) 그런데 인간의 숫자가 늘어나자 불편함과 일종의 위협을 느낀 일부 신들이 홍수로 인간을 쓸어버리려 했다. 성경의 홍수이야기(계시)와 이 신화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저자는 소제목을 통해 이렇게 선포한다.
"소음을 두려워하는 신, 신음을 들으시는 신"
나는 이 문구가 이 책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문학적이며 매력적인 소제목이 너무 많다. 소제목만 읽어도 책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화가 네피림과 같은 권력자를 옹호하고, 그 아래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한다면, 성경의 원역사는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극복하신다고. (p230)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제약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긍휼과 신실함을 증거로 인류와 언약을 맺으신다. 이제 심판의 화살(무지개=레인보우)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가리킨다. 인간의 죄악을 하나님이 대신 책임지겠다는 선포.
여기서 신화와 계시의 가장 큰 차이점이 드러난다. 신화가 권력자들의 정당화였다면 계시는 유일하고 진정한 권력자의 자기 비움과 극복의 이야기이다. 많은 경우 계시는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이나, 직통계시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자기 욕망을 휘두르려는 식으로 잘못 이해되곤 했다. 이것은 계시를 신화로 격하시키는 일이다.
레비나스는 오디세우스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대조하는데 의미심장하다. 20년 동안 방황하다 마침내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그 여정 가운데 만난 모든 이들을 흡수하고 자기 동일시하여 양분삼는다. 이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에피소드는 오디세우스를 살찌우는 양식이다. 그러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한 채' 여정을 떠난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도착한다. 신화는 이유와 결말이 있고, 그것은 더 강한자를 위한 원료이다. 그러나 계시는 이유와 결말이 아니라 '용서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에 대한 가장 깊은 심연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이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새롭고 깊이 있는 통찰을 배울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단지 새로운 지식을 얻기보다, 저자와 함께 성경의 원역사를 따라가며, 신화에서 계시로 나아가기 위해 애썼다. 그 고민은 즐겁고 위로가 되고 나를 더 돌아보게 해줬다. 무엇보다 성경을 신화처럼 보려하는 나의 굳은 마음을 조금 열게해주었다. 이제 그곳으로 스며드는 세미한 소리를, 따듯하고 절대적인 계시의 소리를 들어볼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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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당신에게
최범준 지음 / 느린서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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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은사님들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기억이 흐릿합니다. 체벌이 만연했던 시절, 혹자는 선생님들의 폭력을 떠올리며 이를 갈기도 하지만 저는 그저 인상적인 기억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선생님과 깊은 교감과 친교를 나누지 못한 탓이겠지요. 때로는 무관심이 폭력보다 깊은 흔적을 남기는 듯합니다.
그래도 고1 때 선생님과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고1 겨울방학 때 저를 포함한 학생 8명을 계룡산에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엔 무릎까지 눈이 쌓인 험한 산을 정상까지 올랐지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저에겐 그때의 일이 선생님과 함께한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산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하는 최범준 선생님은 저의 오랜 지인입니다. 그의 책 『교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당신에게』를 읽으며 지난 학창 시절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모습도 돌아봤습니다. 저 또한 8년간 학원에서 수학 강사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같은 교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공교육 교사와는 처지가 많이 다릅니다. 강사로 지내며 ‘교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 책임을 사회와 학교에만 돌리며 외면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괜히 부끄러워집니다.
이 책은 2016년부터 2022년까지 교실 현장에서 교육의 본질과 학생의 마음을 고민해 온 한 교사가 학부모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은 것입니다. 학생과 함께 혼란의 시기를 건너는 학부모를 교사의 조력자로 여기며 건넨 편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저처럼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냉소적으로 교실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는, 무관심하고 조금은 비겁한 이들에게 보내는 교사의 간절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와닿은 표현은 ‘관계’입니다. 인간에게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 사랑받고 싶고 또 바르게 사랑하고 싶으니까요. 저자는 들어가는 말을 이렇게 엽니다. “무너진 신뢰 속에서 다시 관계를 짓는 편지.”
목차는 그의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교사는 먼저 아이 곁에 섭니다. 그리고 아이가 속한 가정에 관심을 둡니다. 저자 또한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3부에서는 잠시 멈추어 서서 관계 속에 있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갇히길 거부합니다. 4부에서는 교실 밖에서 교실을 다시 들여다보며 시야를 넓힙니다. 이 모든 것이 훌륭한 교사의 자질입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교사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부족한 모습 그대로 묵묵히 교실에 남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금 느끼지만, 교육이란 늘 콩나물 시루에 물 붓는 작업입니다. 대부분의 물은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교육은 그런 효율로 환산할 수 없는, 그래도 필요한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으로 물 붓기를 계속해 나가는 작업입니다.”(277쪽)
기독교 사상가 시몬 베유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주의가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면, 그것은 기도와 같은 것이다.”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주의는 기도다.”
저자의 편지를 읽으며 이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교실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장소에서 타인과 관계합니다. 교실만 무너져 있을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 우리가 속한 직장과 가정에도 무너진 곳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 속에서 깊이 무너지고 후회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신뢰가 무너진 곳에 다시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야 합니다. 관계를 살리는 길은 나를 비우고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내 전부를 다해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일 때, 타인은 조금씩 변합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달라집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배운 점입니다. 저는 여기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교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저와 당신께, 그리고 인생이라는 학교를 다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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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부처다
종사르 잠양 켄체 지음, 이기화 옮김 / 팡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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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없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모순된 책.모든 것에 실체가 없으나 나 자신의 주인이 나라고 말하는 억지스런 책. 왜곡된 도덕성을 버리라고 말하면서 자비를 떠드는 불편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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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정치신학 ㅣ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야콥 타우베스 지음, 조효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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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으로 기독교를 지적으로도 또한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분석하고 파악하려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만, 몇 가지 사실들은 실재이며,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한다.

이에 대표적인 표현은 요한 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서두(1절)에 했던 말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실 성경을 독해하는 방법은 각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읽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한편으론 하나님의 역사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았던 일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행해왔던 일이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정치적 왕을 기다려왔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유대인이자 의 저자인 야콥 타우베스는 이러한 유대인의 작업을 바울의 정치적 맥락을 통해 새롭게 전승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구약적이지도 신약적이지도 않다. 

 

타우베스에 따르면 구약에 메시아와 바울-신약을 대표하는-이 말하는 구원관, 즉 메시아관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감벤의 요약을 보면 이렇다.

"없는 것처럼은 메시아적 생의 공식이며, 클레시스(소명)의 최종적인 의미이다. 소명은 어떠한 것이나 어떠한 장소를 향해서도 요청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명은 각자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사실적 상태와 합치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그 사실적 상태를 철두철미하게 기각하는 것이다. 즉 메시아적 소명은 일체의 소명의 기각인 것이다. ...... 소명은 소명 그 자체를 호출하는 것이며, 내부로부터 그것을 향하여 촉발시키는 절박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안에서 자신을 양육하고 그 안에서 거처하는 행위로부터 그것을 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메시아적 소명은 일체의 소명의 기각이다" 라고 옮긴이는 첨언한다. 우선 인간적인 의지가 꺽인 후에야(마치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는데 순종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지(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죽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예표가 된다)가 드러난다. 

 

이 책에 대해서 기본적인 감상평은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타우베스는 한꺼번에 매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렇게 겹겹히 중첩된 텍스트들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은 내 역량에 벗어나는 일이다. 

대신 나는 이 책에 나타나는 팩트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가 특별한 방식으로 로마서를 읽는 다는 것을 감안하고라도 치명적인 오류가 적어도 하나 이상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p127에 나온다. 타우베스는 로마서 13장을 통해 바울의 독특성을 제시 한다.

타우베스는 로마서 13장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라는 바울의 말과, 복음서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제시한 이중계율을 비교한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가장 큰 계율이 무엇인지 묻는 서기관에 물음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고(하나), 이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둘)고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중계율이 있고, 그에 반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율만 제시했다는 것이다. 타우베스는 심지어 이 텍스트가 예수에게 논쟁을 거는 텍스트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차이점은 타우베스가 보이게 매우 결정적이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핵심인 겁니다. 두 개의 계율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율입니다. 저는 이게 최고도로 혁명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핵심이라는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예수님은 이러한 이중계율을 나중에 하나로 합친다. 이중계율이 제시된 시점보다 나중인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 요한 요한1서나 다른 복음서에서도 때때로 하나의 계명만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타우베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계율(사람을 사랑하는)이, 오직 바울만 주장하는 특별한 것이  전혀 아니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타우베스가 단순한 사실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처럼 뛰어난 종교학자가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몇 번을 보아도 오류임이 분명해 보인다 (아마 내가 그의 말을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의 오독을 바로잡아줄 분이 있다면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이중 계율에 대한 이에 대한 기독교에 해석은 이렇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10계명을 주기 위해 두개의 석판을 준비시켰다. 하나의 석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계율이 적혀 있고 다른 하나에는 사람에 대한 계율을 적어 놓았다.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마가복음 12장 30,31), 즉 이중계율은 그러한 10계명을 염두해둔 구약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스스로가 온 것이라 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에 쓰여있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서 오직 자신이 죽어야만 성령이 우리에게 올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한복음 16장 7절) 이것이 바로 신약적인 대답이다!

 

사람에게 성령이 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 이 지점에서 타우베스는 비신앙인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심지어 성령론은 기독교 내에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위격이자 하나의 존재라고 여긴다. 여기에 기독교에 독특함이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죽기 전에는 우리에게 성령이 없었지만, 흠없는 자가 거룩한 희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에 제시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성전이다. 이것은 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중계율을 하나로 합쳐서 새계명을 만들어 주었으며, 그것을 다른 사도들을 통해 전했는지(바울뿐 아니라) 이해하게 해준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령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고, 그리하여 우리 하나 하나는 개별적인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된 사람 안에 거하는 성령을 사랑하라는 것 '역시'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은 율볍을 폐하러 온자가 아니라 완성하러 온자라고 말씀하신 것의 요체이다.

성령은 하나님이므로, 타우베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새 계명은 사람끼리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을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 좀 더 신학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사람은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결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즉 서로 '다른' 사람 안에 거하는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일반적인 기독교의 대답이라 믿는다. 어느정도는 개인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큰 틀에서 차이가 없으리라 본다. 아무튼 타우베스의 로마서 읽기는 당연히 일반적인 기독교의 입장과 다르다. 그것인 단순히 정치적으로 읽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그는 성경을 지나치게 역사적인, 문화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맥락에서 읽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타우베스가 주장하는 여러 논의들은, 그에 재기넘치는 명민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했던 다른 여러 말들과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성경 전체의 맥락과도 균열이 있어 보인다.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성경을 독해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기하는 비판은 순전히 Fact의 문제이다. 의심이 가는 분들은 위에 필자가 제기했던 성경의 구절들을 찾아 읽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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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 밈
수전 블랙모어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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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이 과학적 실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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