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정치신학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야콥 타우베스 지음, 조효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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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으로 기독교를 지적으로도 또한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분석하고 파악하려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만, 몇 가지 사실들은 실재이며,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한다.

이에 대표적인 표현은 요한 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서두(1절)에 했던 말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실 성경을 독해하는 방법은 각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읽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한편으론 하나님의 역사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았던 일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행해왔던 일이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정치적 왕을 기다려왔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유대인이자 의 저자인 야콥 타우베스는 이러한 유대인의 작업을 바울의 정치적 맥락을 통해 새롭게 전승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구약적이지도 신약적이지도 않다. 

 

타우베스에 따르면 구약에 메시아와 바울-신약을 대표하는-이 말하는 구원관, 즉 메시아관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감벤의 요약을 보면 이렇다.

"없는 것처럼은 메시아적 생의 공식이며, 클레시스(소명)의 최종적인 의미이다. 소명은 어떠한 것이나 어떠한 장소를 향해서도 요청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명은 각자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사실적 상태와 합치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그 사실적 상태를 철두철미하게 기각하는 것이다. 즉 메시아적 소명은 일체의 소명의 기각인 것이다. ...... 소명은 소명 그 자체를 호출하는 것이며, 내부로부터 그것을 향하여 촉발시키는 절박한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안에서 자신을 양육하고 그 안에서 거처하는 행위로부터 그것을 무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메시아적 소명은 일체의 소명의 기각이다" 라고 옮긴이는 첨언한다. 우선 인간적인 의지가 꺽인 후에야(마치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는데 순종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지(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죽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예표가 된다)가 드러난다. 

 

이 책에 대해서 기본적인 감상평은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타우베스는 한꺼번에 매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렇게 겹겹히 중첩된 텍스트들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은 내 역량에 벗어나는 일이다. 

대신 나는 이 책에 나타나는 팩트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가 특별한 방식으로 로마서를 읽는 다는 것을 감안하고라도 치명적인 오류가 적어도 하나 이상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p127에 나온다. 타우베스는 로마서 13장을 통해 바울의 독특성을 제시 한다.

타우베스는 로마서 13장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라는 바울의 말과, 복음서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제시한 이중계율을 비교한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가장 큰 계율이 무엇인지 묻는 서기관에 물음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고(하나), 이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둘)고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중계율이 있고, 그에 반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율만 제시했다는 것이다. 타우베스는 심지어 이 텍스트가 예수에게 논쟁을 거는 텍스트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차이점은 타우베스가 보이게 매우 결정적이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핵심인 겁니다. 두 개의 계율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율입니다. 저는 이게 최고도로 혁명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핵심이라는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예수님은 이러한 이중계율을 나중에 하나로 합친다. 이중계율이 제시된 시점보다 나중인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 요한 요한1서나 다른 복음서에서도 때때로 하나의 계명만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타우베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계율(사람을 사랑하는)이, 오직 바울만 주장하는 특별한 것이  전혀 아니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타우베스가 단순한 사실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처럼 뛰어난 종교학자가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몇 번을 보아도 오류임이 분명해 보인다 (아마 내가 그의 말을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의 오독을 바로잡아줄 분이 있다면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이중 계율에 대한 이에 대한 기독교에 해석은 이렇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10계명을 주기 위해 두개의 석판을 준비시켰다. 하나의 석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계율이 적혀 있고 다른 하나에는 사람에 대한 계율을 적어 놓았다.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마가복음 12장 30,31), 즉 이중계율은 그러한 10계명을 염두해둔 구약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스스로가 온 것이라 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에 쓰여있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서 오직 자신이 죽어야만 성령이 우리에게 올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한복음 16장 7절) 이것이 바로 신약적인 대답이다!

 

사람에게 성령이 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 이 지점에서 타우베스는 비신앙인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심지어 성령론은 기독교 내에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위격이자 하나의 존재라고 여긴다. 여기에 기독교에 독특함이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죽기 전에는 우리에게 성령이 없었지만, 흠없는 자가 거룩한 희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에 제시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성전이다. 이것은 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중계율을 하나로 합쳐서 새계명을 만들어 주었으며, 그것을 다른 사도들을 통해 전했는지(바울뿐 아니라) 이해하게 해준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령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고, 그리하여 우리 하나 하나는 개별적인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된 사람 안에 거하는 성령을 사랑하라는 것 '역시'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은 율볍을 폐하러 온자가 아니라 완성하러 온자라고 말씀하신 것의 요체이다.

성령은 하나님이므로, 타우베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새 계명은 사람끼리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을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 좀 더 신학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사람은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결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즉 서로 '다른' 사람 안에 거하는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일반적인 기독교의 대답이라 믿는다. 어느정도는 개인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큰 틀에서 차이가 없으리라 본다. 아무튼 타우베스의 로마서 읽기는 당연히 일반적인 기독교의 입장과 다르다. 그것인 단순히 정치적으로 읽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그는 성경을 지나치게 역사적인, 문화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맥락에서 읽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타우베스가 주장하는 여러 논의들은, 그에 재기넘치는 명민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했던 다른 여러 말들과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성경 전체의 맥락과도 균열이 있어 보인다.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성경을 독해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기하는 비판은 순전히 Fact의 문제이다. 의심이 가는 분들은 위에 필자가 제기했던 성경의 구절들을 찾아 읽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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