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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희생양 -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카이로스총서 22
마이클 웰치 지음, 박진우 옮김 / 갈무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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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희생양 -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카이로스총서 22
마이클 웰치 지음, 박진우 옮김 / 갈무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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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희생양 -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카이로스총서 22
마이클 웰치 지음, 박진우 옮김 / 갈무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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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라는 이유로 인권은 무시당해도 되는가? - 9.11의 희생양 리뷰

 

출처: http://blog.daum.net/bonokensin/6758958

 

9.11 테러가 있은지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이제 우리에게는 9.11 테러는 기억조차 남지 않는 사건이 되어 가고 있네요.

이 책은 9.11테러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폭력성을 사회학적으로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렇게 쉬운 책은 아니지만 번역도 잘 되어 있고

평소 사회,정치 면 기사를 꾸준히 읽는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사료됩니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월치가 한국 방문시 직접 만나봐서 강의를 들은지라

저는 책을 읽는데 그 강연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미국은 현재 <애국자법>을 기반하여 빅브라더를 이용하여

비행탑승금지명단, 불법도청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알 카에다 지원과 대량살상 무기를 문제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결국 두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코파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전쟁을 반대했지만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무시한 전쟁을 일으켰고

고문을 자행했고 직접 고문하지 않고 고문이 가능한 국가로 인질을 인도하여서

국제법을 무시하는 행위를 계속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 대통령 사담후세인은 국제재판에 자신의 재판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무시했습니다.

911 테러 당시에도 미국국적을 가진 이슬람 민족 1000명은 영장과 이유없이 추방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빈라덴 사살시에도 미군은 영장없이 빈라덴을 사살했습니다. 이 역시도 국제법 위반입니다.

미국은 빈라덴의 배후를 밝힐 것이라고 그렇게 역설을 하지만

그를 충분히 잡을 수 있었지만 사살을 했다.

적어도 그를 잡아서 그를 법정에 세워서 의문을 푸는 행위는 미국에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럴 것이라 추정이 되는 건 제가 이상해서는 아닌 것 같네요.

9,11 테러이후 미국 내부에서 이슬람 문화 다음에 희생양으로 월가점령시위(occupy wall street)으로 지정할지 우려됩니다.

얼마전 어노니머스에서는 미국 텍사스에 위치한 보안업체(업체이름을 제대로 몰라서)와

미국국가보안부의 이메일을 해킹하여 월가점령시위가 국가 보아에 심각한 위기를 도려할 수 있다고 정의했습니다.

5월 총파업을 예고한 월가점령시위대의 행보가 개인적으로 기대됩니다.

한국 이야기를 간단히 좀 해보면 이명박 정부와서 사법권 강화 아래

인권에 대한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총리실 불법 사찰이 그 단적인 예인데

이 일은 정치권의 일이 아니라 시민의 일이라는 것을 좀 자각했으면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은

나 자신을 타인의 지정한 놀이터에서 놀게되는 끔직한 일인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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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의 희생양 -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카이로스총서 22
마이클 웰치 지음, 박진우 옮김 / 갈무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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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 책의 역자가, <<비평루트>>에 실은 서평입니다.

* 출처: http://cairos.tistory.com/m/post/286

2001년 9월 11일, 이 날짜에는 가까운 미래에도 깊이 울려 퍼질 만한 중대한 의미가 있다. 역사 속에서 이 날짜는 과거에 발생했던 이 잔혹한 사건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9/11은 현재와 그 너머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동적 감정의 기표로서, 미국인들의 강렬한 비애뿐 아니라 그들의 불안, 공포, 분노를 상징한다. (<<9․11의 희생양>>, 14쪽)

9/11 테러가 발생한지도 어느덧 13년이 흘렀다. 이 13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그 끔찍한 사건을 우리가, 스스로 잊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아닌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사건은, 엄밀히 말해 우리의 것이 아닌 타자의 슬픔이자 증오였다는 점에서 당시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크게 주목할 만한 사건은 아닌 것 같다. 9/11 테러공격이 발생한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곳, 소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는 새로운 세계무역센터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날의 희생자들을 기르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새로이 세워진 세계무역센터는 9/11 테러공격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우뚝 선 미국 자본주의의 확신을, 그 자리에 조성된 추모공원은 이 사건에 대한 미국 사회의 애도, 나아가 이 사건의 의미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미국 사회의 신념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같은 건축물의 완성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9/11 테러사건에 대한 미국 사회의 애도마저 완성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9/11 테러사건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는 작업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 같고, 이제 이 사건의 우울과 공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 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9/11 테러는 당시 미국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공포를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다. 21세기의 시작, 자본주의적 확신이 체현된 건축물인 세계무역센터가 이슬람 테러조직의 공격에 의해 무너져 내린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미국은 이 사건을 통해, 오랜만에 국제 사회에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테러공격으로 사망했다는 점은, 그리고 피해자들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점은 미국이 자신에게 피해자 이미지를 부여하기에 적합한 근거를 제공했다. 하지만 9/11 테러공격도 세월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물론 미국사회가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를 잊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13년이 지난, 2014년 9월 11일에도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 제로에는 이 충격적 사건을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13년이 지난 당시에도 여전히 미국사회는 9/11을 기억하려고 했다.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망한 무고한 사람들, 그들을 구하려 현장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구조요원들, 이들은 모두 미국 사회가 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9/11의 피해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려하지 않는 9/11의 피해자 혹은 희생양들도 있다. 이들은 9/11 테러공격으로 인한 일차적 피해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테러공격 이후, 부시 행정부가 이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용한 이슬람인과 아랍인이다. 이들은 9/11 이후의 미국사회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인권유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9.11의 희생양: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갈무리, 2011)에서 저자 마이클 웰치(Michael Welch)가 말하는 희생양이란 바로 9/11의 2차적 피해자, 즉 앞서 언급한 이슬람인과 아랍인이다.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담론이 미국 내에서 흔치 않은 것이라는 데 있다. 9/11 발생 이후, 이와 관련된 많은 담론들이 쏟아져 내린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희생양 모델을 이용해, 이 사건을 설명하고 이슬람인들과 아랍인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안팎에서 겪어야 했던 인권유린 사태를 전면에 내세워 언급하는 책은, 단언컨대 이 책 한 권뿐이다. 그것도 백인 남성 저자가, 피해자로 자신을 이미지화한 미국의 치부를 자세히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같은 지적 활동을 이슬람 계열의 연구자가 펼쳤다면 조금은 쉽게 납득이 갈 것 같다. 하지만 이 같은 작업을 펼친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미국의 백인 남성 교수라는 점은 나에게 상당한 흥미를 끄는 대목이었다. 자국에서 일어난 모종의 재난 상황을 바라보면서, 웰치는 그것으로 인한 자국민들의 고통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자국 행정부가 어떠한 만행을 저지르고,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집단을 희생양으로 만드는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9/11이 하나의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머문다면, 이 사건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웰치의 접근법을 따른다면, 9/11 테러사건에는 인류가 위기 때마다 사용해온 희생제의가 숨어있다. 고대국가 시절부터 인류는 국가 재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 사건의 죄를 물어, 무고하지만 죄를 가지고 있다고 선전할 만한 특징의 주체를 희생시켜온 잔인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주체는 희생양으로서 살해 혹은 추방되었다. 공동체의 지배권력은 대중이, 이 희생양에게 증오심을 품도록 만들었는데, 이때 대중의 분노는 어떤 이성적 판단이 아닌 광기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기에 문제적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증오를 품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증오를 이용해, 희생양에게 지배권력이 가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은 이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대중의 증오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증오범죄고, 그 범죄의 주체가 국가와 같은 공동체라는 점에서 국가범죄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이야기는 고대사회부터 21세기까지 이어져온 인간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 점은 <<희생양>>의 저자인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21세기의 시작, 2001년에도 이 희생제의는 멈추지 않았다. 9/11이라는 거대한 재난 상황이 발생하자, 미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지배권력 부시 행정부는 그것의 원인으로 이슬람 세력, 정확히 말해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지목했고, 이것에 엄청난 대중적 증오를 조장했다. 테러공격으로 분열된 국가를 다시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부시 행정부가 이용한 것은 그 증오심을 폭발시킬 통로, 즉 전쟁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부터 이라크 전쟁까지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통해, 파괴된 미국적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고, 그 속에서 미국의 대중은 하나 결집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9/11 테러용의자들과 같은 국적, 같은 인종, 같은 종교라는 이유로,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수많은 이슬람인들과 아랍인들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아프가니스탄 젊은이가 그들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미국인 간수들은 그에게 계속해서 고문을 가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딜라워로 알려져 있었고 22살이었으며 전직 택시 운전기사였다. 그는 새벽 2시 무렵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수용소의 감방에서 끌어내어져, 미군 기지를 향한 로켓공격에 관한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통역관은, 딜라워가 취조실에 도착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을 때 그가 다리를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가 지난 4일 동안 줄곧 손목에 사슬이 묶인 채 감방 상반부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9․11의 희생양>>, 202쪽)

이 같은 일들은 20세기 초중반, 그러니까 1900년대의 세계대전 가운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인권이 사회적 화두로서 이미 자리를 잡은 21세기에 발생한 일이다. 히틀러 정권에서, 스탈린 정권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자행한 국가범죄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에서 이러한 인권유린사건이 다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 자행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누군가는 9/11과 관련된 인권유린 사건도 결국 다 지난 옛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시 이후 오바마가 “담대한 희망”으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제 미국식 공포정치의 막이 내릴 것이고 전망했다. 사람들은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도 그 막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살해되자, 이 같은 예상은 더욱 실현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아직 9/11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바뀐 상황, 희망의 대통령이 부임한 미국은 현재 2014년 말까지 이라크에 군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IS”라는 이슬람 테러단체와 전쟁을 진행형이다. 이라크 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수렁에 빠져,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근거지를 잃은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자신들의 체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들을 참수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미국은 현재 과거, 자신들이 벌인 인권유린행위와 유사한 범죄를 통해 자국민을 잃고 있는 심각한 모순에 빠져있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이 취하는 방식은 안타깝게도 과거에 그들이 의존했던 방식, 즉 전쟁이다. IS와의 일전으로 이슬람 국가의 민간인 상당수가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9/11 테러공격은 13년 전의 사건이지만, 그것의 영향은 아직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현재 벌어지는 국제적 상황을 보면 이렇게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9/11 테러와 관련된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미국 행정부가 보인 발걸음들이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를 가리키는 하나의 지표라면, 이를 토대로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싶다. 그 지표에 의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는 수많은 희생양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민권과 인권이 결국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그러한 미래를 살게 될 것이다. (<<9․11의 희생양>>, 323쪽)

9/11 이후 13년 동안, 부시-오바마 행정부의 발자취가 어땠는지는, 현재의 상황으로 설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행한 전쟁과 인권유린은 지금의 미국적 상황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중요한 교훈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볼 만한 가치를 갖는다. 과연 시민권과 인권이 사라진 미래, 이런 세계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올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이 같은 끔찍한 미래가 도래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의 과오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뿐이다. 이렇게 끔찍한 증오/국가범죄를 저지르고도 부시 행정부는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마이클 웰치가 말하는 것처럼, 그 결과 미국 사회에는 죄를 짓고도 처벌 받지 않은 지배권력의 “불처벌의 문화”(culture of impunity)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한국사회는 2014년 4월 16일, 비통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은 대한민국 행정부 권력의 무능함을 그대로 노출시킨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그런데 이때 노출된 것은 행정부의 무능함만이 아니었다. 세월호 사건이라는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 행정부는 국민적 분노를 돌릴 희생양을 찾는 데 열중했다. 행정부 재난 구조 체계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행정부의 권력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희생양은 따로 있었다. 청해진해운과 관련이 있던 구원파, 즉 “이단종파”였다. 행정부와 미디어는 이들에게 국민적 증오를 돌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물론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해 청해진해운이 무고하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필자는 현재 구원파를 변호할 마음도 없다. 희생양을 만들어 권력의 안정을 꾀하고 공동체를 단결시키려는 시도가 이번에도,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 소극이 끝나고 난 뒤에 결국 누구도 세월호 사건에 책임을 지지 않은, 즉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비극적 상태로 서서히 이 사건은 막을 내리고 있다. 언젠가, 세월호 사건도, 9/11 테러처럼 잊힐 것인가? 지금 당장은 그렇다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13년 후, 2027년에 혹시 우리에게 세월호 사건과 관계된, 그것과 유사한 비극이 또 다시 발생하지는 않을까? 이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타산지석으로 <<9․11의 희생양>>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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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을 향하여 - 제도, 연결망, 그리고 권력 카이로스총서 28
스콧 프리켈 외 엮음, 김동광 외 옮김 / 갈무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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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과학이 왜 살아남는가: 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을 향하여서평

 

박진우

 

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을 향하여는 제목부터 커다란 중압감을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의 목표가 과학이라는 지극히 중립적인 것 같은 것에 모종의 정치성, 사회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정치사회학이라는 분야와, 과학이라는 뭔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의 조화에 대해 설명하는 책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두 생각은 물론 책을 다 읽고 난 뒤, 모두 적절한 추측인 것 같았으나 이 책이 이야기하는 거대한메시지를 내가 살짝 맛을 본 느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과학사회학이라는 뭔가 낯선 분야에 대해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여러 번 읽은 부분을 읽고 또 읽어야 했던 책이었으나, 이후 그 거대한 메시지를 읽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속도를 붙여가며 읽은 책이었다.

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 책은 각각의 장들로 본다면 생각보다 명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나의 거대한 메시지가 전달되기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이 다수의 저자에 의해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맹아는 분명해보였다. 그것은 과학 연구를 둘러싼 시장, 사회운동, 국가의 긴밀한 제도적 연결망, 그리고 그 연결망 속에 형성되는 권력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이 책에 대한 서평들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떻게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권력을 발생시키는지는 각 장에서 제시되는 예시마다 조금씩 달랐다. 이러한 전개구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과학의 속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지금도 과학하면 사람들이, 뭔가 외부세계의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같이 흔히 이야기하는 과학의 자율성에 대해 이 책은 애초부터 결별을 선언하고 있었다. 과학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현대과학의 구조는 정치성과 사회성을 가진 자율적이지 않은 것이고, 주변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메시지가 어쩌면 과학사회학 혹은 과학학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과학 지식은 사회학처럼 모종의 구성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과학 지식이 한 대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을 단순히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학 지식을 둘러싼 행위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협상과 경쟁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책은 이러한 점을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구성주의적 연구의 성과로 제시하고 있는데, 물론 이 같은 매우 추상적인 내용을 설파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신과학정치사회학 연구자들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협상과 경쟁을 통해 구성되는 과학지식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은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이 협상과 경쟁을 통해 어떤 과학지식이 탄생하고, 그 지식에 대한 소유권은 누가 가지며, 이 지식의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어떤 과학 지식이 연구되지 않고 도태되는지, 같은 문제를 이 책은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 협상과 경쟁에서 살아남은 과학지식의 면모를 보면, 그것들은 우리 사회를 넘어서, 더 근본적으로 말해, 우리 지구에 별로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제도, 연결망, 권력이라는, 과학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통해 과학기술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 매우 참신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중립성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어찌 보면, 근대를 이미 훌쩍 넘어선 우리 시대에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는 이 같은 사실을 우리가 줄곧 잊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는 했지만, 이 책은 간단한 이야기를 세분화하여 여러 장으로 묶은 책이 아니다. 각각의 장에서 제시되는 각각의 사례는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묶일 수 없을지 모른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매우 추상적으로 정리해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을 이제 말하고자 한다.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인데,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각각의 논문 저자들이 독자에게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과학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 아니며, 이것 또한 우리들이 신문에서 매일 보는 정치, 사회 뉴스처럼 정치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에 불과하며,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로서 우리가 그 같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듯이 과학에 대해서도 그렇게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전문가라는 이유로 이 과학지식을 둘러싼 경쟁과 협상의 라운드에서 그저 관망의 위치에 있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미 과학이 상업화 혹은 기업화되었다는 점에서 과학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파괴적인 활동을 펼칠 준비를 진작 끝내 놨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을, 그저 저 우주 속 이야기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모종의 각성을 요구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1주일하고도 며칠을 바짝 읽어야 했을 만큼 긴 책이었지만, 이 책은 내게 그 만큼 긴 각성의 시간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 각성의 시간을 위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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