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3 : 1200~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정하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 / 시공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 시리즈(총 4권)는 묵직한 볼륨감과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이벤트를 통한 서평이나 리뷰를 받기가 까다로워, 보다 전문적으로 리뷰해 주실 수 있는 분들에게 리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중세 3의 경우 역사 / 철학 / 시각예술 파트와 관련하여 각계의 전문가 세 분에게 리뷰를 부탁 드렸습니다. 세 번째로 미술사가이자 흥미로운 저술, 번역, 강연 활동을 하고 계신 이연식 선생님의 리뷰를 공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책 선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중세의 ‘시각예술’에 대한 단상

-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3』을 중심으로 본 중세 시각예술

    

 

이연식(미술사가)

  

  

중세 전문가이자 중세 시리즈의 기획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일관되게 중세가 시각에 매혹되어 있었음을 강조했다. 중세라고 하면 경건하고 금욕적인 그리스도교 문화에 내리눌려 재미도 없이 살았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정작 곳곳에 남아 있는 중세의 예술품들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끝없이 탐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서 왕 이야기를 다룬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엑스칼리버〉(1981년)는 “중세 암흑시대, 영국에는 왕이 없었다”라는 간단한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암흑시대’라는 말은 중세를 가리키는 너무도 일반적인 단어가 되었지만,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내게 암흑시대라는 말은 기이하게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역사와 미술에 대한 이런저런 글을 읽고 쓰면서, 요즘은 ‘암흑시대’라는 말을 접하면 약간 짜증부터 난다.

 

‘암흑시대’라는 말은 르네상스를 맞은 이탈리아인들이 앞선 시기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쓴 말이다. 페트라르카(1304-1374)가 처음 썼다고 하지만 그 역시 중세를 살았다. 『중세 3』은 ‘중세’라는 시기가 고대와 르네상스의 ‘중간 시기’를 지칭하기 위해 의미 없이 사용된 말이라고 언급하며 우리의 두터운 상식에 질문을 던진다. 르네상스의 인간들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극동’에서 이를 정리하고 서술하면서도 ‘암흑시대’라는 말을 관성적으로 쓰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는 그 산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외양이 훨씬 소박한 문화에 대해서도 이제는 함부로 폄하하지 않도록 어휘와 표현을 다듬고 있다. 그런데 1천 년에 걸친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어째서암흑시대’라는 말을 그리도 쉬이 쓰는 것일까?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가치 판단은 쉬이 내려지지만, 판단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골치 아프기 때문일까? 르네상스 미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다른 시대, 나아가 다른 지역의 조형 활동을 판단한다면 남아날 게 별로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중세의 조형 활동을 폄훼할 때 기준으로 등장하는 것은 르네상스, 특히 콰트로첸토(Quattrocento, 서양 미술사의 15세기)와 친퀘첸토(Cinquecento, 서양 미술사의 16세기)의 조형 활동이다. 하지만 이들 시기는 두 세기 정도인 반면에 중세는 1천 년이나 되는 기간을 가리킨다. 중세는 『중세 3』이 시작되는 13세기를 전후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직후의 상황이라 혼란과 불모의 시기를 겪었지만, 후기 중세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게다가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를 가르는 경계는 뚜렷치 않고, 경계를 짓는 기준들은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조르조 바사리(1511-1574)가 『예술가 열전Le vite』의 맨 앞에 놓았던 화가인 본도네의 조토(약 1266-1337)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걸쳐 활동했다. 조토가 죽었을 무렵에야 알프스 북쪽에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조토는 중세의 화가인가, 르네상스의 화가인가?

 

중세 미술을 폄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세의 미술이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은 균형 잡힌 인체를 보여 주는데, 중세로 들어서면서 그런 기법을 죄다 잃어버린 것 같은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를 흔히 ‘그리스도교’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다. 실은 로마 제국 말기부터 서양 미술은 이미 동방의 영향을 받으면서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묘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로마 제국이라는 문화 중심지가 사라지면서 예술가 집단은 기법을 체계적으로 익히고 연마할 근거를 잃어버렸다. 제국의 몰락으로 자신의 취향을 고집할 만한 집단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교회, 바꿔 말해 그리스도교 세력이 들어앉았다.

중세 미술을 이야기할 때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을 빼놓을 수 없다. 서유럽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문화적 구심점을 잃었던 시기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힘은 서유럽에도 뻗어서는,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곳곳에 비잔티움 시대의 미술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의 남쪽 끄트머리, 시칠리아의 체팔루 성당은 동방과 북방, 서방의 정치적, 문화적 힘이 만난 흥미로운 결과물을 보여 준다. 성당 건축은 서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이성당을 짓게 한 이는 북방의 노르만인이며, 여기에 제단 모자이크는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만들었다. 비잔티움의 예술가들이 만든 ‘크리스트 판토크라토르(Christ Pantocrator)’, 즉 만물의 지배자로서의 그리스도 온화하고도 위압적인 모습으로,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린다.

    

 

* 체팔루 대성당 모자이크, 12세기 중반

 

서방에서는 이미지를 긍정하며 향유하는 경향이 우세했지만 동방에서는 이미지가 사람들을 잘못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8세기에서 9세기 초까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성상(聖像)파괴운동이 벌어졌다. 성경에 우상숭배를 금하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데, 신의 형상을 경배하다니 안 될 말이라는 논리다.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 각지의 성상이 파괴되었고, 황제는 이에 반대하는 수도사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성상파괴운동이 겨냥하는 성상의 대부분은 이콘화였다.

 

이콘(Icon)이란 말은 그리스어 ‘에이콘(eikon)’에서 왔다. 미술사에서 이콘은 성스러운 이미지를 담은 벽화, 모자이크, 또는 판에 성모자와 예수 등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이콘화는 뚜껑을 달아 열거나 닫아 놓을 수 있었고, 작게 만들어 집안 구석에 모셔 두거나, 좀 더 크게 만들어 축제나 전쟁터에 가져가곤 했다. 이콘화는 비잔티움의 민중, 특히 여성들에게 소중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성상을 둘러싼 공방은 교리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자 이미지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관념의 충돌이었고 권력 투쟁이었다. 성상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성상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신도들이 받아들이는 데 유용하며, 성상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상에 깃든 신성(神性)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한 세기만에 성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편 서유럽은 10세기 무렵부터 어느 정도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이곳저곳에 생겨난 수도원을 구심점으로 문화의 발전 양상을 보다. 로마 제국 시대의 공회당(basilica, 가톨릭 성당)에서 유래하여 당당하고 웅장한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의 건축물이 등장했다.

‘로마네스크’라는 말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다. 애초에 중세 미술과 건축은 싸잡아서 ‘고딕’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5세기에 서로마 제국으로 침입했던 고트족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고딕 건축이 그 옛날 야만적인 고트족이 지었던 끔찍스러운 건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딕’은 기본적으로 중세의 미술과 문화를 경멸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징이라면 로마네스크 성당은 돌로 된 천장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과 벽을 두껍게 지었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 걸쳐 절정을 맞았던 로마네스크 예술에 이어 고딕 예술이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고딕’이라면 아마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쾰른 대성당의 높다란 탑을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고딕 성당은 로마네스크 성당보다 훨씬 높다.

중세의 건축가들은 성당 건물을 더 높이 올리기 위해 고심한 끝에,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옮겨 보내는 ‘늑재(rib)’를 생각해 냈다. 유럽의 대성당에 들어가 한복판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마치 사람의 갈빗대처럼 천장의 곡면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늑재다. 늑재가 천장의 무게를 이리저리 분산시키는 덕분에 고딕 성당은 로마네스크 성당처럼 벽이 두껍지 않아도, 다시 말해 넓은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만으로 천장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고딕 성당에는 천장의 무게를 건물 바깥쪽 벽으로 분산시키는 ‘버팀벽’까지 갖추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교묘한 장치들을 만들어 내면서 건축가들은 성당을 한껏 높게 지어 올렸다. 천장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지 않아도 되는 벽은 갈수록 얇아졌는데, 여기에 색유리, ‘스테인드글스’를 끼웠다. 스테인드글스는 성당을 빛으로 가득 채우면서, 성경 속의 인물과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성당 안에 들어서면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는 스테인드글스를 만날 수 있다. 이 찬란한 빛 속에서 ‘암흑시대’를 떠올리는 것은 어쩐지 가당치 않게 느껴진다. 중세는 어느 시대보다도 빛에 매혹된 시대였다.

   

 

*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성모자〉, 13세기 초

 

중세의 성당 안팎에는 성경에 실린 이야기와 인물이 조각되었다. 성당 정문 위쪽에 마련된 ‘팀파눔(tympanum)’에는 종종 ‘최후의 심판’ 장면이 조각되었다. 성당의 조각 또한 중세 예술가들의 솜씨를 잘 보여 준다. 같은 고딕 성당이라도 시대가 뒤로 갈수록 조각상들은 유연하고 매끄러워진다. 중세 미술 어디까지나 신앙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기술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시대처럼 인간의 갖가지 복잡하고 다채로운 욕구를 드러낸다. 중세 후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감탄스러울 만큼 정교하고 세련된 작품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파리의 클뤼니 중세 박물관에 걸려 있는 〈여인과 일각수〉라는 태피스트리 연작은 귀부인에게 매혹되어 맥을 못 추는 일각수를 둘러싸고 갖가지 꽃과 식물, 작은 동물과 새들이 여백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서는 환상적인 공간을 이룬다. 이처럼 후기 고딕 양식의 회화와 조각은 꿈결 같은 세상을 보여 준다.

    

 

*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부르주아의 취향에 맞는 미술이 등장했다. 『중세 4』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할, 플랑드르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15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경-1441)가 이탈리아인 상인 아르놀피니와 그의 부인을 그린 그림(〈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그 의미를 둘러싸고 이견이 분분하지만, 부르주아의 재물과 지위를 과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부가 입은 옷의 모피, 목재로 된 가구, 구리 촛대, 앞쪽에 자리 잡은 개의 털 등 그림 전체가 질감과 광택의 향연이다. 그림 한복판, 안쪽 벽에 걸린 볼록한 거울에는 부부의 뒷모습이 비치고, 거울 위 벽에는 ‘1434년 반 에이크가 이 자리에 있었다’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다. 거울 속에서 부부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화가 자신인 것이다. 화가는 거울을 이용하여 짐짓 유희처럼, 짐짓 삼가듯이, 하지만 당당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각인시켰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그리고 이를 계승한 르네상스 미술을 취미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걸쳐 낭만주의가 득세하면서 중세를 숭앙하는 유행이 등장했다. 『중세 3』의 표현처럼 ‘중세에 대한 향수’로 지칭할 수 있는 이런 흐름 속에서, 중세의 양식을 되살린 건축물들이 유럽 곳곳에 여럿 지어졌다. 영국의 몇몇 예술가들은 라파엘로 이전(以前)의 미술을 지향한다며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前派)’라고 불렀다. 이들은 르네상스야말로 예술을 타락시켰고, 이상적인 예술은 르네상스 이전, 그러니까 중세 예술이라고 여겼다. 라파엘 전파는 중세의 로맨틱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그림 속에 담았다. 이들이 생각한 중세는 이랬다. 인간은 좀 더 자연과 가까웠으며 예술가는 개인적인 부와 명성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스스로의 재능을 바쳤다. 이들 무명의 건축가와 장인이 비상한 재능과 의지로 대성당들을 쌓아올렸다…….

 

물론 중세의 실제 모습은 이들이 떠올린 것과는 크게 달랐다.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는 폭력과 약탈로 가득한 역사에 대한 치장일 뿐이었고, 중세의 예술가들은 스스로 작품의 주제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 전파를 비롯한 중세 숭배 열풍을 돌아보면서 이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암흑시대’였던 중세가 어떤 이들에게는 꿈과 이상의 시대였다. 남아 있는 과거의 유물을 놓고도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찬란한 유산이라고는 해도, 그 시대를 채웠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나마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아 있는 것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이연식

미술사가. 미술과 관련된 저술, 번역, 강의를 한다.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눈속임 그림』, 『아트 파탈』,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 『괴물이 된 그림』 등을 썼고, 『무서운 그림』 시리즈, 『다케시의 낙서 입문』,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등을 번역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컬트, 마술과 마법 - 고대 주술부터 현대 마법까지 오컬트 대백과사전
크리스토퍼 델 지음, 장성주 옮김 / 시공아트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2003년 출간되어 여러 마니아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미스터 크롤리』의 저자 금기진 선생님께서 오컬트, 마술과 마법』의 서평을 써 주셨습니다. 이 책에 관심을 갖고 계신 독자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컬트, 마술과 마법의 출간에 즈음하여

 

- 금기진(『미스터 크롤리』 저자)

 

판타지 문학이나 마법을 다룬 영화 및 게임의 인기와 함께 일어난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오컬트적 세계관에 더 이상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컬트적 세계관이란 현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의식이나 주문, 시각화, 혹은 육신이 없는 지성체의 의지와 능력으로 변경이 가능하다는 개념이다. 종교에서 우리는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선지자들이나 천사와 대화하고 악마를 부리는 왕들의 이야기로 이를 접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빛과 진리가 승리하는 종교적 세계관과는 달리 오컬트에서 우리는 어둠의 권능을 대담히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종교나 사회의 권위에 대적하려는 자들도 보게 된다. 한마디로 신이든 선지자이든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식이다. 무모해 보일 수도 있으나 어떻게 보면 단호한 용기가 깃든 반항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2003년에 출간된 미스터 크롤리로 세계적인 의식 마법의 대가였던 알레이스터 크롤리(Aleister Crowley)를 국내 최초로 소개한 필자로서는 당시 독자들이 보였던 반응을 통해 오컬트의 위험하고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된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이런 분들이 목마르게 구하는 지식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는 일은 정말 드물다는 점이다. 영어나 프랑스어, 혹은 일본어 실력이 충분해서 원서를 자유롭게 읽는 소수의 교양인들을 제외한다면 이런 텍스트적 희귀성은 많은 독자들을 욕구불만에 빠뜨렸으리라.

 

런 각도에서 본다면 이번에 시공아트에서 펴낸 크리스토퍼 델의 오컬트, 마술과 마법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환영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저 또 하나의 두꺼운 '커피 테이블 북'으로 치부하기에는 책에 담긴 지식의 양과 질이 절대로 만만하지 않다. 물론 백과사전적 도서의 특성상 한 가지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는 아쉬움도 있다. 예를 들어 점성학처럼 무한히 복잡한 학문을 겨우 몇 페이지를 통해 소개하려니 약간의 무리가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의 음양도나 노르드인의 룬 문자, 혹은 16세기 에노키안 마법의 선구자였던 존 디와 같은,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한 주제들을 희귀한 도판을 곁들여 한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흔치 않은 기쁨이다.

 

저자인 크리스토퍼 델은 예술사를 전공한 인물이다. 이런 학문적 배경을 지닌 사람이 오컬트에 대한 책을 쓸 경우 대개 근대 이전의 역사에 치중하기 쉬운데, 델은 예외적으로 크롤리와 디온 포천을 배출한 황금 여명회나 위카의 창시자인 제럴드 가드너, 카오스 마법의 선구자인 오스틴 오스만 스페어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공평하게 다루고 있다. 오컬트 마니아들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각도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자기 주장이 강한 독자들에게 이 책은 필수적인 소장 도서가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 3 : 1200~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정하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 / 시공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 시리즈(총 4권)는 묵직한 볼륨감과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이벤트를 통한 서평이나 리뷰를 받기가 까다로워, 보다 전문적으로 리뷰해 주실 수 있는 분들에게 리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중세 3의 경우 역사 / 철학 / 시각예술 파트와 관련하여 각계의 전문가 세 분에게 리뷰를 부탁 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중세 철학 전공자이자 중세 시리즈의 철학 리뷰를 계속 맡아 주신 오캄연구소 유대칠 선생님의 리뷰를 공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책 선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3세기는 미래를 위해 거부당한 거장의 시대였다!

- 철학을 통해 바라본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3

    

 

유대칠(오캄연구소장)

 

 

분명한 변화다. 그것도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두고 일어난 거대하고 분명한 변화다. 그리고 일종의 분기점이다. 여러 갈래들이 모이고 다투고 흩어졌다 또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거치며 더 크고 다양한 갈래의 시작이 되었다. 13세기의 일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철학사에서 다루어진 단 몇 명이 만든 변화가 아니라 훨씬 다수의 거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기점을 만들어 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에서도, 근동의 이슬람교와 유대교에서도, 유라시아의 또 다른 끝인 동아시아에서도 분기점이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분기점을 만든 거장들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것을 더욱 분명히 했다. 분기점은 고요히 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강물을 여러 지류로 나뉘게 했다. 거장들은 그 중심에서 온몸으로 물의 흐름을 나누었다. 쉽지 않았다. 고유한 물은 자신을 나누는 거장의 앞에서 급류가 되어 때렸다. 때로는 너무나 심한 외상에 온전히 서기도 힘들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이것이 13세기 거장들의 운명이었다.

 

중세 3에 등장하는 13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1-1274, 국내에서는 약 1225-1274년으로 통용됨) 역시 처음부터 많은 이의 환호를 받은 것이 아니다. 조용한 수도원이나 고요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 간 것이 아니다. 그 역시 흐르는 강물을 거슬렀기에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현재 우리들의 생각과 달리 그의 사상도 1277년의 단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변화를 거부하던 보수주의자들은 아퀴나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신을 그냥(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에게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아퀴나스와 논쟁하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인 스웨덴의 보에티우스(13세기)와 시제루스(1235-1282)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논쟁을 주고받던 사이였지만 변화 자체를 거부하던 이들의 눈에는 그저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뿐인가? 최근 들어 각광받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에크하르트(1260-1328) 역시 그의 시대에는 인정은커녕 금지 대상이었다. 그 유명한 단테(1265-1321) 역시 다르지 않았다. 1329년에 그가 펴낸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담은 제정론은 추기경 베르트랑의 손에 불태워졌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구분을 이야기했던 오컴의 윌리엄(1280-1349)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13세기(14세기 초까지)를 대표하는 거인들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철학이 미래를 위한 씨앗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준비했지만 막상 자신의 시대엔 거부당한 거인들이었다. 13세기는 그러한 시대다. 그것이 중세 3의 철학 세계다.

 

13세기는 유럽만으로 그릴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유라시아의 사상사도 읽어야 그 큰 풍경을 대강이라도 그릴 수 있다. 더 이상 외부와 고립된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유럽은 몽골의 침략으로 유럽 밖을 알게 되었다. 그곳엔 자신들을 공포에 떨게 한 막강한 몽골 제국이 있었다. 이제 유럽인에게 동아시아는 전설이나 설화 속 존재가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고, 그 지각은 세계상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1254-1324)가 황하 강을 찾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화약이 유럽에 전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이미 소총과 대포를 만들었고, 심지어 연속 발사가 가능한 대포도 개발된 상태였다. 유럽에 전해진 화약은 1380년에 제노바-베네치아 전쟁에서 사용되었고, 1403년 피렌체-피사 전쟁에서는 지뢰도 사용되었다. 유럽에 화약 무기가 발달하면서 인류 역사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유럽은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의학적 성과를 유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여러 대학의 의학부에서는 아비케나(980-1037)와 같은 이슬람 학자들의 의학적 성과를 다룬 저술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졌다. 그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이렇게 유럽은 화약에서 의학에 이르기까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체계화시켰다. 이것도 13세기의 단면이며 심연(深淵)에는 철학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성과가 아랍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중세 이슬람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철학을 위한 소재를 마련하게 되었다. 단순 번역이 아닌 자기 철학의 초석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킨디(?-873)1철학에서 이미 단순 번역 혹은 모방 수준을 넘어선 독창적인 이슬람 철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알-파라비(870-950)를 지나 아비케나와 아베로에스(1126-1198)까지, 더 이상 번역에 근거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모방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는 유대교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마이모니데스(1138-1204)와 사디아 벤 요세프(882-942)가 있다. 다만 중세 이슬람교와 유대교 철학자들은 그냥(무조건) 믿지 않고 이해하고자 했다.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려고 치열하게 노력을 전개했다. 자신의 신앙마저도. 예를 들어 유대교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는 성서를 자신의 철학을 통하여 읽으려 했는데, 종교가 다른 고대 철학자 알렉산드로스와 이슬람 철학자 아비케나, 그리고 알-파라비 등의 도움 속에서 성서를 읽어 갔다. 지금도 읽혀지는 대작인 마이모니데스의 혼란된 이들을 위한 길잡이는 이 과정에서 나왔다. 사디아 벤 요세프도 마찬가지로 신앙과 이성이 모순 없이 조화된다고 믿었다.

불만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슬람의 알-가잘리(1058-1111)의 눈에는 철학자들의 합리화가 무리(無理)한 것으로 보였다. 신의 섭리와 창조, 그리고 죽은 육신의 부활과 같은 신앙의 신비들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지워져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철학자들의 모순을 저술했다. 이에 다시 아베로에스가 철학자들의 모순의 모순을 집필하여 알-가잘리를 비판했다. 둘의 마찰은 이들의 저술이 번역되어 전해진 유럽 대학에서 다시 한 번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 또한 13세기 유럽 대학의 모습이다.

많은 아랍어와 히브리어로 된 철학적 성과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1265-1308), 오컴의 윌리엄과 에크하르트의 철학을 이야기를 할 때 이슬람교와 유대교 철학 선배들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아퀴나스의 사상 곳곳에 아비케나, 아베로에스, 마이모니데스와 이븐 가비롤(1020-1058)이 있다. 스코투스의 존재론을 다루면서 아비케나를 빠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유럽 대학을 구성했던 거장들은 하나같이 이슬람교와 유대교 선배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금 시대의 화두가 등장한다. ‘신앙 앞에서 이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13세기 유럽은 장원제 농업 사회가 아니라 상공업에 기반을 둔 도시 중심의 사회였다. 상업이 번창한 도시가 곧 유럽의 중심이었다. 상업 사회는 의 가치가 부각되는 사회다. 따라서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탁발 수도회가 이 시기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돈은 시대의 화두였다. 학자들도 돈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와 교육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이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안이 상공업자 조합이었다. 학자와 학생은 조합을 만들어 새 시대에 맞는 학문을 이어 갔다. 고요한 수도원이 아닌 치열하게 싸우고 다투며 발전하는 도시, 그렇게 도시 내부에 세워진 대학이 학자들의 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토론 중심의 수업과 대전(summa)’이란 형태의 창의적인 문헌 방식이 등장했다. 하지만 대학의 첫 안착(安着)은 쉽지 않았다.

13세기 유럽의 대학들은 때마침 유입된 이슬람교와 유대교 철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철학은 당시 신학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과도한 이성의 월권으로 봤기 때문이다. 당장 1270년에 도미니쿠스회의 에지디우스 로마누스(1247-1316)가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두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0-1280)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13세기 동안 신학부와 신학자, 그리고 종교인들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연구가 수차례 금지되었다. 자신들이 믿는 천지 창조와 구원에 대한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위험한 딴지로 보였던 것이다. 마치 과격한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위험한 것으로 여겼듯이 말이다. 그들은 대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이슬람 철학을 금지시켰다. 물론 학문들의 아버지와 같은 개혁적인 문헌을 통하여 대학의 자율권을 인정하려는 흐름도 있었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새롭고 강력한 흐름 앞에서 매우 강한 방어적 태도를 보였다.

 

지금은 당연한, 신앙으로부터의 철학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위험한 시대였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단이 되었다. 순수한 이성 혹은 철학의 눈이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우주의 창조가 아닌 영원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주장과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인간 이상의 월권을 행사한다고 의심받으면서 그의 철학은 결과적으로 의심스러운 철학이 되었다. 1282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오류 교정이라는 선언문이 등장했다. 1323년에 성인에 선포되기 전까지 그의 철학은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에크하르트의 사상 역시 금지되었다. 인간 가운데 신성함을 이야기하던 그는 종교 재판을 받고 이단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신성함이 있다는 신심 어린 이야기도 위험했다. 변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단테도 교황만 신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는 것을 거부하며 교황과 황제 모두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과거에 비해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교회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큰 반감을 샀다. 오컴은 교황 교서 거룩한 하나의 교회의 국가 권력이 교황의 권력에 예속된다는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종교 권력, 즉 교황의 권력은 지배 권력이 아닌 봉사 권력이어야 했다. 무엇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종교 권력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 권력의 몫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들을 논박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상식이 아직 상식이 아니던 시대가 13세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상식이 되기 위해 거장들이 온 삶을 다해 소리치기 시작한 것도 13세기다. 우리에게는 현재이자 그들에게는 미래인 오늘날을 준비한 거장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시대에는 거부당한 거장들의 시대가 13세기다.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볼로냐 대학은 아비케나의 의학적 성과를 라틴어로 번역연구하고, 관념이 아닌 직접적인 해부를 통하여 보다 깊이 인간 이성과 경험에 중시하는 의학을 만들어 갔다. 의학부임에도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연구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학자는 치열하고 합리적이어야 했다. 이런 이들에게 점성술에 의하여 인간의 건강과 삶이 결정된다는 논의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13세기에는 의학에서도 지금의 상식이 서서히 상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

 

13세기는 아퀴나스, 보에티우스, 시제루스, 에크하르트, 오컴, 단테와 같은 거장들이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산 시대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위해 그들이 치열하게 궁리하던 시대다. 자신의 시대에는 거부당했지만 미래를 열어 주었던 거장들의 시대다.

중세 3이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으로 나누어 중세의 경제와 사회, 문화 등을 고루 살피고 있는 시대가 13세기다. 미래를 준비한 그러나 거부당한 거장들의 시대.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어쩌면 13세기의 고민은 아직 미완일지도 모른다. ‘대학의 학문 자유신앙과 이성의 관계’, 그리고 국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 시대의 거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지, 설사 현재에는 거부당한다고 해도 말이다.

 

글쓴이 유대칠

중세 철학을 공부했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운영하며 소유를 위한 철학보다는 공유를 위한 철학을 모색하는 가운데 다양한 강연과 번역, 그리고 글쓰기를 진행하고 있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ockhamtextu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 3 : 1200~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정하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 / 시공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 시리즈(총 4권)는 묵직한 볼륨감과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이벤트를 통한 서평이나 리뷰를 받기가 까다로워, 보다 전문적으로 리뷰해 주실 수 있는 분들에게 전문적인 리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중세 3>의 경우 역사 / 철학 / 시각예술 파트와 관련하여 각계의 전문가 세 분에게 리뷰를 부탁 드렸습니다. 첫 번째로 비교문학 박사이자 여러 편의 중세 관련 저술을 집필하신 양태자 선생님의 리뷰를 공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책 선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녀 혹은 마녀? 중세 여성들의 삶, 이것이 중세 진짜 중세다!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3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을 통해 본 중세

양태자(비교문화학 박사)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31200-1400을 기술한다. 일반적으로 중세는 3단계로 구분하는데 중세 대가인 자크 르 고프의 견해에 따르자면 초기는 500-1050, 중기는 1050-1250, 말기는 1250-1500/1700이다. 따라서 중세 3에는 중세 중기와 후기가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서양의 중세는 무려 1천 년을 포괄하니 이 시기에 얼마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졌겠는가?

중세가 여성들을 끊임없이 핍박했던 시기였다는 우리의 상식과 상충되는, 중세를 이끈 여인들도 존재했다.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중세 3에 등장하는 몇 명의 삶을 통하여 중세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빙엔의 힐데가르트(1098-1179)와 스웨덴의 비르지타(1303-1373), 헝가리의 엘리사벳(1207-1231)이 그들이다.

그에 앞서 초기 중세의 성윤리를 살펴보자. 당시 여성들은 관습법을 통하여 꽤 보호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억압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중세가 남성 위주의 사회였다는 것이다. 또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그럼에도 사회의 굴레를 뛰어넘는 똑똑하고 특출한 여인들이 나타났다.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중세 2에 등장하는 11세기경의 트로툴라는 의사다. 유럽의 첫 의사 세대에 속하는 그녀는 당시 의학 도시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살레르노 출신이다. 그녀는 특히 외과와 피부과 질환을 잘 고쳤다.

이브가 사과를 따 먹은 죄로 모든 여성들은 당연히 산고의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이 때문에 산모의 통증을 경감시키는 어떠한 약초 사용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트로툴라는 용감하게도 약초를 만들어 산통을 덜어 주는 방법을 제공했다. 더불어 임신을 두려워하는 여인들에게 상당히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된 방편도 일러 주었다. 이를테면 동물의 가죽을 감은 돌이나 돼지의 고환을 몸에 지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으로 임신을 피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후대 학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부인을 보고 기겁한 남편이 부인에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어쨌거나 온통 그리스도교로 무장된 사회에서 이러한 지침을 내리기까지는 매우 담대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게르만 민족 등의 잔재로 미신과 풍속이 여전히 유행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중세인들은 두려움이나 피할 수 없는 공포, 좌절과 난치병과 마주할 때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액막이 부적 등을 먼저 찾았다. 산호를 예로 들어 보자. 산호라 하면 주로 붉은색만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산호는 흰색, 오렌지색, 나아가 흑갈색도 존재한다. 산호에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들은 이것을 마귀의 힘을 벗겨 내는 부적으로 사용했다. (성서에) 예수가 소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기에 예수의 손으로부터 나온 치유의 힘이 소녀에게 닿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처럼 산호나 보석도 마찬가지로 몸에 지니거나 목에 걸고 다니면 신비한 힘이 나와 치료에 도움을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중세 3에 나오는 여성들의 삶을 몰입해 보자. 중세 3은 그녀들의 눈에 띄는 행적과 의미를 위주로 살피고 있지만 삶 전체로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우선 빙엔의 힐데가르트12세기의 최고의 여성인 동시에 독일의 첫 신비주의자로 간주된다. 그녀는 오늘날처럼 신의 부르심따라 자발적으로 수녀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겨우 여덟 살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수녀원에 들어갔다. 다행히 탈선(?)에 빠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자주 현시 체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베네딕투스회 수녀원에서 정식 수녀가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신약과 구약을 두루 공부했으며, 여러 방면의 전례 기도서도 익혔다. 정원에서 약초 연구도 했는데, 관련 저술을 집필할 정도로 박식했다.

1136년에 자신의 멘토였던 유타 수녀가 죽고 난 뒤에 수녀원장이 된 힐데가르트는 (여러 남자 수도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수녀들을 수용하고자 수도원을 다시 지었다. 그녀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수녀원 밖으로 나섰는데, 각처에서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세 명의 교황들과 편지 교환을 할 정도였다. 교황들과 주고받은 300통의 편지가 현존한다. 1154년에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알현을 청했을 정도였다. 또한 민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설교하기 위해 여러 장소로 떠났고, 배로도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다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일례로 77곡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신비주의, , 작곡, 종교, 의학, 음악, 윤리학, 우주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성관계지침서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수녀였다는 점 말고도 상세한 설명과 비유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녀는 이상적인 성교 방법은 물론이고 아들 혹은 딸을 낳을 수 있는 기술까지 상세하게 적었다. 의학서도 집필했다. 독일에서는 힐데가르트-의학으로 칭하면서 일부가 지금까지 사용된다.

 

다음으로 헝가리의 엘리사벳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사망 4년 후에 성녀에 추앙된 인물이다. 그녀는 정략결혼으로 네 살 때 이미 혼인하여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양육되었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었지만 그녀 옆에 선 신랑은 원래 그녀와 결혼하기로 한 이가 아니라 신랑의 동생이었다. 여담이지만 중세 결혼식에는 신랑 대신 대리인을 내세우고 식을 올리는이른바 대리 결혼이 성행했다. 이것은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유물로 대리 신랑과 형식적인 초야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 경우는 약혼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으로 원래 신랑의 동생과 결혼하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결혼 생활 6년간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엘리사벳에게 성녀가 될 맹아가 보였다. 그녀는 왕녀 출신이었음에도 주변의 빈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강력한 신분제 사회에서 이와 같은 행동은 참으로 드문 것이었다. 그나마 남편의 조력으로 자선을 이어 갔는데, 그가 그만 십자군 전쟁에서 사망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형의 권력을 계승한 시동생이 형수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을 당장 중단하라!” 왕족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거부한다면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고심 끝에 후자를 택한 엘리사벳은 세 아이를 데리고 독일 마르부르크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면서 자선 병원을 지었다. 큰 흉년이 들어 민중들이 생존의 기로에 섰을 때에는 사비를 풀어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당시 그녀의 영혼을 돌보던 콘라드 사제가 그녀에게 하나의 제안을 하는데, 빈자를 돕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 자식들을 다른 가정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했다. 종교적인 가난을 누리면서 살자는 운동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그녀가 속한 단체는 수녀가 아닌 평신도 단체로‚ ‘베긴회라고 칭해졌다. 수녀원에 들어가지 못한 여성들이 평신도 신분으로 바깥에서 자급자족하며 수녀처럼 살았던 것인데, 중세 3에 나오는 마르게리트 포레트, 안트베르펜의 하데비치, 하케보른의 마틸다, 헬프타의 제르트루다 등도 여기에 속한다.

엘리사벳은 스물네 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사망했다. 왕족 출신의 그녀가 당대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 헌신의 삶을 택했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다. 덕분에 그녀의 이름은 영원히 남아 지금도 마르부르크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딴 성당에는 해마다 수많은 이들이 방문한다.

 

마지막으로 스웨덴의 비르지타역시 왕족 출신이었다. 그녀는 일곱 살 때부터 성모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주 체험했다. 종교적인 경건함에 심취한 그녀는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원했지만 아버지의 강력한 강압에 의해 열네 살에 아버지가 정해 준 남자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두 쌍의 형제자매끼리의 결혼이었다. 그녀의 여동생도 비르지타의 신랑의 형제와 결혼했던 것이다. 부부의 합방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그녀의 경건한 종교심도 작용했겠지만 어린 나이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여덟 명의 자녀를 출산하면서 장장 28년간이나 결혼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하자 다시 종교의 길에 들어섰다.

종교에 귀의한 그녀는 당시 가톨릭이 저지르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바로잡기도 했다. 이 시기 프랑스 아비뇽의 교황청에는 클레멘스 6(1342-1352)가 거주했는데, 그는 전임 교황들이 모아 두었던 공금을 호화로운 생활을 하느라 전부 탕진했다. 이에 비르지타는 교황의 처사를 매우 나무라면서 편지를 썼다. 여성들이 그다지 큰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대였기에 그녀의 행동은 시대정신을 초월한 상당한 용기 있는 것이었다.

비르지타는 1346년 가을에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로마에 당도한 그녀는 집을 빌려 그리스도 정신을 따르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수도원에서와 비슷한 생활을 하며 헐벗은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았다. 1347/1348년의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을 당시에도 로마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비하여 피해가 덜했다. 이를 두고 비르지타의 독실한 신앙심 때문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또한 자신의 고해 신부인 페트루스로부터 라틴어를 배우는 등 영적인 부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클레멘스 6세가 1350년에 희년을 선포했을 때에도 적극 후원했다.

현시 부분도 살펴보자. 그녀의 계시들은 처음에는 스웨덴어로 쓰이고 다시금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1373년에는 그녀의 계시가 진짜인가 거짓인가의 문제가 심판에 올랐다. 이에 베르나르도 대주교가 그것을 가늠하는 시험을 행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계시는 진짜로 판정받았다. 사실 그녀가 아직 고국 스웨덴에 있었을 때, 그녀의 환시와 계시를 속임수라고 단정했던 한 사제는 신은 어째서 그녀에게 계시를 내린단 말인가? 많은 남자 수도자들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동정녀도 아닌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한 부녀자에게 나타난다는 말인가?”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비르지타는 굴곡진 삶을 뒤로 하고 1373년 로마에서 일흔한 살로 생을 마감했다. 현재의 아흔 이상의 장수였다. 장례 5주 후에 그녀의 무덤이 다시 파헤쳐지는 일이 벌어졌다. 놀랄 일이 아니다. 이름 있는 이들의 시신을 갈라 무덤을 여러 곳에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의 더운 여름 때문에 부패가 많이 진행되었다. 그녀의 추종자들과 딸은 1373112일에 그녀의 유골을 들고 로마에서 스웨덴으로 향했고, 아홉 달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중세에는 흥미진진한 삶을 살았던 여러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루터의 아내이자 전직 수녀였던 가타리나, 평민 출신의 성녀 노트부르가, 여성 교황으로 추정되는 요안나 등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왕의 어머니로서 적극적으로 섭정에 나섰으며,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여성들도 여럿 존재한다.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나폴리의 조반나, 프랑스의 이사벨라 등이다. 이처럼 중세에도 사회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활약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어떤 인물들보다 중세의 주인공이었다.

 

 

글쓴이 양태자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과 비교문화학으로 석사학위를, 예나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에서 20여 년간 비교종교학과 비교문화학을 공부했으며, 600권이 넘는 자료를 수집해 중세 유럽에 관한 여러 권의 저술을 집필했다. 지은 책으로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 역사를 만들다 - 예술이 보여주는 역사의 위대한 순간들 전원경의 예술 3부작
전원경 지음 / 시공아트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술, 역사를 만들다>는 예술 스토리텔러 전원경이 들려주는 ‘예술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예술의 역사가 아닌, 각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그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낸 역사와 예술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전문가 리뷰를 통해 좀 더 많은 분들에게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자 의뢰한 리뷰 입니다. 첫번째 리뷰자는 칼럼니스트 정재웅님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도서 선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지 클루니가 제작, 감독, 각본, 주연을 모두 맡은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이라는 영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각지의 미술품을 약탈하고 독일이 패하거나 본인이 사망할 경우 그 모든 예술품과 문화유산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히틀러에 대항해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미술사학자 프랭크 스톡스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하여 역사와 예술 전공자들을 모아 조직한 특수임무부대인 “모뉴먼츠 맨(Moments Men)”의 활약을 서술한 동명의 역사책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주인공 프랭크 스톡스는 이런 말을 한다. 


“인류가 살아온 모든 역사에서 사람들이 이룩한 문화를 파괴하면,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버리지. 그것이 바로 히틀러가 원하는 거야(If he destroyed entire generation people’s culture, it is that they never existed. That’s what Hitler wants).” 



프랭크 스톡스의 이 말 그대로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문명을 이룩한 이래 살아온 흔적은 역사와 과학으로 증명하고 밝혀낼 수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류가 만든 미술, 음악, 건축 등 문화유산이다. 인류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경외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불국사와 석굴암이 없어진다면, 팔만대장경과 고려청자가 없어진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신라 혹은 고려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역사는 기록만큼이나 유형의 문화유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맥락에서 피라미드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를 조각한 조각상 및 당시 평민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조각이나 고대 그리스의 제우스와 아테나 같은 신을 형상화한 석상이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를 그린 병부터 시작되는 인류의 모든 유·무형의 문화유산은 인류가 살아온 흔적을 증언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당대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역사를 만들지만, 반대로 예술에는 그 당대의 모습이 반영되기 때문에 역사가 예술을 만들기도 한다. 즉 인류가 살아온 궤적으로서의 역사와 그 인류가 만든 문화유산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며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온 흔적을 증명한다. 예술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술비평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문화콘텐츠 산업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원경 교수의 이 책 『예술, 역사를 만들다』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저술된 책이다. 우리는 흔히 예술은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과 분리되는 예술만의 독특한 사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상당수의 사람들은 유럽의 역사적 흐름과 분리되는 별도의 흐름으로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예술 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예술 사조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 전 시대의 예술 사조에 대한 하나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 것이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미술 – 피라미드, 미라, 스핑크스, 사자의 서, 아부심벨 등 – 은 고대 이집트의 자연환경과 그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제정일치 사회 및 내세를 중시하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은 고대 그리스의 경우 폴리스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고대 로마의 경우 공화정과 활발한 정복활동 및 실질적이고 강건함을 중시한 사회적 체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전자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및 인간의 형상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이상화한 신상으로, 후자는 콜로세움, 개선문, 포룸 로마눔의 건축물 등 공공건축물로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즉 한 시대의 예술 –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등 – 은 당대 사회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모습은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시작된 중세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이 중요하게 작용한 시대였다. 이는 유럽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종교적 성향으로 인해 활발하게 제작된 것이 현재까지 많이 남아있는 성화다. 상술한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에서 중요한 예술작품으로 등장하는 것이 “헨트 제단화(Ghent Altarpiece)”다. 




‘어린 양에 대한 경배’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걸작은 어린 양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사람들을 나타난 하부의 패널과 전능하신 하느님, 성모 마리아, 세례 요한 및 아담과 이브를 나타내는 상부 패널로 구분된다. 이러한 패널의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당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강력하게 규율한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나타내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 것은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유럽을 지배하게 된 게르만족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문맹들이 많았기에 성경의 이해를 위해 그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줄 필요성이 높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성화는 단순한 미술작품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여 사람들의 신심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레고리안 찬트로 대표되는 성가 역시 성경의 내용을 사람들이 귀로 듣고 입으로 따라 부르게 할 목적에서 나타났다. 천국을 지상에 구현하는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성당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예술은 그리스도교적 세계관과 성경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보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이 투영된 중세시대의 예술 작품은 하나의 프로파간다인 것이다. 이처럼 예술은 당대 사회를 반영하고, 다시 반대로 당대 사회는 예술에 의해 규율된다.


이러한 예술의 특징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예술사조가 바로 르네상스와 고전주의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재생” 혹은 “문예부흥”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하나의 예술 사조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고전 시대를 다시 살려낸 것이다. 오랜 중세를 거치면서 잊히다시피 했던 고전 시대의 가치를 살린 것은 십자군 전쟁 및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 등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이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은 이슬람 세계가 간직하고 있던 고전 시대의 저작과 예술을 접할 수 있었고, 이슬람과의 교역을 통해서는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처럼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새롭게 접한 고전 시대의 가치를 되살려낸 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피렌체는 바르디, 페루치, 아치아우올리 등 일찍부터 중세의 초기업(Medieval Super-Company)이라 불린 금융기업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도시다. 전성기의 메디치 가문조차 바르디 가문이나 페루치 가문에 비하면 소규모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하여 메디치 가문은 예술 활동을 후원했고, 그 결과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라파엘로 산치오 등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메디치 가문뿐만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들, 심지어 교황까지도 이러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는데,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시스티나 성당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등 프레스코화, 그리고 역시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와 레오 10세와 메디치가 두 추기경의 초상화가 그 결과물이다. 이 중 가장 이질적인 것이 시스티나 성당에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인데, 교황의 서명실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모습을 그릴 정도로 이 시기가 사상적으로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즉 르네상스는 이슬람과의 교역과 활발한 상업 및 금융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에서 고전 시대 문화를 접하면서 나타난,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 사이의 짧은 사상적 자유 시기에 나타난 예술이자 그 예술이 나올 바탕이 된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 배경이다. 만약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교류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없었다면, 그리고 그 부를 통해 예술 활동을 후원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는 나타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르네상스는 하나의 중세시대의 안티테제로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예술 사조가 아니라 당대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환경이 뒷받침 되었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예술 사조인 것이다.


고전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자크루이 다비드와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양식은 프랑스 대혁명 및 나폴레옹과 그 궤를 같이한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살롱전 입상 작품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공화정 로마의 초창기, 이웃 도시 알바 롱가와의 대결을 앞두고 아버지로부터 칼을 받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를 묘사하고 있다.



 오직 애국만이 존재하는 이 작품은 예술 작품이기 이전에 프랑스 대혁명의 사사을 보여주는 하나의 프로파간다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다른 그림들 –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의 대관 –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자신감 넘치는 혁명의 상징으로서 젊은 장군 나폴레옹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폴레옹의 대관 역시 프랑스 제국의 상징이자 그 자체로서 나폴레옹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음악은 그 이전 시기 바로크와 로코코의 궁정음악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수요를 위해 음악을 작곡하는 혹은 작곡가 개인의 느낌과 생각과 사상을 표출하기 위한 활동의 결과다. 베토벤은 그 이전 시기에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개인 악장이었던 하이든이나 잘츠부르크와 빈의 궁정 악장으로 있으면서 귀족과 왕족의 수요를 충족시켜줘야 했던 모차르트와 달리 시민들을 위해 작곡을 하고 시민들 앞에서 공연을 했다. 즉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이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음악이 나타나게 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처럼 고전주의 역시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나타난 프랑스 대혁명 및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예술 사조이자, 반대로 그 프랑스 대혁명과 부르주아 계층의 이상을 표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 사조다.


고전주의 이후 나타나는 낭만주의, 인상주의, 큐비즘, 추상주의 모두 마찬가지다. 예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과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이다. 앞에서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을 언급하며 예술은 인류가 살아온 흔적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예술은 그 자체로도 인간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지만, 그보다 더 큰 가치는 우리가 살아온 과정과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고갱의 작품명이기도 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바로 예술 그 자체이자 예술이 지향하는 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이것을 긴 호흡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랜만에 읽은 흥미로운 예술사와 역사를 다룬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