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3 : 1200~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정하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 / 시공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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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 시리즈(총 4권)는 묵직한 볼륨감과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이벤트를 통한 서평이나 리뷰를 받기가 까다로워, 보다 전문적으로 리뷰해 주실 수 있는 분들에게 리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중세 3의 경우 역사 / 철학 / 시각예술 파트와 관련하여 각계의 전문가 세 분에게 리뷰를 부탁 드렸습니다. 세 번째로 미술사가이자 흥미로운 저술, 번역, 강연 활동을 하고 계신 이연식 선생님의 리뷰를 공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책 선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중세의 ‘시각예술’에 대한 단상

-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3』을 중심으로 본 중세 시각예술

    

 

이연식(미술사가)

  

  

중세 전문가이자 중세 시리즈의 기획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일관되게 중세가 시각에 매혹되어 있었음을 강조했다. 중세라고 하면 경건하고 금욕적인 그리스도교 문화에 내리눌려 재미도 없이 살았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정작 곳곳에 남아 있는 중세의 예술품들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끝없이 탐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서 왕 이야기를 다룬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엑스칼리버〉(1981년)는 “중세 암흑시대, 영국에는 왕이 없었다”라는 간단한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처럼 ‘암흑시대’라는 말은 중세를 가리키는 너무도 일반적인 단어가 되었지만,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내게 암흑시대라는 말은 기이하게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역사와 미술에 대한 이런저런 글을 읽고 쓰면서, 요즘은 ‘암흑시대’라는 말을 접하면 약간 짜증부터 난다.

 

‘암흑시대’라는 말은 르네상스를 맞은 이탈리아인들이 앞선 시기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쓴 말이다. 페트라르카(1304-1374)가 처음 썼다고 하지만 그 역시 중세를 살았다. 『중세 3』은 ‘중세’라는 시기가 고대와 르네상스의 ‘중간 시기’를 지칭하기 위해 의미 없이 사용된 말이라고 언급하며 우리의 두터운 상식에 질문을 던진다. 르네상스의 인간들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극동’에서 이를 정리하고 서술하면서도 ‘암흑시대’라는 말을 관성적으로 쓰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는 그 산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외양이 훨씬 소박한 문화에 대해서도 이제는 함부로 폄하하지 않도록 어휘와 표현을 다듬고 있다. 그런데 1천 년에 걸친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어째서암흑시대’라는 말을 그리도 쉬이 쓰는 것일까?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가치 판단은 쉬이 내려지지만, 판단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골치 아프기 때문일까? 르네상스 미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다른 시대, 나아가 다른 지역의 조형 활동을 판단한다면 남아날 게 별로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중세의 조형 활동을 폄훼할 때 기준으로 등장하는 것은 르네상스, 특히 콰트로첸토(Quattrocento, 서양 미술사의 15세기)와 친퀘첸토(Cinquecento, 서양 미술사의 16세기)의 조형 활동이다. 하지만 이들 시기는 두 세기 정도인 반면에 중세는 1천 년이나 되는 기간을 가리킨다. 중세는 『중세 3』이 시작되는 13세기를 전후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직후의 상황이라 혼란과 불모의 시기를 겪었지만, 후기 중세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게다가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를 가르는 경계는 뚜렷치 않고, 경계를 짓는 기준들은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조르조 바사리(1511-1574)가 『예술가 열전Le vite』의 맨 앞에 놓았던 화가인 본도네의 조토(약 1266-1337)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걸쳐 활동했다. 조토가 죽었을 무렵에야 알프스 북쪽에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조토는 중세의 화가인가, 르네상스의 화가인가?

 

중세 미술을 폄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세의 미술이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은 균형 잡힌 인체를 보여 주는데, 중세로 들어서면서 그런 기법을 죄다 잃어버린 것 같은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를 흔히 ‘그리스도교’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다. 실은 로마 제국 말기부터 서양 미술은 이미 동방의 영향을 받으면서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묘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로마 제국이라는 문화 중심지가 사라지면서 예술가 집단은 기법을 체계적으로 익히고 연마할 근거를 잃어버렸다. 제국의 몰락으로 자신의 취향을 고집할 만한 집단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교회, 바꿔 말해 그리스도교 세력이 들어앉았다.

중세 미술을 이야기할 때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을 빼놓을 수 없다. 서유럽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문화적 구심점을 잃었던 시기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힘은 서유럽에도 뻗어서는,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곳곳에 비잔티움 시대의 미술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의 남쪽 끄트머리, 시칠리아의 체팔루 성당은 동방과 북방, 서방의 정치적, 문화적 힘이 만난 흥미로운 결과물을 보여 준다. 성당 건축은 서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이성당을 짓게 한 이는 북방의 노르만인이며, 여기에 제단 모자이크는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만들었다. 비잔티움의 예술가들이 만든 ‘크리스트 판토크라토르(Christ Pantocrator)’, 즉 만물의 지배자로서의 그리스도 온화하고도 위압적인 모습으로,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린다.

    

 

* 체팔루 대성당 모자이크, 12세기 중반

 

서방에서는 이미지를 긍정하며 향유하는 경향이 우세했지만 동방에서는 이미지가 사람들을 잘못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8세기에서 9세기 초까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성상(聖像)파괴운동이 벌어졌다. 성경에 우상숭배를 금하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데, 신의 형상을 경배하다니 안 될 말이라는 논리다. 그 결과 비잔티움 제국 각지의 성상이 파괴되었고, 황제는 이에 반대하는 수도사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성상파괴운동이 겨냥하는 성상의 대부분은 이콘화였다.

 

이콘(Icon)이란 말은 그리스어 ‘에이콘(eikon)’에서 왔다. 미술사에서 이콘은 성스러운 이미지를 담은 벽화, 모자이크, 또는 판에 성모자와 예수 등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이콘화는 뚜껑을 달아 열거나 닫아 놓을 수 있었고, 작게 만들어 집안 구석에 모셔 두거나, 좀 더 크게 만들어 축제나 전쟁터에 가져가곤 했다. 이콘화는 비잔티움의 민중, 특히 여성들에게 소중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성상을 둘러싼 공방은 교리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자 이미지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관념의 충돌이었고 권력 투쟁이었다. 성상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성상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신도들이 받아들이는 데 유용하며, 성상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상에 깃든 신성(神性)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한 세기만에 성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편 서유럽은 10세기 무렵부터 어느 정도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이곳저곳에 생겨난 수도원을 구심점으로 문화의 발전 양상을 보다. 로마 제국 시대의 공회당(basilica, 가톨릭 성당)에서 유래하여 당당하고 웅장한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의 건축물이 등장했다.

‘로마네스크’라는 말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다. 애초에 중세 미술과 건축은 싸잡아서 ‘고딕’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5세기에 서로마 제국으로 침입했던 고트족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고딕 건축이 그 옛날 야만적인 고트족이 지었던 끔찍스러운 건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딕’은 기본적으로 중세의 미술과 문화를 경멸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징이라면 로마네스크 성당은 돌로 된 천장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과 벽을 두껍게 지었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 걸쳐 절정을 맞았던 로마네스크 예술에 이어 고딕 예술이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고딕’이라면 아마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쾰른 대성당의 높다란 탑을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고딕 성당은 로마네스크 성당보다 훨씬 높다.

중세의 건축가들은 성당 건물을 더 높이 올리기 위해 고심한 끝에,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옮겨 보내는 ‘늑재(rib)’를 생각해 냈다. 유럽의 대성당에 들어가 한복판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마치 사람의 갈빗대처럼 천장의 곡면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늑재다. 늑재가 천장의 무게를 이리저리 분산시키는 덕분에 고딕 성당은 로마네스크 성당처럼 벽이 두껍지 않아도, 다시 말해 넓은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만으로 천장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고딕 성당에는 천장의 무게를 건물 바깥쪽 벽으로 분산시키는 ‘버팀벽’까지 갖추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교묘한 장치들을 만들어 내면서 건축가들은 성당을 한껏 높게 지어 올렸다. 천장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지 않아도 되는 벽은 갈수록 얇아졌는데, 여기에 색유리, ‘스테인드글스’를 끼웠다. 스테인드글스는 성당을 빛으로 가득 채우면서, 성경 속의 인물과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오늘날에도 성당 안에 들어서면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는 스테인드글스를 만날 수 있다. 이 찬란한 빛 속에서 ‘암흑시대’를 떠올리는 것은 어쩐지 가당치 않게 느껴진다. 중세는 어느 시대보다도 빛에 매혹된 시대였다.

   

 

*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성모자〉, 13세기 초

 

중세의 성당 안팎에는 성경에 실린 이야기와 인물이 조각되었다. 성당 정문 위쪽에 마련된 ‘팀파눔(tympanum)’에는 종종 ‘최후의 심판’ 장면이 조각되었다. 성당의 조각 또한 중세 예술가들의 솜씨를 잘 보여 준다. 같은 고딕 성당이라도 시대가 뒤로 갈수록 조각상들은 유연하고 매끄러워진다. 중세 미술 어디까지나 신앙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기술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시대처럼 인간의 갖가지 복잡하고 다채로운 욕구를 드러낸다. 중세 후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감탄스러울 만큼 정교하고 세련된 작품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파리의 클뤼니 중세 박물관에 걸려 있는 〈여인과 일각수〉라는 태피스트리 연작은 귀부인에게 매혹되어 맥을 못 추는 일각수를 둘러싸고 갖가지 꽃과 식물, 작은 동물과 새들이 여백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서는 환상적인 공간을 이룬다. 이처럼 후기 고딕 양식의 회화와 조각은 꿈결 같은 세상을 보여 준다.

    

 

*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부르주아의 취향에 맞는 미술이 등장했다. 『중세 4』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할, 플랑드르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15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경-1441)가 이탈리아인 상인 아르놀피니와 그의 부인을 그린 그림(〈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그 의미를 둘러싸고 이견이 분분하지만, 부르주아의 재물과 지위를 과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부가 입은 옷의 모피, 목재로 된 가구, 구리 촛대, 앞쪽에 자리 잡은 개의 털 등 그림 전체가 질감과 광택의 향연이다. 그림 한복판, 안쪽 벽에 걸린 볼록한 거울에는 부부의 뒷모습이 비치고, 거울 위 벽에는 ‘1434년 반 에이크가 이 자리에 있었다’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다. 거울 속에서 부부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화가 자신인 것이다. 화가는 거울을 이용하여 짐짓 유희처럼, 짐짓 삼가듯이, 하지만 당당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각인시켰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그리고 이를 계승한 르네상스 미술을 취미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걸쳐 낭만주의가 득세하면서 중세를 숭앙하는 유행이 등장했다. 『중세 3』의 표현처럼 ‘중세에 대한 향수’로 지칭할 수 있는 이런 흐름 속에서, 중세의 양식을 되살린 건축물들이 유럽 곳곳에 여럿 지어졌다. 영국의 몇몇 예술가들은 라파엘로 이전(以前)의 미술을 지향한다며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前派)’라고 불렀다. 이들은 르네상스야말로 예술을 타락시켰고, 이상적인 예술은 르네상스 이전, 그러니까 중세 예술이라고 여겼다. 라파엘 전파는 중세의 로맨틱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그림 속에 담았다. 이들이 생각한 중세는 이랬다. 인간은 좀 더 자연과 가까웠으며 예술가는 개인적인 부와 명성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스스로의 재능을 바쳤다. 이들 무명의 건축가와 장인이 비상한 재능과 의지로 대성당들을 쌓아올렸다…….

 

물론 중세의 실제 모습은 이들이 떠올린 것과는 크게 달랐다.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는 폭력과 약탈로 가득한 역사에 대한 치장일 뿐이었고, 중세의 예술가들은 스스로 작품의 주제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 전파를 비롯한 중세 숭배 열풍을 돌아보면서 이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암흑시대’였던 중세가 어떤 이들에게는 꿈과 이상의 시대였다. 남아 있는 과거의 유물을 놓고도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찬란한 유산이라고는 해도, 그 시대를 채웠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나마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아 있는 것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이연식

미술사가. 미술과 관련된 저술, 번역, 강의를 한다.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눈속임 그림』, 『아트 파탈』,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 『괴물이 된 그림』 등을 썼고, 『무서운 그림』 시리즈, 『다케시의 낙서 입문』,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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