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3 : 1200~1400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컬렉션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정하 옮김, 차용구.박승찬 감수 / 시공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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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 시리즈(총 4권)는 묵직한 볼륨감과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이벤트를 통한 서평이나 리뷰를 받기가 까다로워, 보다 전문적으로 리뷰해 주실 수 있는 분들에게 리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중세 3의 경우 역사 / 철학 / 시각예술 파트와 관련하여 각계의 전문가 세 분에게 리뷰를 부탁 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중세 철학 전공자이자 중세 시리즈의 철학 리뷰를 계속 맡아 주신 오캄연구소 유대칠 선생님의 리뷰를 공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책 선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3세기는 미래를 위해 거부당한 거장의 시대였다!

- 철학을 통해 바라본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3

    

 

유대칠(오캄연구소장)

 

 

분명한 변화다. 그것도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두고 일어난 거대하고 분명한 변화다. 그리고 일종의 분기점이다. 여러 갈래들이 모이고 다투고 흩어졌다 또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거치며 더 크고 다양한 갈래의 시작이 되었다. 13세기의 일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철학사에서 다루어진 단 몇 명이 만든 변화가 아니라 훨씬 다수의 거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기점을 만들어 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에서도, 근동의 이슬람교와 유대교에서도, 유라시아의 또 다른 끝인 동아시아에서도 분기점이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분기점을 만든 거장들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것을 더욱 분명히 했다. 분기점은 고요히 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강물을 여러 지류로 나뉘게 했다. 거장들은 그 중심에서 온몸으로 물의 흐름을 나누었다. 쉽지 않았다. 고유한 물은 자신을 나누는 거장의 앞에서 급류가 되어 때렸다. 때로는 너무나 심한 외상에 온전히 서기도 힘들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이것이 13세기 거장들의 운명이었다.

 

중세 3에 등장하는 13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1-1274, 국내에서는 약 1225-1274년으로 통용됨) 역시 처음부터 많은 이의 환호를 받은 것이 아니다. 조용한 수도원이나 고요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 간 것이 아니다. 그 역시 흐르는 강물을 거슬렀기에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현재 우리들의 생각과 달리 그의 사상도 1277년의 단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변화를 거부하던 보수주의자들은 아퀴나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신을 그냥(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에게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아퀴나스와 논쟁하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인 스웨덴의 보에티우스(13세기)와 시제루스(1235-1282)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논쟁을 주고받던 사이였지만 변화 자체를 거부하던 이들의 눈에는 그저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뿐인가? 최근 들어 각광받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에크하르트(1260-1328) 역시 그의 시대에는 인정은커녕 금지 대상이었다. 그 유명한 단테(1265-1321) 역시 다르지 않았다. 1329년에 그가 펴낸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담은 제정론은 추기경 베르트랑의 손에 불태워졌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구분을 이야기했던 오컴의 윌리엄(1280-1349)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13세기(14세기 초까지)를 대표하는 거인들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철학이 미래를 위한 씨앗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준비했지만 막상 자신의 시대엔 거부당한 거인들이었다. 13세기는 그러한 시대다. 그것이 중세 3의 철학 세계다.

 

13세기는 유럽만으로 그릴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유라시아의 사상사도 읽어야 그 큰 풍경을 대강이라도 그릴 수 있다. 더 이상 외부와 고립된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유럽은 몽골의 침략으로 유럽 밖을 알게 되었다. 그곳엔 자신들을 공포에 떨게 한 막강한 몽골 제국이 있었다. 이제 유럽인에게 동아시아는 전설이나 설화 속 존재가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고, 그 지각은 세계상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1254-1324)가 황하 강을 찾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화약이 유럽에 전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이미 소총과 대포를 만들었고, 심지어 연속 발사가 가능한 대포도 개발된 상태였다. 유럽에 전해진 화약은 1380년에 제노바-베네치아 전쟁에서 사용되었고, 1403년 피렌체-피사 전쟁에서는 지뢰도 사용되었다. 유럽에 화약 무기가 발달하면서 인류 역사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유럽은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의학적 성과를 유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여러 대학의 의학부에서는 아비케나(980-1037)와 같은 이슬람 학자들의 의학적 성과를 다룬 저술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졌다. 그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이렇게 유럽은 화약에서 의학에 이르기까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체계화시켰다. 이것도 13세기의 단면이며 심연(深淵)에는 철학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성과가 아랍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중세 이슬람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철학을 위한 소재를 마련하게 되었다. 단순 번역이 아닌 자기 철학의 초석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킨디(?-873)1철학에서 이미 단순 번역 혹은 모방 수준을 넘어선 독창적인 이슬람 철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알-파라비(870-950)를 지나 아비케나와 아베로에스(1126-1198)까지, 더 이상 번역에 근거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모방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는 유대교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마이모니데스(1138-1204)와 사디아 벤 요세프(882-942)가 있다. 다만 중세 이슬람교와 유대교 철학자들은 그냥(무조건) 믿지 않고 이해하고자 했다.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려고 치열하게 노력을 전개했다. 자신의 신앙마저도. 예를 들어 유대교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는 성서를 자신의 철학을 통하여 읽으려 했는데, 종교가 다른 고대 철학자 알렉산드로스와 이슬람 철학자 아비케나, 그리고 알-파라비 등의 도움 속에서 성서를 읽어 갔다. 지금도 읽혀지는 대작인 마이모니데스의 혼란된 이들을 위한 길잡이는 이 과정에서 나왔다. 사디아 벤 요세프도 마찬가지로 신앙과 이성이 모순 없이 조화된다고 믿었다.

불만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슬람의 알-가잘리(1058-1111)의 눈에는 철학자들의 합리화가 무리(無理)한 것으로 보였다. 신의 섭리와 창조, 그리고 죽은 육신의 부활과 같은 신앙의 신비들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지워져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철학자들의 모순을 저술했다. 이에 다시 아베로에스가 철학자들의 모순의 모순을 집필하여 알-가잘리를 비판했다. 둘의 마찰은 이들의 저술이 번역되어 전해진 유럽 대학에서 다시 한 번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 또한 13세기 유럽 대학의 모습이다.

많은 아랍어와 히브리어로 된 철학적 성과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1265-1308), 오컴의 윌리엄과 에크하르트의 철학을 이야기를 할 때 이슬람교와 유대교 철학 선배들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아퀴나스의 사상 곳곳에 아비케나, 아베로에스, 마이모니데스와 이븐 가비롤(1020-1058)이 있다. 스코투스의 존재론을 다루면서 아비케나를 빠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유럽 대학을 구성했던 거장들은 하나같이 이슬람교와 유대교 선배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금 시대의 화두가 등장한다. ‘신앙 앞에서 이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13세기 유럽은 장원제 농업 사회가 아니라 상공업에 기반을 둔 도시 중심의 사회였다. 상업이 번창한 도시가 곧 유럽의 중심이었다. 상업 사회는 의 가치가 부각되는 사회다. 따라서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탁발 수도회가 이 시기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돈은 시대의 화두였다. 학자들도 돈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와 교육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이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안이 상공업자 조합이었다. 학자와 학생은 조합을 만들어 새 시대에 맞는 학문을 이어 갔다. 고요한 수도원이 아닌 치열하게 싸우고 다투며 발전하는 도시, 그렇게 도시 내부에 세워진 대학이 학자들의 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토론 중심의 수업과 대전(summa)’이란 형태의 창의적인 문헌 방식이 등장했다. 하지만 대학의 첫 안착(安着)은 쉽지 않았다.

13세기 유럽의 대학들은 때마침 유입된 이슬람교와 유대교 철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철학은 당시 신학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과도한 이성의 월권으로 봤기 때문이다. 당장 1270년에 도미니쿠스회의 에지디우스 로마누스(1247-1316)가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두고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0-1280)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13세기 동안 신학부와 신학자, 그리고 종교인들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연구가 수차례 금지되었다. 자신들이 믿는 천지 창조와 구원에 대한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위험한 딴지로 보였던 것이다. 마치 과격한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위험한 것으로 여겼듯이 말이다. 그들은 대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이슬람 철학을 금지시켰다. 물론 학문들의 아버지와 같은 개혁적인 문헌을 통하여 대학의 자율권을 인정하려는 흐름도 있었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새롭고 강력한 흐름 앞에서 매우 강한 방어적 태도를 보였다.

 

지금은 당연한, 신앙으로부터의 철학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위험한 시대였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단이 되었다. 순수한 이성 혹은 철학의 눈이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우주의 창조가 아닌 영원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주장과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인간 이상의 월권을 행사한다고 의심받으면서 그의 철학은 결과적으로 의심스러운 철학이 되었다. 1282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오류 교정이라는 선언문이 등장했다. 1323년에 성인에 선포되기 전까지 그의 철학은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에크하르트의 사상 역시 금지되었다. 인간 가운데 신성함을 이야기하던 그는 종교 재판을 받고 이단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신성함이 있다는 신심 어린 이야기도 위험했다. 변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단테도 교황만 신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는 것을 거부하며 교황과 황제 모두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과거에 비해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교회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큰 반감을 샀다. 오컴은 교황 교서 거룩한 하나의 교회의 국가 권력이 교황의 권력에 예속된다는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종교 권력, 즉 교황의 권력은 지배 권력이 아닌 봉사 권력이어야 했다. 무엇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종교 권력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 권력의 몫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들을 논박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상식이 아직 상식이 아니던 시대가 13세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상식이 되기 위해 거장들이 온 삶을 다해 소리치기 시작한 것도 13세기다. 우리에게는 현재이자 그들에게는 미래인 오늘날을 준비한 거장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시대에는 거부당한 거장들의 시대가 13세기다.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볼로냐 대학은 아비케나의 의학적 성과를 라틴어로 번역연구하고, 관념이 아닌 직접적인 해부를 통하여 보다 깊이 인간 이성과 경험에 중시하는 의학을 만들어 갔다. 의학부임에도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연구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학자는 치열하고 합리적이어야 했다. 이런 이들에게 점성술에 의하여 인간의 건강과 삶이 결정된다는 논의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13세기에는 의학에서도 지금의 상식이 서서히 상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

 

13세기는 아퀴나스, 보에티우스, 시제루스, 에크하르트, 오컴, 단테와 같은 거장들이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산 시대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위해 그들이 치열하게 궁리하던 시대다. 자신의 시대에는 거부당했지만 미래를 열어 주었던 거장들의 시대다.

중세 3이 역사, 철학, 과학과 기술, 문학과 연극, 시각예술, 음악으로 나누어 중세의 경제와 사회, 문화 등을 고루 살피고 있는 시대가 13세기다. 미래를 준비한 그러나 거부당한 거장들의 시대.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어쩌면 13세기의 고민은 아직 미완일지도 모른다. ‘대학의 학문 자유신앙과 이성의 관계’, 그리고 국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 시대의 거장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지, 설사 현재에는 거부당한다고 해도 말이다.

 

글쓴이 유대칠

중세 철학을 공부했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운영하며 소유를 위한 철학보다는 공유를 위한 철학을 모색하는 가운데 다양한 강연과 번역, 그리고 글쓰기를 진행하고 있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ockhamtex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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