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목차를 보는 순간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떠올렸다.

두 책은 몇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첫째, 세계사를 사건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춰 에피소드로 엮어 냈다. 시간순서로 한 지역 또는 국가를 대상으로 쓴 역사서와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가의 문학적 소양이 많이 들어 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문학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듯이 그리스와 서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풀어내고 있다. 반면에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에 대하여 기록할 때 직접 전쟁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되도록 사실에 입각하여 건조하게 기술하고 있다. 두 책은 역사서의 두 갈래에서 헤로도토스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해야 할 듯하다. 화려한 글 솜씨로 세상이 바뀌게 된 역사의 이면을 파헤쳐 독자를 긴장시키면서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베를린과 빈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 작가다. 시와 단편 소설을 발표하면서 유명해졌고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깊은 성찰로 「조제프 푸세-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마리 앙투와네트」, 「메리 스튜어트」,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와 같은 전기를 쓰기도 했다. 나치의 탄압으로 영국과 미국을 전전하다 브라질로 망명한 후 부인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881년에 태어나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하기까지 그가 살았던 유럽은 ‘광기의 시대’라 할만 했다. 19세기말부터 느껴지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힙쓸었고 그 끝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나타난 미국의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에 대한 츠바이크의 글은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소제목이 <윌슨의 좌절>이다. 츠바이크의 좌절이기도 했을 것이다.

비군사적이고 영구적인 미래의 평화를 이루어야한

제대로 된 평화를 쟁취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360쪽)

윌슨의 이상이었다. 현실의 적들은 전쟁에 패배한 독일이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 영토를 내놓고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평화보다 지금의 안락과 평안을 구하고 싶어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은 여러 방면에서 윌슨을 압박했고 미국의 정치인들고 그를 공격할 뿐 아니라 그의 참모들도 현실을 직시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고립되었다.

멀리서 수백만이 넘는 목소리가 그에게 버티라고, 뜻을 굽히지 말라고 간청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이 목소리들을 듣지 못한다. (중략)

그가 욕망과 증오와 무지로 똘똘 뭉친 권력에게 ‘안된다’라고 통고한다면,

이 말에서 얼마나 창조적 힘이 솟구칠지 예감하지 못한다.

자신이 혼자이며 최후의 책임을 떠맡기에는 약한 존재라는 사실만을 느낄 뿐이다.(363쪽)

윌슨의 타협은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오게 된다. 동시대를 살았던 츠바이크로서는 안타까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나치의 등장으로 자신의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을 때는 더더욱 아쉬웠을 것이다.

이 책은 14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다. 1927년 초판 때는 「세계사를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 「괴테의 마지막 사랑」,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저주」, 「죽음을 경험한 예술가」, 「남극 정복을 둘러싼 경쟁」의 5편이 수록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출판되는 국가나 장소에 따라. 에피소드들이 보내지거나 누락되기도 하다가 1964년 독일, 피셔출판사가 14편이 모두 실린 「광기와 우연의 역사」가 나오게 된다.

이 에피소드들은 직·간접적으로 작가와 연결된 느낌이다. 특히 키케로, 괴테,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작가들의 운명, 사랑, 삶은 츠바이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을 것이다. 에피소드의 맨 처음에 놓인 키케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색하는 인간은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리기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행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역사에서 이런 비극은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사색을 즐기는 창조적인간은 항상 다음과 같은 내부의 분열을 겪곤한다.

사색하는 인간은 시대의 어리석음을 다른 사람보다 잘 통찰하기에 그것을 시정하려 든다.

그 과거에 푹 빠져 있는 동안은 열정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 싸우지만,

곧 그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를 주저한다.

책임감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고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기를 꺼린다.(20쪽)

행동적이지 못한 지식인의 한계를 이야기 한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이기에 키케로의 삶은 자신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역사서로 읽어야 할지 문학작품으로 읽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사실을 서술한 책이라기엔 너무 빼어난 문장들이 많다.

사색하는 인간에게는 공적인 삶,

즉 정치적 삶을 멀리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상가와 예술가는

야만과 교활함이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영역을 떠나

남들이 건드릴 수도 , 파괴할 수도 없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11쪽)

노련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키케로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술한 부분이었다. 이 책이 단순한 역사서가 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을 아직 접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부터 시작해도 좋을 듯하다. 거침없는 그의 문장을 읽는 재미도 있고, 새로운 사실이나 내용을 알아가는 만족감도 준다. 불운한 시대의 지성이 겪었을 고뇌와 갈등을 엿보는 기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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