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나침반 1 - 숭산 큰스님의 웃음과 삶과 가르침
허문명 지음 / 열림원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중간에 화엄사에 들러 천불상을 보게 되었는데 수많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광경은 불교 신자가 아닌 나에게도 가슴이 울컥하게 했다. 그 장엄한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 불상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 조각했을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행 중이라 무엇이든 경험해보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절을 하고 가기로 하고 불상 앞에 섰다. 하지만, 어떻게 절을 해야 하는지 절은 몇 번 하면 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절을 하고 계신 아주머니가 있어서 여쭈어보았다.

 아주머니의 말씀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하면 돼요. 부모님께 큰절하듯이 해도 되고, 마음을 다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하면 되요”였다. 뭔가 법식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는 천불상보다도 더 감동적인 말이었다.

 나중에 불교에 대한 책을 읽고 난 후에야 천불상이 ‘천불화현’, 즉 부처님이 천 개의 부처님으로 나타내 보이며 이적을 행한 일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불상에 왜 절을 하는 것인지, 그것은 어렸을 때 잠깐 교회에 다녔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우상숭배’가 아닌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숭산 스님의 명쾌한 답이 실려 있었다. 스님은 왜 불상에 절을 하냐는 미국인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주셨다.

 “절은 ‘누구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한다고 생각하니, 자꾸 왜 하느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절은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나’가 ‘큰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을 하다 보면, 작은 나가 없어지고 큰 나가 됩니다. 이게 진짜 절입니다.”

 절을 하는 것에 나를 내려놓고 우리 속에 깃든 부처, 즉 대아(大我)을 찾으려는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왜 미처 몰랐을까....

 언젠가 읽은 지율 스님의 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눈을 감으니 법계가 온통 생명의 바다였고,

눈을 뜨니 이 땅의 아픔은 온전히 우리의 아픔이었습니다....“

 살 곳을 잃은 작은 생명들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긴 지율 스님의 목숨을 건 싸움은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라는 숭산 스님의 마지막 말씀 즉,  실상의 세계에서 얻은 깨달음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물음과 다름 아니었다.

 “진정한 자유, 참 자유는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나의 행동과 생각이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바로 진정한 깨달음이며 그 경지가 바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자각이다.”

 숭산 스님의 이 말씀은 불교를 멀게만 여겨왔던 내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참된 나를 찾는 것, 그리하여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공감의 능력을 갖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이고, 우리가 불법에 귀의하는 목적이 아닌가 하는, 어쩌면 불교란 우리가 상상하는 ‘꼬뮨주의’와도 같은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알고 싶다면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좋겠지만(사실 불교는 학문도 아니고,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생각이지만..) 이 책은 진정 불법에 귀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부터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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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5-2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숭산스님으로부터 귀한 인연을 얻게 되어서 저도 기쁩니다.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어떻게 하는가?
그 때에는 진리를 바르게 수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은 마시고, 걸음은 걷고...
하지만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오직 모를 뿐'이라던 숭산스님의 말씀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