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1 펭귄클래식 74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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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란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 주제를 드러내는 정제된 언어로서 작가의 의도와 고민의 집약체이다. 만일 인물이 제목에 드러난다면 그 인물이야말로 독자가 가장 주목해야하고 그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책의 뿌리이자 줄기, 그리고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제인 에어"라는 인물의 생각을 읽고 그녀가 펼쳐낼 삶에서 독자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대조하기도 하며, 반성하거나 확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인은 독자가 오롯이 소설에 몰입하고 때로는 감동하게끔 만들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19세기 영국, 제인 에어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숙모의 집에 얹혀 살며 외숙모와 외사촌들에게 모진 수모를 겪는다. 하녀보다도 존중받지 못하며 억눌려 살던 제인은 못된 행실(제인은 집에서 항상 못된 아이 취급을 받았다)을 고쳐야 한다는 명목과, 집에서 완전히 쫓아내려 하는 외숙모의 의도로 로우드 자선 학교에 입학한다. 금욕적이고 억압적인 교칙에 따라 학창시절을 보낸 후 손필드 장의 가정교사로 새 삶을 시작한 제인은 저택의 주인인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랑은 또다른 시련들을 불러온다.


평화에 안착하지 못하도록 제인의 삶을 혼돈으로 밀어넣는 사건들의 양상이 그리 독특하거나 신선하지는 않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주인을 사랑하고, 우연히 운명의 상대들과 조우하는 사건들은 우리가 그간 많이 보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몰입하게 하는 까닭은  제인 에어라는 인물의 강인함과 신중함,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용기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차라리 불확실할지언정 전력을 다해 발버둥치며 분투하는 폭풍우 속에 내던져진 삶을 살았더라면, 그리고 거칠고 험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지금 내가 그 한가운데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평온한 삶을 갈망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더라면,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는가!"  ㅡ 1권 234p


제인은 그녀 안에서 꿈틀대며 터져나오려는 것들, 자극과 변화를 갈망하는 열정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과감함을 지녔다. 제인의 선택에 따라 마치 한 연극이 끝나고 다른 연극이 시작하듯 새롭게 펼쳐지는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이다. 확신을 갖고 행동하기까지 치열하게 일어나는 그녀의 내적 갈등을 지켜보다보면 어느새 독자도 제인이 되어 같이 고민하고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제인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남성들, 로체스터와 신 존은 마치 드라마 남주와 서브 남주 사이에서 호불호를 가르는 것마냥 둘을 비교하며 응원하는 즐거움을 준다. 특히 여성독자라면 두 남자의 실제 모습을 상상하거나 세 주인공들의 드라마를 독자의 취향대로 꾸며보는 등 마치 연애소설을 읽을 때의 흥분이나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직자인 신 존이 지닌 종교관과 신념, 로체스터의 기구한 삶과 필연적인 비애는 인간의 삶과 죽음, 종교과 우주에 대한 포괄적인 고민과 시대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단순히 멜로드라마 속 상대역 이상의 무게를 지닌 인물들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두 남자의 유일무이한 개성은 제인의 삶과 겹쳐져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인물의 마음이나 자연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문장들을 음미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온 만물의 존재에 감동하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그녀의 시선은 수려하면서도 정제된 시들의 축제를 펼친다.


"나는 그의 고백이 중단됐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새들과 나뭇잎들도 잠시 노래와 속삭임을 자제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ㅡ 1권 406p

"땅거미가 찾아와 별이 촘촘히 박힌 자신의 푸른색 깃발을 격자창에 드리우는 낭만적인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일어나서 피아노 덮개를 열고 그에게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간청했다." ㅡ 93p

"한 가운데가 갈라진 나무줄기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둘로 갈라진 각각의 반쪽 동강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단단한 나무 밑둥치와 튼튼한 뿌리가 아래쪽에서 두동강을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해 주고 있었다. (중략) 「이제 너희들에게 기쁨과 사랑의 시간은 끝났어. 하지만 너희들은 외롭진 않구나. 비록 각자 썩어갈망정 옆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동무가 있는 것 아니니.」쪼개진 나무 동강들을 올려다보니 일순간 그 가운데 틈새를 메우고 있던 밤하늘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ㅡ 2권 103p


19세기에 영국에서 태어난 샬롯 브론테는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언니이다. 두 자매는 비슷한 시기에 글을 쓰고 함께 책을 낸 적도 있지만 독특한 개성을 뽐내며 각각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썼다. 샬롯은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얼마간 교사생활을 했으며 가정교사로 일한 적도 있다. <제인 에어>는 진정 샬롯 브론테의 삶을 모태로 창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녀가 추구한 삶이 오롯이 드러난 수작이라 말할 수 있다. 작품 속 남성들이 여성을 남성에 예속된 존재로 보는 장면, 제인이 로체스터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철저하게 순응적인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장면 등은 그 당시의 시대상과 여성의 지위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종 "프랑스적"인 것을 비판하며 "영국적"인 것이 더 고상하고 훌륭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우리는 프랑스인이 아니기에) 그당시 영국인들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제인 에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그와 동시에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 이성적이고 분별있는 판단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제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재미를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정으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금의 삶이 답답하고 억눌려있다고 느낀다면, 불만족스러운 무언가로 인해 지쳐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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