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노을 맥주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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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다. 붉은 노을 맥주는 작가 본인이 20대 초반 일본 전국을 방랑하며 겪은 일들을 엮은 에세이형 소설이다.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소설못지않게 등장인물 각각의 개성과 에피소드, 문체가 재기발랄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1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있어 호흡이 짧고, 가벼운 내용이라 자투리 시간에 부담 없이 읽어도 좋을 듯하다.

 

 이작품에 플러스 점수를 주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뚜렷한 갈등이나 선악 대립 없이도 시종일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 당장 떠나고 싶을 정도로 독자들의 방랑욕을 일깨워주는 것도 매력 포인트 중 하나. 마치 지금 여행을 떠난다면 책에 나온 다양한 에피소드와 같은 일을 나도 겪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책의 주된 소재인 맥주는 작품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작가의 맥주 사랑이 종이 너머 독자에게까지 전달되는 듯 했다. 저자의 맥주 사랑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이야기는 <우리의 셰어하우스>와 <요시로씨의 저주>로, '나'가 마시는 맥주를 탐내 자신의 오래된 물건과 교환하자고 꼬시는 아저씨의 모습, 그리고 자동차 운전을 해야해서 맥주를 마시지 못하는 미야지마를 놀리는 '나'와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면,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일지라도 맥주가 땡기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무한 긍정의 분위기도 매력 포인트. 주인공 '나'와 친구들은 어떤 상황이 와도 우울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요시로씨의 저주>에서 우연히 만난 해녀 할머니는 곰팡이 빵을 먹은 '나'에게 이전에 요시로씨가 곰팡이를 먹고 죽었다고 말한 후 사라지지만, 이에 대해 '나'와 친구들은 조금 걱정하긴 하지만 일반적인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진 않는다. 할머니가 주고 간 문어 안주에 위스키로 살균하면 괜찮겠지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불상 아저씨의 라면은 세계 제일>도 마찬가지. '나'와 미야지마는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있을 만한 밥집을 찾고, 우연히 발견한 라멘집에 들어간다. 불상을 닮은 아저씨는 손님을 보고 당황하고, 음식의 가격을 즉석에서 정하는 등 일반적인 가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한시간 반이나 기다려서 먹은 라멘은 맛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짜증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은 '라면에 들어있던 햄의 우월한 맛을 확인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라며 스스로를 긍정한다.

 

 또한, 저자는 자칫 어둡게 흘러갈 수 있는 소재도 밝게 그리는 재주를 지녔다. <어린 유령과의 노숙>은 으스스한 캠핑장에서 겪게 된 이야기다. 가게 주인은 마귀할멈같고, 캠핑장 식수대에선 말벌시체가 나온다. 기묘한 분위기에 심지어 귀신 꿈까지 꾼다. 내용 자체만 들으면 충분히 무섭게 그릴 수 있을 법한데, 이러한 것을 전혀 무섭지 않게, 오히려 역설적으로 유쾌하게 그린 것은 작가의 역량인 듯 하다.

 

 맥주못지않게 작가의 낚시 사랑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특히 '초심자의 행운'이란 소재가 작품 여러 편에 걸쳐 등장하는데, <잘낚는 남자, 못낚는 남자>, <초심자의 행운이 낳은 악몽>을 들을 수 있다. 전자낚시 초보이자 천재인 K와 낚시전문가지만, 정작 물고기는 하나도 못낚는 사토형의 이야기로, 주인공 '나'는 어떻게든 사토 형이 물고기를 낚게 해주려고, 일부러 잘 잡히는 데로 데려도 가고, 기구도 빌려주지만 매번 허탕만 치는 것을 익살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후자는 주인공 '나'가 초심자에게 당하는 내용이다. 낚시를 할 수나 있을까 싶은 낚시도구를 들고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달리 이들은 계속 무지개송어를 낚고, 반대로 전문적인 낚시 도구를 준비한 '나'는 매번 허탕친다. 심지어 초심자에게 동정을 당하기까지 하지만, 주인공 '나'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들은 초심자의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위로할 뿐이다.

 

 책을 읽다보면 맥주가 땡기는 것은 물론 지금이라도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지 모른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다보면 저자처럼 풍요롭고도 유쾌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 책. 책의 내용과 필력, 저자의 이력 사항 등 다양한 부분에서 욕심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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