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오랜만에 책 한 권을 완독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이 차분해야 가능하구나, 싶었다. 요즘 하는 거 없이 마음만 방향 없이 달리고 있었는데, 아주 좋은 진정제가 되어주었다.
2.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야고의 지혜와 오셀로의 단순함이었다.
악하고 교활한 이야고. 그러나 무릎을 ‘탁‘ 칠만한, 오래 기억하고 싶은 대사는 이야고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용감하고 인정받는 멋있는 장군 오셀로. 그러나 그의 ‘수수하고 탁 트인 성품‘과 ‘겉으로만 정직해도 진짜 그렇다고 생각‘하는 면은 이야고가 그를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휘두르기 딱 좋은 모습일 뿐이었다.
오셀로의 데스티모나에 대한 믿음과 이야고에 대한 믿음의 크기와 수준이 같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를 진실로 사랑하는 데스데모나와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른 이야고를 똑같이 믿고 좋아하는 오셀로의 모습은 꼭 분별없는 나의 모습인 것만 같아서 괜히 부끄러웠다. 똑같지 않은데 그는 똑같이 여겼다. 양과 뱀을 똑같이 대했다.
3.
데스데모나는 오셀로가 겪은 위험 때문에 그를 사랑한 것이고, 오셀로는 데스데모나가 자신을 동정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오셀로는 말한다. (데스데모나의 오셀로와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극 중에 나오지 않으나, 그녀는 오셀로의 ‘무엇‘ 때문이 아닌 무조건적 믿음과 사랑을 보인다.)
‘무엇‘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낭만적이면서도 위험하다는 경고를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듣곤 한다. 예전에 ˝네가 사랑에 빠진 상대방의 ‘어떤 점‘ 때문에 네 발등을 찍게 될 것이다.˝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그럼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선택할 수가 있나? 아직 나는 이성의 무엇을, 왜,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내게 잘해주면 좋아했을 뿐이었다.
계속 생각하다 보니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소수이며, 대다수의 사람은 사랑 이후에 깨닫게 되어 곧 사랑에 빠질 어린 젊은이들에게 알려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4.
오셀로는 왜 이야고의 말에 흔들렸을까. 그는 ˝내가 왜 결혼했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녀가 그럴만한 사람이기에? 이야고의 말이 너무도 그럴듯하니까? 왜 우리는 믿음이 흔들릴까. 그리고 그는 왜 사실을 먼저 확인하지 않았을까...
이미 의심과 질투에 휩싸여버리면 사실확인이라는 것이 무의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33쪽을 보니, 의심이란 원인제공과 무관한 제 마음의 문제였다.
사랑하는 사이는 믿음이 있어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믿음직하지 않은 걸 억지로 믿으려 노력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상대를 믿는다는 것이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감정적으로 사랑했을 뿐, 그녀를 겪어보지 못했던 게 아닐까.
오셀로가 주변 인물들에게 베푸는 칭찬과 신뢰와 사랑은 표면적이다. 그랬기에 이야고의 거짓된 이야기에 데스데모나에 대한 믿음이 와장창 부서진 거겠지. 이야고가 진짜 어떤 자인지, 데스데모나가 진짜 어떤 여인인지 알지 못했고, 알기 위해 별 노력을 하지 않았다. 사실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듯한 증거 없는 험담에 믿음이 흔들린다면 상대가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거나, 상대를 잘 모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결국 제 마음의 문제.
5.
유순한 데스데모나는 오셀로가 오해하여 그녀를 심하게 대할 때도 ˝내가 이런 취급 받는 건 당연해, 지당하지.˝라고 말한다. 이 극에서 머리를 쓰는 건 이야고 뿐이다.
무조건 자기 탓으로 돌리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인을 찾고, 믿을 사람을 믿어야 한다.
6.
읽는 내내 그저 나는 이야고에게 놀랄 뿐이었다. 이런 게 뱀처럼 지혜롭다는 건가 싶었다. 이야고와 같은 자들이 악한 마음과 더 많이 빼앗기 위해 갖은 꾀를 내듯이, 그리스도인 또한 선을 위해 그정도로 지혜로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
극 중에서 상대를 관찰하는 것도 이야고 뿐이다.
다른 인물들은 자신이 가진 믿음의 크기대로 상대방을 믿고, 생각한다. 마음에 휘몰아치는 감정대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확신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보지 않고 제 믿음대로, 감정대로 생각한다.
오셀로가 어리석다 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크고 작은 일에서 이런 실수를 범한다.
제 그릇의 크기가 아닌 상대방의 모습 그대로가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8.
하나님을 믿는 것 또한.
9.
그들을 비극으로 몰고 간 것은 오셀로일까, 이야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