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솔한 여행자
르네 바르자벨 지음, 박나리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에는 소설속 시간여행의 원리가 설명되고 2052년의 미래로 여행을 가는데, 작가의 전작과 세계관이 공유되는 모양이다. 2부에서는 좀 더 본격적인 시간여행을 시작하는데 10만년대로 여행을 한다. 3부에서는 과거로의 여행을 하고 주인공이 사고치고 다니면서 결국엔 대가를 치루게된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아무래도 사고치고 다니다 타임패러독스가 발생하는 3부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2부이다. 2부에서 묘사된 10만년 후의 세계는 굉장히 기괴하다. 그 시대의 인류는 단일한 형태의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각각의 감각기관 역할을 하는 인간들이 따로 존재해서 오로지 그 임무만을 수행한다. 심지어 먹는 역할을 하는 존재들도 우유를 먹는 무리, 고기를 먹는 무리, 과일을 먹는 무리가 따로 있다. 게다가 생식 기능을 하는 존재들도 따로 있는데 이또한 특이하다.

 

"여기에는 여성의 상반신이, 저기에는 얼굴이, 살집 없는 허리와 살찐 엉덩이, 납작한 배, 둥글고 부드러운 한쪽 가슴, 뾰족한 한쪽 가슴, 금빛 머리칼, 보조개, 주름진 배, 둔부위의 점, 손 하나, 푸른 눈 하나, 곧은 코, 매부리 코, 발목, 음영을 넣은 입술, 한쪽 귀가 있다.

 나는 바라보고 또다시 바라본다. 뚱뚱하거나 말랐으며, 추하거나 아름답고, 금발 혹은 흑발인, 젊거나 나이 든 여체들의 수천가지 파편이 보인다. 모든 여자들. 온 여성. 난쟁이들은 이 수 많은 표변 주변을 돌다가, 자기 이상형 앞에 도달하면 서둘러 이미지를 통과해서 어두운 문 속으로 사라진다. 이미지는 계속해서 요동치며 자신을 바라는 이들 앞에 나타난다. -중략-

 

 그 순간 강렬한 감정에 가슴이 죄어든다. 새하얀 어깨는 사라졌다. 그 대신 검은 두 눈, 내가 익히 아는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눈, 여기서 그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의 전부인 어느 여인의 눈이, 그 눈이 나를 바라보고, 나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환히 빛난다. 내게 자신의 사랑을 속삭인다. 내가 사랑하는 눈이 나를 부른다. 그 목소리가 들린다. 난쟁이 무리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헐떡이더니 신음한다. 파도 소리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리 와요 사랑해요. 난 당신거예요.' 난쟁이들이 고통스러워하더니 신음하며땀을 흘린다. 난쟁이 무리의 냄새 속에서 나는 나를 기다리는 여인의 밤 향기를 맡는다. 내 몸 위로 그녀의 열기가 느껴진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를 흥분케 한다. 나는 두팔을 위로 들어올린다. 근육이 팽창하면서 뼈에서 뚜둑 소리가 난다. 혈관이 요란하게 울려된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달려가며, 환희의 비명을 지른다. 사랑하는 그녀를 품에 안을 것이다.

 나는 산의 벽에 세차게 부딪힌다. 그 충격에 정신을 차린다. 복면 안쪽에서 코피가 난다. 문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다. 십년감수할 일이다. -중략-

 

 이 문을 넘어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하다. 나는 수수께끼를 향해 돌진한다. 백 걸음 정도 걸어 두꺼운 벽을 통과한 후, 거대한 돔형 지붕 아래로 나온다. 파란 버섯들이 지붕을 여름 하늘처럼 새파랗게 비추고 있다.

 거대한 덩어리가 벽면에 닿을 듯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살아 있는 덩어리, 터무니없이 거대한 반구 형태의 이 괴수는 수십만 톤은 족히 나갈 득하며 조개껍질 속의 조갯살처럼 이 산속에서 틀어박혀 있다. 그 분홍빛 살갗은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우며, 어린아이의 뺨이나 처녀의 순결한 배처럼 반들거린다.

 괴수는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마다 그 앞에 짧은 돌기를 늘어뜨리는데, 돌기 끝에는 부드러운 입이 달려 있다. 난쟁이 하나가 달려서 도착하면, 입이 열리며 난쟁이를 집어삼킨 뒤 축축한 소리를 내며 다시 닫힌다. 돌기가 다시 흡수되면, 살덩이는 기쁨에 전율하며 먹이를 삼키고, 입은 어두운 입구 앞에서 원래 위치를 되찾는다.

 나는 괴수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여기저기서 똑같은 광경을 발견했다. 괴수는 입을 통해, 신기루에 홀린 난쟁이들을 1분에 수백 명씩 삼킨다. 입술 수천개가 열리고 닫히며 나직한 소리, 잔잔한 바다가 찰랑이는 소리를 이룬다. -중략-

 

 나는 눈앞의 광경을 경악한 채 바라본다. 열기구의 아랫부분처럼 생긴, 산처럼 거대한 존재의 하반신이 하늘만큼 커다란 방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 끝에 휑하니 열린 관이 달려있는데, 그 지름이 센 강과 샹젤리제를 합쳐놓은 것만큼 거대하다. 이 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지면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진다. 그 하나하나가 몸을 움직이고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인간이다. 수천의 전사, 농부, 복부 인간, 지하 노동자, 이미 손을 맞잡고 있는 경계담당 트리오, 그리고 내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이 솟아오르는 광경이 보인다. 이들은 그 즉시 종에 따라 분류되고, 각 무리는 다른 문으로 향한다. 농부들은 복부 인간들을 자그마하게 접어 팔 아래 끼고 간다.

 그 순간,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보았던 모든 광경의 의미가 갑작스레 이해된다. 지금 나는 신인류가 한꺼번에, 끈임없이 태어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흙으로 된 갑주 속에 몸을 웅쿠린, 이 산처럼 거대한 존재는-감히 여성이라고 적진 못하겠다-암컷이고 여왕인 셈이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며 먼지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난쟁이들, 그들이 수컷인 것이다.

 이제야 그들의 기쁨이 이해 간다. 그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 시대의 남자들, 나의 형제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리고 나 자신 역시 얼마나 쩨쩨하게 느껴지는지! 우리 남자들은 여성에게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었다가도 곧바로 도로 거두어들인다. 온갖 계산과 꿍꿍이속으로 가득하다. 잠시 동안 자신을 내던지고 나서, 자기도취와 이기주의라는 갑주 속으로 움츠러든다. 하지만 우리의 머나먼 후손들인 이들은 자기 자신을 통째로 내어준다. 가죽과 살, 있는 그대로의 전부를! 그들에게는 남성으로서의 기관이 필요하지 않다. 기관은 그들의 몸 자체, 여성의 몸속으로 녹아드는 그들의 몸이기 때문이다. "

 

 아무튼 시간 여행 SF를 좋아하기 때문에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어떤 문장은 여자들에게는 불쾌할 수도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