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 위에 눕다 - 내 삶에 클래식이 들어오는 순간
송지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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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클래식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가게 된 일이 있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공연인데, 전시는 몇 번 가봤어도 콘서트홀에서의 오케스트라 연주라니. 다행히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들어본 기억이 있어서 클래식에 대해 잘은 알지 못하지만 음악을 듣는 거 자체만으로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즐기기 위해선 보통 앞쪽 명당 좌석인 R석이나 S석에 앉으면 좋다. 다만 좌석 가격이 보통 10만원을 상회하고 20만원 정도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클래식에 대해서 좀더 알고, 작곡가의 배경이나 음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안다면 비싸게 준 공연을 좀더 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선율 위에 눕다』 라는 책을 알게 됐다. 클래식 음악과 발레 담당기자로 일했던 송지인님이 쓴 책으로 클래식을 잘 모르는 초보에게 하나씩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진입장벽이 조금 높은, 어쩌면 다른 음악보다 어렵다고 느끼기도 한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무엇도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p.7) 그부분에 참 공감했다.



나도 실제 공연을 보러가기 전까지는 콘체르토며 심포니가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고, 그저 익숙한 ‘멜로디’의 클래식 음악을 일상 속에서 들으면 익숙하게 느끼며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젠 애플 뮤직의 클래시컬 어플을 통해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전 악장을 듣기도하고, 어느 교향악단과 지휘자가 연주한 곡인지도 살펴본다.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되고 좋았던 건 마지막 파트의 생상스 교향곡에 대한 소개였다. 흔히 생상스를 《동물의 사육제》 작곡가로 잘 알고 있고, 그의 대표작이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가 워낙 유명하다는 말에 공감했다. 대중적으로 익히 알려진 곡이기도 하니까.


다만 이 책에서 저자는 생상스의 교향곡 3번 ‘오르간’이야 말로 생상스 평생 최고의 걸작이며 프랑스 교향악의 상징이라 말한다. (p.229) 매 챕터별 이야기 끝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QR코드가 첨부돼있는데,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니 몰입이 더 잘되기도 했다. 


생상스는 역사상 최초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를 가진 피아니스트이기도 한데 실제로 생상스는 오르간을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당시 파리 상류 사회 교류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마들렌 교회의 전속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파리 최고의 오르간 주자라는 증명과 같았다고 한다. 일례로 리스트가 생상스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 생상스야 말로 세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고 극찬한 일화도 유명하다고 한다. (p. 230~231)



작곡가와 곡에 대한 이야기가 쉽게 쓰인 클래식 음악 에세이라, 클래식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도, 음악은 잘 알지만 곁들여지는 이야기들이 궁금하신 분들께도 추천한다!!




#클래식에세이 #클래식추천 #에세이신간 #선율위에눕다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무엇도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할 수는 없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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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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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문까지 같이 걸어가줄 든든한 친구같은 책

『해방의 밤』, 은유, 창비, 2024





은유 작가가 읽은 책을 알려주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이다. 서간문의 형식을 띈, 

수신인은 독자인 글 묶음이랄까. ‘한 사람이 읽은 책을 알려주지만 독후감은 아니다’(20p)라 말했듯, 글에는 책을 통과한 작가의 이야기가 책 속 구절과 함께 인용 된 것이지 독후감의 성격은 아니다. 


이 책 표지 뒷면에 “책은 해방의 문을 여는 연장이다”라고 써 있는데 

막상 내가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드는 이 책의 이미지는

‘해방의 문까지 가고 싶다하면 같이 걸어 가줄 든든한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아, 나 이렇게 계속 해방을 향해 가도 괜찮구나.’ 삶이 지치고 힘에 부쳐 머뭇거릴 때 

뒤에서 등 한번 슥 떠밀어 주는 친구..!


서평으로 책 몇 구절을 읽는 건 유튜브로 한 편의 영화를 요약본으로 보는 것과 같다. 

책에 관심을 둔 사람 중 일부만 서평을 읽지 않나 싶은 책의 특성상 서평은 그마저도 도달하기 어렵다고 본다. 요약본을 봤다고 해서 그 영화를 봤다고 할 수 없이 누군가가 필터링해서 본 하이라이트만 적힌 서평이나 책 줄거리 요약들도 그렇다. 정말 재밌는 영화는 결국 본편까지 보게 되는 거던데. 서평도 책으로 가기 전 중간다리의 역할이 되었으면.


『해방의 밤』에서 눈 담아 두었던 구절을 쓰면서 이 책에 대한 나에 애정에 대해 좀더 써보려 한다. 실제로 눈담았던 구절이 담긴 책 중 마음이 갔던 몇 권의 책을 사기도 했기에. ‘해방의 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서평을 다 읽고 났을 때 사고 싶어지는, 사게 될 수밖에 없는 책으로 다가가지길 바란다.




프롤로그. 

‘내 삶은 책기둥에서 시작되었다’

19.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책기둥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생의 목격자 양천도서관이 일러준다.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헛수고와 헛걸음으로 우연 앞에 나를 풀어둘 것. 어디를 가야 자기 존재가 피어나는지 몸은 안다. 10년 후 모습을 만들어가기보다 10년 전 모습에서 멀어지지만 않아도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문보영 ‘책기둥’ 中)


37.

내가 바라는 건 명절 철폐도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닙니다.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솔닛이 말한 작가의 책무인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일을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38.

“낮은 곳들로부터 벗어날 때 사다리로 쓴 논리와 서사를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고 싶”다는 솔닛의 자상함이 내 막힌 글을 뚫어주고 이야기를 끌어내주었듯이, 내 이야기도 누군가의 말문을 틔우는 입김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55.

『욕구들』에서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하지 마‘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56.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에서 읽었는데, 울프는 사람에게 붙은 ‘라벨’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일에 작가 인생의 상당부분을 바쳤다고 해. 


66.

(알랭바디우 『사랑 예찬』)

Y에게 연애 개시 문자를 받고 제가 덕담을 건넸죠. 사람 깊게 사귀는 게 큰 공부니까 부디 잘해보라고요. 그 말은 이 사랑의 정의에서 왔어요. ‘사람 깊게 사귀는 일’이란 “유아론적인 ‘나’의 삶, 즉 ‘하나’의 삶을 포기”하고 “‘둘의 무대’가 가져오는 고통과 충돌, 불확실성 등을 감수하고, 그것과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뜻하고요, ‘큰 공부’는 바이우가 말하는 ‘진리의 구축’이겠지요. 


67.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거대한 왜곡”이라는 말은 우리를 사랑의 대인배로 만들어줄 멋진 문장 같아요. 긴 연애 공백 끝에 찾아온 귀한 인연을 축복하고, 부디 사랑의 착상을 기원합니다. 


→ 인간관계를 맺을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마찰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쉽게 돈을 벌고, 쉽게 사랑을 하는 것’이 한 인간에게 정말로 득이되지 않을 수 있음을 나또한 공감하면서 읽었던 지점들이 많았던 파트다.  




79.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라는 채이의 대사나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잘못된거야?”라는 진경의 대사는 화살처럼 마음을 찌르더라.

내가 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타인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과오가 떠올랐다. 여성들끼리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나의 일상과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에 놓인 여성을 만나는 일엔 미숙했던 것 같아.


80.

『붕대감기』 말미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고백처럼 네게 전할게. “마음을 끝까지 열어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108.

세상이 만든 경쟁과 효율의 속도에 끌려다니노라면 내 조급함에 내가 파묻히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내가 친절해지는 삶의 안전장치를 스스로 구축하는 게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126.

(『분노와 애정』, 모이라 데이비)

“‘애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잇을 것 같아. (...) 하지만 애는 내 삶을 망가뜨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171. 

우린 슬픔에 무지한 종족입니다. 세월호 이전에도 슬픔은 허용되는 삶의 모드가 아니었죠. 슬퍼하는 사람은 약자로 분류되고, 약자는 구제의 대상이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공적 발언의 장이 주어지지 않고, 슬픔은 각자 삭여야 할 사적 과제로 여겨집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말도, 슬픔에 공감하는 말도 공동체에 흐르지 못하니까 슬픔에 관한 언어가 빈곤하죠. 

(...)

176.

사회는 무슨 방식을 쓰든지 슬픔을 관리하려 한다, 사람들이 마음껏 슬퍼하도록 허용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기에 일정한 처리방식을 따라가도록 한다고요.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상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기 쉽다는 것입니다.”



204.

한 사람이 외벽작업을 하는 반나절만이라도 땅 위에다 넓고 두툼한 매트리스 같은 안전장치를 깔아놓으면 제발 좋겠습니다. 주민들이 그를 운수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도구적 인간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살아야 하는 존엄한 사람으로, 동료 시민으로 보도록 말입니다.


→ 살다보면 나와 살아온 배경이 다른, 다른 관계를 맺으며 살았던 인간들을 만나 그 차이를 실감한다. 그건 위화감으로 다가오기도, 새로운 배움의 경험으로 오기도 한다. 수용자의 태도와 해석의 문제인걸까.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요즘, 나를 보며 그 차이를 느끼는 상대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와 다른 타인을 대해야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열린 마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타자체험의 경험을 할 수 있음을 되짚어보며.



284.

불행의 스펙트럼은 넓습니다. 허기, 권태, 불안 같은 일시적 상태부터 가난, 불화, 폭력, 질병, 낙인 같은 구조적 고통까지. 우리가 이를 드러냈을 때 사람이 다가오기도 달아나기도 하죠. 그럼에도 저는 불행은 말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내 불행을 나부터 숨기고 부정한다면 상황을 남에게 이해받기도 그리고 바꾸어내기도 어려워요. 또 불행을 털어놓아보아야 ‘불행을 말해도 되는 안전한 관계’로 자기 주변의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겠죠.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는 동안 불행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가 더 길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할 사람이 아닐까요.


에필로그.

358.

삶에서 무엇을 왜 추구하고 어떻게 지키고 살아야 하는지, 차근히 하나씩 배워가는 중입니다. ‘주인공의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온도’를 유지하는 게 행복이구나 깨닫습니다. 책과 친구의 도움 없이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가치에 대한 질문이 희박해지고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에 나와 놀아주는 유일한 두 존재가 바로 친구와 책입니다. 

(...)

제게도 '나를 살려둔' 책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불운을 대비할 수도 없고 스펙이 되지도 않는 책, 그깟 배부르지도 않은 책, 그러나 도통 무용해서 나를 억압하지 않는 책. 먼저 그것을 보았던 사람들의 깨침의 언어들이 담긴 책, 한 사람을 살려둔 책들의 목록과 이야기가 담긴 '독서의 보물지도'를 여러분 생의 윗목에 두고 갑니다. 나를 살린 책들이라면 남도 살릴 수 있으리라는 간곡한 마음으로요.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책기둥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생의 목격자 양천도서관이 일러준다.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헛수고와 헛걸음으로 우연 앞에 나를 풀어둘 것. 어디를 가야 자기 존재가 피어나는지 몸은 안다. 10년 후 모습을 만들어가기보다 10년 전 모습에서 멀어지지만 않아도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 P19

내가 바라는 건 명절 철폐도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닙니다.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솔닛이 말한 작가의 책무인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일을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 P37

Y에게 연애 개시 문자를 받고 제가 덕담을 건넸죠. 사람 깊게 사귀는 게 큰 공부니까 부디 잘해보라고요. 그 말은 이 사랑의 정의에서 왔어요. ‘사람 깊게 사귀는 일’이란 "유아론적인 ‘나’의 삶, 즉 ‘하나’의 삶을 포기"하고 "‘둘의 무대’가 가져오는 고통과 충돌, 불확실성 등을 감수하고, 그것과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뜻하고요, ‘큰 공부’는 바이우가 말하는 ‘진리의 구축’이겠지요.
- P66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라는 채이의 대사나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잘못된거야?"라는 진경의 대사는 화살처럼 마음을 찌르더라.
내가 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타인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과오가 떠올랐다. 여성들끼리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나의 일상과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에 놓인 여성을 만나는 일엔 미숙했던 것 같아. - P79

우린 슬픔에 무지한 종족입니다. 세월호 이전에도 슬픔은 허용되는 삶의 모드가 아니었죠. 슬퍼하는 사람은 약자로 분류되고, 약자는 구제의 대상이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공적 발언의 장이 주어지지 않고, 슬픔은 각자 삭여야 할 사적 과제로 여겨집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말도, 슬픔에 공감하는 말도 공동체에 흐르지 못하니까 슬픔에 관한 언어가 빈곤하죠. - P171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는 동안 불행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가 더 길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할 사람이 아닐까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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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설계자 - 장르불문 존재감을 발휘하는 단단한 스토리 코어 설계법
리사 크론 지음, 홍한결 옮김 / 부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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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면서 작법서를 읽는다는 게 때론 도움이 되는 말도 많지만,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말이 있어서 자기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흘려 듣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홀로 글을 쓰는 작업 중에 막막하고 외로운 순간들이 문득 찾아온다. 그럴 때 이 책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고, 내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해서 써 본다.


   



무턱대고 이야기를 구성할 때 사건, 플롯 이렇게 짜고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책 <스토리 설계자> 에서는 이 경우 '그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말한다.

기본적이지만 자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사건이 아니라 주인공이 왜 내적변화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쓰기 시작해야한다는 것.



p. 182 

플롯이란 곧 '업보 karma'다. 여기서 업보란 다친 새끼 고양이를 보살펴 주면 꿈꾸던 직장에 취직하게 된다는 식의 추상적 인과응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적 인과관계를 가리킨다. 가령 대학 학력을 속였다면 꿈꾸던 직장에 취직이 확정된 찰나에 그 거짓말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이 과거에 대학 학력을 속인 것으로 당신이 정했다면 미래에 그게 문제가 되어 결정적 순간에 그의 뒤통수를 때릴 것을 당신은 이미 내다봤다는 이야기다. 스토리에 맞물리는 순간들을 주인공의 과거에 심어 줌으로써 밑그림을 탄탄하게 구축할 재료를 마련할 수 있다. 당신이 써낼 장면들은 과거 주인공의 삶을 좌우했고 지금도 장악하고 있는 순간들을 담게 된다. 





책 제목에 '설계자'라 표현된 만큼, 구체적인 설계도라 생각하면 된다. 

글 쓰다가 뭔가 안 되고 있을 때는 안되는 이유가 있을 때가 많다. 근데 그게 왜 그런건지, 도중에 서 있는 우리는 알아채기 어렵다. 이 책이 그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퇴고 중인 이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었다.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이렇다더라' 하는 부분에서 왜 글쓰기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에 대해서 또한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초고를 쓸 때도 그렇다. 원래 초고란 형편없다며 일단 쓰라는 얘기가 많다. 맞다. 그런데 일부만 맞다. 이 책에 의하면 초고도 결국 내가 보기 위한 것이므로 형편없지만 잘 써야 하는, 그야 말로 다른 관점에서의 '초고 쓰기'에 대해 언급한다.



p. 52 

소설의 밑그림에 대해서든, 소설 전체의 초고에 대해서든,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아무도 안 보기는 커녕,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보게 되어있다. 바로 당신이다. 게다가 그렇게 몇 달동안 무작정 쓰고 나서 남는 것은 제각기 따로 노는 사건 모음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그저 산만하게 목적 없이 벌여놓은 사건들일 뿐이다. 다듬어봤자 나아질 것도 없다. 다듬을 내용이 없으니까.



아주 팩폭을 때린다. 나도 읽으면서 많이 두드려 맞은 느낌이 들었달까. 아이디어 메모랍시고 이래저래 써놓은 자투리 글들이 실상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데 정말로 도움이 되느냐, 는 의문이다.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싶어 놓치기 아까운 메모, 짧은 글들은 이야기의 완결성에 있어서, 퇴고에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긴 어렵다. 


 




이 책의 가장 좋았던 포인트 중 하나는 함께 증정되는 '장면 카드'였다. 카드의 기능과 역할이 이야기를 쓸 때 꽤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었는데, 이야기 속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고 이야기의 개연성과 사건의 필요성을 점검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장면카드에서는 내가 썼던 장면들에 대해 해당 장면의 사건이 인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플롯과 인물의 내적반응과의 긴밀한 연결성에 대해 다시금 체크해보게끔 만든다.

너무 당연하지만 때론 놓치게 되는 부분들을 재구성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결말을 쓰는 것에까지 가면 대체 '결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결말은 결국 주인공이 그 사건을 맞닥뜨리면서 무엇을 '깨닫는지'가 중요하다는 것. 일련의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로 인한 주인공이 받는 영향을 모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결말이라는 것. 











p. 281

우리가 결말을 보면서 감동하는 이유는, 바로 그 결말이 영화 속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알고 있다. 첫 장면에서 마지막 장면까지의 여정을 거치는 동안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어떻게 바뀌었으며, 스토리의 말미에서 눈앞의 상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주인공이 무엇을 깨달았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의 소설의 지면에서 포착해야 할 것은 주인공의 내적 투쟁이 끝나는 순간이다. 잘못된 믿음이 마침내 소멸되고 주인공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즉 '아하!'의 순간이다. 주인공은 그 깨달음 덕분에 마침내 외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혹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곤 한다.



명심하자. 중요한 건 주인공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내적으로 그 변화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출판사 <부키> 에서 책을 제공받아서 쓰는 리뷰지만 내게 정말 필요했던 타이밍에 잘 와서 너무 도움이 되었던 책. 책을 받은지는 꽤 되었는데, 일이 바쁘기도 했고, 대본 작업 수정에 이 책이 도움이 많이 되어서 활용을 많이 했는데 막상 책 리뷰를 쓰려니 이래저래 짬이 나지 않아 한달 정도 지난듯한데 이제야 쓰게 됐다. 

퇴고 중인 작가님들께 왕왕추천한다!

소설의 밑그림에 대해서든, 소설 전체의 초고에 대해서든,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아무도 안 보기는 커녕,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보게 되어있다. 바로 당신이다. 게다가 그렇게 몇 달동안 무작정 쓰고 나서 남는 것은 제각기 따로 노는 사건 모음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그저 산만하게 목적 없이 벌여놓은 사건들일 뿐이다. 다듬어봤자 나아질 것도 없다. 다듬을 내용이 없으니까. - P52

플롯이란 곧 ‘업보 karma‘다. 여기서 업보란 다친 새끼 고양이를 보살펴 주면 꿈꾸던 직장에 취직하게 된다는 식의 추상적 인과응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적 인과관계를 가리킨다. 가령 대학 학력을 속였다면 꿈꾸던 직장에 취직이 확정된 찰나에 그 거짓말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이 과거에 대학 학력을 속인 것으로 당신이 정했다면 미래에 그게 문제가 되어 결정적 순간에 그의 뒤통수를 때릴 것을 당신은 이미 내다봤다는 이야기다. 스토리에 맞물리는 순간들을 주인공의 과거에 심어 줌으로써 밑그림을 탄탄하게 구축할 재료를 마련할 수 있다. 당신이 써낼 장면들은 과거 주인공의 삶을 좌우했고 지금도 장악하고 있는 순간들을 담게 된다. - P182

우리가 결말을 보면서 감동하는 이유는, 바로 그 결말이 영화 속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알고 있다. 첫 장면에서 마지막 장면까지의 여정을 거치는 동안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어떻게 바뀌었으며, 스토리의 말미에서 눈앞의 상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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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함에 대하여 - 홍세화 사회비평에세이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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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표지에 세로로 적힌 부제를 보며 멈칫했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 옳은 말, 맞는 말은 정면으로 맞서기 참 힘들다. 너무 훅 찌르니까 외면하고 싶었던 얼굴 앞에서 고개를 피하듯 그렇게 책을 한참 꽂아만 놓았다. 그럼에도 한겨레 서평단을 신청했고, 글을 써야 하니 어쨌든 한장씩 두장씩 틈날 때마다 읽어나갔다.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읽기 전까지 고민하다가 한두장씩 넘겨보는 사람도 있을테니까 이 리뷰는 후자의 사람들을 위해 읽혔으면 싶다. 어찌되었든 책장을 넘기며 뼈 때리는 말이 가득하겠지 싶었던 칼럼들 앞 서문의 제목은 이러 했다.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맞다. 이 책은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미안함을 말로 고백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무엇에 대해 왜 미안한지를 글로 써내는 일 또한 간단한 과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요행으로 살아남았다는 데에 미안함, 누군가는 지겹다고 쉽게 외면할 수 있는 데에 느끼는 미안함, 성소수자와 난민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미안함. 자책과 분노와 안간힘은 이러한 미안한 감정 혹은 상태와 함께 한다. 회의하는 자만이 미안함도 지속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미안함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글을 쓰고 정리하고 다시 정리하는 사람만이 찰나의 자책, 순간의 분노가 아닌 결국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미안함에 대해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책을 다 읽은 뒤 여러 밑줄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렸는데도 A4 3장 가량의 글들이 나왔다. 나중에 책을 다시 열어보게 된다면, 이 밑줄들이 책의 내용을 가늠하게 해줄 것이고, 책을 읽기 전 지금 이 리뷰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책과 작가가 어떤 톤으로 미안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지를 가늠하게 해줄 것이다. 


서문에서 작가가 말했듯, 이 책 또한 '그저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보는 것'이다. 미안함에 대해서, 미안함으로 엮인 이 무수한 칼럼의 글들 또한 그저 살아남은 자의 안간힘으로 쓰인 책일 것이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또한 한 사람이 말하는 미안함에 대해 그저 찬찬히 읽어낼 뿐인 것이다. 우리 모두 요행으로 살아남았으니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살아남았으니 읽을 수 있다. 미안해할 기회가 있다. 이 리뷰와 책 속 몇몇의 문장들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찔한다면 한번 쯤 읽어보길 권유해본다.


오만함에도 층위가 있다. 조금이라도 겸연쩍어할 줄 아는 오만함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내면의 절제나 외부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아 공격성까지 띠는, 뻔뻔한 오만함도 있다. (...)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독재로 치닫는다. - P25

내가 ‘적극적인 앨라이(Ally, 성소수자들LGBTQ이 겪는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사회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 P42

돈벌이에, 자본의 이윤 추구에 바빠서, 사람의 안전은 고려 사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온통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차라리 뻔뻔함이 성공의 열쇠가 된 사회다. 중고 배를 수입해 증축해도 안전 검사를 쉽게 통과하고, 컨테이너를 결박하지 않은 채 과적해도 단속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월호만의 일이겠는가.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되어 자리 잡힌 경향이고 흐름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과 국가기관은 탈규제에 있어서 한통속이었다. 모든 규제를 암이라고 규정한 박근혜 정권의 시대에는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 P158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진보 개념을 빼앗기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 P163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복종하게 하는 지배 기제다. 몸에 가하는 폭력과 달리, 상징폭력은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의 세계관, 의식, 욕망을 내면화하게 한다. 그 결과 피지배자는 열등감, 즉 스스로를 부정적이거나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된다. - P176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본디 ‘진실과 공익의 추구’라는 말과 결합되어야만 유효하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타자와 관련된 혐오, 증오, 위협의 선정적 보도는 검증의 어려움이 있기에 더욱 제어되지 않는다.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의 저자 파스칼 보니파스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석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으로 ‘전문가에게 맡기기’와 ‘단순화하기’를 들었다. 특히 단순화하기가 사이비 언론의 선정성과 만나면 우리는 섬세한 안목을 갖는 대신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 틀에 갇힐 위험이 크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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