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화

오대산 염불암 너와 집에서
잘 마른 탑을 만났다
탑은 깊은 우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한두 그루쯤 나무를 베고 쪼개고
가지런히 우물 井으로 쌓아 놓은
저 장작더미는 얼마나 따듯한 탑인가

속세의 아랫목이란 모두
탑이 있던 장소가 아닐까
염불암, 당간지주도 기와 불사도 버리고
속세의 누추한 지붕과 아랫목 빌려와
기우는 만행蠻行이 비로소
만행卍行에 이르러 있다

높은 곳으로의 탑의 영험을 친다면
저 장작 탑에서 뿜어져 나온 저 연기란
또 얼마나 높은 탑인가
우물 井으로 쌓은 저 탑으로
우물 끓이고 공양을 끓인다

한곳에 오래 정좌하고 있으면 모두 탑을 닮아 간다
새벽에 탑이 느릿하게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또 한참 동안 탑이 되었다가
몇백 년이 흐른 다음
느린 걸음걸이로 부엌으로 나가
손등에 물 맞춘 밥을 지을 것이다
산골짜기 방 한 칸 덥히는 일은
탑 하나 허무는 일이라는 듯

ㅡㅡ이서화 시집《굴절을 읽다》/시로여는세상pp.49 -50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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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아홉 


흘러가는 달빛의 뒤꿈치에 부딪쳤는데도 멍이 든다
스카프처럼 목덜미에 차르르 감기는 바람에도 멍이 든다
멍 때리며 걷다가 튀어 오른 흙무더기에도 걸려 멍이 든다
내가 몇 살이지? 내게 물어보았을 뿐인데 멍이 든다
너 뭐 하는 인간이냐? 누가 다그치지 않았는데도 멍이 든다
내가 나 같지 않아 멍이 든다 확인해 보려고
손가락으로 쿡쿡 눌러 보는 자리마다 멍멍하다
이미 나를 다 써 버린,
먹통인 내가 녹슬어 간다.
구멍 뚫린 자물통처럼 맹 하게 녹슬어 간다 - P33

과욕

큰 집에 사는 것도
큰 이름을 얻는 것도
부럽지 않은데
자갈자갈 흘러가는
여울물은 탐난다

저 어려서 명랑한 허리,
한 발(髮)만 걷어와 벽에 걸어 두고
눈도 귀도 입도 헹구며 살까?
- P82

상강(霜降)

하늘이 짯짯한 바다 같은 날이다

구름이 다도해 섬처럼 떠 있는 날이다

망연자실
섬에서 섬으로 떠밀려 다니는 날이다

섬과 섬 사이에서
내가 파도치는 날이다

고향에 다녀와야겠다
- P88

내리막길

앞만 보고 올랐던 길
내려올 땐 다리가 꼬여
뒷걸음으로 내려온다

두서없이 밀어 넣어
구겨지고 접힌,
더러는 끊어지기도 한 길들이
후들후들 풀어지는 걸 바라보며
거꾸로 걷는 내리막길

호흡에 걸려
박자 놓치고 바닥 놓치고
까딱, 낭떠러지처럼 무너질까
반걸음씩, 반걸음씩, 걸음을 맞붙이고 걷는

지천명,
몸과 마음이 서로 부축해 주느라
서로를 향해 잔뜩 기울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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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추구하는 것 역시 영적인 성격의 탐색을 함축하고 있었다. 금은 황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지의 중심" 에서 발견되며,
결(계관석 혹은 유황), 황색 수은 그리고 내세("황천) 등과 신비스런 관계를 맺고 있다. 금속의 급속한 변성에 대한 신앙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 문헌은 BC 122년의 『회남자淮南子』이다. 실제로 연금술사는 금속의 성장을 가속화할 따름이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연금술사도 시간의 리듬을 촉진시킴으로써 자연의 작업에 기여한다. 금과 옥은 양의 원리를 공유하므로 몸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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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소파 앞 바닥에 앉아서
고대 라틴어로 된 기도문을 조금씩 읊조렸다.
- P27

글쎄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포로가 될 수 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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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상의 집은
그 철근의 힘에 기대고 있는지
혹은 감당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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