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화

오대산 염불암 너와 집에서
잘 마른 탑을 만났다
탑은 깊은 우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한두 그루쯤 나무를 베고 쪼개고
가지런히 우물 井으로 쌓아 놓은
저 장작더미는 얼마나 따듯한 탑인가

속세의 아랫목이란 모두
탑이 있던 장소가 아닐까
염불암, 당간지주도 기와 불사도 버리고
속세의 누추한 지붕과 아랫목 빌려와
기우는 만행蠻行이 비로소
만행卍行에 이르러 있다

높은 곳으로의 탑의 영험을 친다면
저 장작 탑에서 뿜어져 나온 저 연기란
또 얼마나 높은 탑인가
우물 井으로 쌓은 저 탑으로
우물 끓이고 공양을 끓인다

한곳에 오래 정좌하고 있으면 모두 탑을 닮아 간다
새벽에 탑이 느릿하게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또 한참 동안 탑이 되었다가
몇백 년이 흐른 다음
느린 걸음걸이로 부엌으로 나가
손등에 물 맞춘 밥을 지을 것이다
산골짜기 방 한 칸 덥히는 일은
탑 하나 허무는 일이라는 듯

ㅡㅡ이서화 시집《굴절을 읽다》/시로여는세상pp.49 -50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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