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일요일 오후마다 모르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왔다
수현이가, 수현이 맞나. 아니요. 잘못 거셨어요. 수혁이집 아입니까? 예, 아니에요. 수현이 집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일요일 오후가 다 갔는데
전화는 걸려오지 않고
노인들은 골목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다 여전히

내가 수현인 줄도 모르고
내가 남아 있는 줄도 모르고

수현은 그늘로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올 여름은 그해보다 많이 덥다 생각하며
앉아 있다 - P40

지난가을

가을 저녁 부엌을 정리하던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국내산 흙당근은 이토록 무겁고 파프리카의 노랑에는 무게가 없는지 왜 두부는 단단한가 왜 여전히 두부는 값이 싼가 그리고 어느 날 매일 지나치는 약국 앞의 노점에서 그는 ‘나는오이야‘라고 적힌 종이를 읽게 된다 그 뒤로 무가 하나 놓여 있다 오이는 없다 그는 무를 산다 동전으로 거스름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다 부드럽게 얇아지는 하늘 ‘아직 가을이구나 혼자 생각할 줄 아는 가을 저녁이 있고 그는 알 수 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제 나라는 사실을 나는 오이야 나는 오이야 무는 검정 비닐봉지에 들어 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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