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림누리 수영장


레인을 왔다 갔다 하는 초급반
나 혼자 뒤처진다 한 바퀴 따라 잡힌다

둥둥 떠다니고 싶었는데
가라앉는 사람들이 다시 떠오르는 동안
온몸에 힘을 빼고 살아 있고 싶었는데

땀을 흩날리며 트랙을 도는 육상부원
수영하는 사람도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고 멈추면 물도 많이 마신다

물 먹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수영을 배울 수 있는데 두려운 건 그뿐만이 아니라서

삶은 왜 그럴까
늘 푸르딩딩한 얼굴로 쪼글쪼글 붙어 있을까 - P32

내가 흘린 땀과 남이 흘린 땀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건 보이지 않지만 그 또한 물방울 속에 섞였을 것
작은 것 하나하나에 슬픔을 느끼는 병이 있다

두려움 없는 사람들 셔틀버스에 올라타고
꽃우물로

물이 무서운
나 혼자 뒤처지고 - P33

만년필

유종인

잉크가 다 닳은 펜의 카트리지가 훌쭉해져
잉크병을 열고 펜촉을 담갔으나 잉크병도 바닥일 때생활은 새똥이 묻은 교회 십자가 옆 허공에
빈 펜촉을 들어
필사의 부리로 끄적이는 일

필경사의 손도 아닌데 손가락에 생긴 펜혹은
창밖 뻐꾸기가 슬쩍 물어다 어디
묵언의 둥지에 한동안 탁란하듯 맡길 것도 같은 오월

바닥난 잉크 대신 카트리지에
히말라야 만년설의 빙하수를 넣어볼까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심상하게 귓등으로 넘기는 절간종무소의 진돗개 눈빛을 반쯤 채워 쓸까
가끔은 민달팽이와 유혈목이가 지나간 산 이끼의 숨결과
마라도와 가파도 사이 파도 소리를 시보時報처럼 담아뒀다 - P99

파도체의 소리 나는 푸른 사인을 해볼까
어기적어기적 저 오랜만의 두꺼비 머루 같은 눈빛도만연체 소설의 물꼬를 틀 때 써볼까

마음은 점점 바닥난 잉크를 대신하겠다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변방의 숨은 오지랖들
그 변두리 진국들에 펜촉의 과정을 그윽이 박는 날들

어머니는 그 생각만으로도 만년은 훌쩍 넘겨
쓸 수 있는 영혼의 잉크라는 것
죽음으로도 그 사랑의 필기감은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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