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사냥

비 오는 날 화면에서 독수리 한마리가
가파른 암벽에서 노는 산양 한 마리를 낚아챘다

산양은 들어 올려지지 않으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는데
아찔한 암벽과 돌밭을 내달리며
목에 발톱을 박은
독수리를 내동댕이치고 발로 밟고
달리는 것이었다

독수리와 산양을 따라온 다른 산양 한 마리는
허공에다 뿔만 주억거리고

배가 고픈 독수리는 끝내 발톱을 놓아주지 않는데
마치 산양이 독수리를 사냥하는 것 같아
다른 산양한 마리는 따라가며 독수리의 날개를
받아버리려 하고
독수리의 날개를
먹지도 않는 독수리를 - P32

몇 차례나 암벽과 돌밭에 내동댕이쳐진
독수리는 크게 다쳤는지
발톱을 놓아버리고
쓰러졌는데

문득 예전에 독수리에 쫓기다 목을 잡히자,
그냥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같이 뛰어내린 산양이 생각났다

독수리 보다 무거운 산양이 생각났다

같이 뛰어내릴 게 나도 필요한데

그것이 세계든 인간이든
자본주의든 - P33

팔월의 배롱나무

절 입구 집 입구 아파트 입구에 배롱나무 심은 뜻을나는 모른다

팔월에 붉은 꽃이라니, 중얼거리며 드나들 뿐

다만 배롱나무 거죽을 한 꺼풀 벗긴 듯한 미끈한 몸을기억할 뿐이다

역병도 벌레도 곰팡이도 배롱나무를 통과한 뒤 온다

나는 배롱나무 아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소주 한병을 마신 일이 있다

어지러운 눈으로 배롱나무 꽃잎들을 깨문 적이 있다
배롱나무 미끈한 몸에서 미끄러져본 일이 있다

고대 생물처럼
검고 조그만 벌레처럼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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