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어진 눈을 씻다가 뜨면, 물속 정거장으로 드는 기차

거울 속 내가 없어서 벗어던진 옷이 지루하다

봉제선 하나 없는 물속은 무엇이 드나들어도 그만

사막을 모르는 꽃은 선인장을 조금 들뜨게 할 뿐

블라인드를 흔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공구통에 넣고 꺼내 쓸 날이 올 것이다

부어 곱은 손을 뜨거운 물에 불려 깨우고

신기루와 오로라 사이 내일로 출근한다 - P37

귤은 껍질까지 둥글고

아이 두엇 물어 오느라 잇몸에 그믐을 들인 여자가
몸일으키며 가랑잎처럼
웃는 병상에

엉덩이 디밀고 앉아
나는 봉지 귤을 까고

봉변에 놀란 도마뱀 꼬리처럼 툭툭 끊기는 말들

가늘게 떨리는 손바닥에
노랗게 가른 귤 조각이나 건넨다
시린 일이 귀밑머리에 쌓였는지 간밤의 잔설들

암은, 아무렴

귤은 껍질만으로도 여전히 향기롭고 둥글더라, 끄덕이면
마주 끄덕이는 누이
부끄러이 더덕꽃 낯으로 그늘진
앞섶

아이 셔, 나는 돌아앉아 흐렸다 - P66

수염을 다 뽑고 주머니를 덜고
강을 만나면 쇠붙이를 버리고 첫 물결에 발목을 내주고
돌아갈 일 따위는 아예 없도록

바누비누로 가요 우리

각진 모서리를 지난 뒤에나 알아채서
되돌아보면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둥글어지는 곳
아이들인 국민이 아기로 늙어 가는
바누비누

물방울 하나에 세계가 들어앉아 있지요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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