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래서

산책은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들어간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음은 곧잘 다른 마음이 되어

노을을 낭비하였는데

이어지는 저녁의 이야기는
흐린 은유는

아무때나 친절하면 안 된다는 듯

우리는 지나가는 그늘
공기조차 알아채지 않도록

그건 나무에게 이름을 걸어주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

없는 슬픔이 도와
그러므로 그래서

안녕히 가세요
나의 시간 - P15

전야

공작이
날개를 펴지 않는 휴일

가만히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

어둡고 누추하다

어떤 차이가 꼭 멀리 가야 하는 걸 뜻한다면
거기 갈 수 있을까

어제는 아프고 아름다움은 위태롭고

내일,
탈출이 뒤를 가려주지 않아도

불확실에게 생을 건다

죽어도 좋을 아침은 없는데
죽을 것 같은 아침이

곧 오고 있다
- P109

저녁의 문

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나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갔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으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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