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꽃여관

팥꽃나무가 오래 참았다는 듯이 할 말을 쏟아낸다
흩어지지 않고 편편히 살 속에 다 박힌다
나무의 우문을 알아들은 꽃이
꽃만 피우기 위해 세상에 오지 않았다는 듯
마주 접고 접은 수천 개의 눈동자를 반짝인다


음지의 말을 받아 적는 문고리마다
주소지가 찍힌 팥꽃여관
누군가가 서서 울었을 계단 바닥에
별들의 지문이 엉켜 있다
난간 아래 끈 풀린 신발 한 짝에
시들은 꽃잎이 곰곰이 실마리를 풀고 있다


지나칠 수 없는 미담이 오간 사이라도
이미 헤어졌다면
마주칠 순 있더라도 마주할 순 없을 것이다
팥꽃나무 그늘진 여관, 등 구부린 벌레처럼
여태 우린 오래 전에
죽은 것을 안고 잠들었는지 모른다
- P14

의자, 뒤

빨랫비누가 죽처럼 흘러내리는
말복과 중복 사이 늦은 오후
모르는 노인이 정자 옆 의자에 앉아
지나는 사람을 훔쳐본다
타다만 장작처럼 비쩍 말랐다


모르는 노인이 모르는 여인을 들춰보는 곁눈
더는 비누가 아닌
그 흐물흐물한 것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는지조차 모르는 졸음들이 모여
봄이면 산벚꽃 한 그루 거기 온다


대책 없이 늘어진 자리공을 수반에 꽂은 적 있다
축 처진 꽃가지를 일으켜 세우는 건 할 짓이 아니었다
마지막 연민 같은 것이었다
더러는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의자, 뒤에서 불끈하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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