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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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예상보다 시사하는 바가 깊은 소설이라 깜짝 놀랐다. 발랄한 표지답게 줄거리는 쉽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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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오필리아는 행성 주민들이 단체 이주하게 되었을 때 몰래 혼자 남는다. 

“이렇게 혼자 있던 적이 없었다…… 일생을 통틀어 단 한번도. (중략)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도, 행성에 단 한 명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꼈다.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동안 컴퍼니와 아들 내외, 그 밖의 사람들의 굴레 속에 살던 그녀는 자유를 갈망한다. 그들이 안전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녀에게는 안전이 아니었다. 아들부부가 차지했던 침대를 20년만에 되찾고, 공적 시선에서 벗어나“품위”없이 옷을 벗어던지고,“단정하고 예측가능한 것이 아니라 엉망진창인” 모습이 되기로 하며, 숫자와 로그로만 되어 있던 컴퍼니의 기록들을 자기만의 이야기로 바꾸어 나간다. 

그때 예상치 못하게 괴동물들을 맞닥뜨린다. 그 괴동물들은 이 행성의 토착종이다. 오필리아는 그 괴동물들과 말과 컴퍼니가 남기고 간 기계들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번식하는 것을 도우며 점점 그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어 “둥지수호자”라고 불리운다. 

조사를 위해 찾아온 인간학자들이 행성을 찾아온다. 그들은 컴퍼니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 남은 이 노파를 제정신이 아니고 쓸모없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어르신은 아무 것도 못해요. 배운 것 없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흔한 할머니잖아요.”하지만 오필리아는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괴동물들과 자기의 자유를 지킨다. 결국 오필리아는“최초의 비인간적 지적 생물과 교류하는 인간 대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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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다보니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작품에서 18세기와 21세기의 이상향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로빈슨 크루소에는 남성, 백인, 인간, 기독교가 중심이 되는 산업화 시대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무인도의 자연과 동물을 백인 남성의 시각에서 상대화한다.

난파되어 무인도에 살게 된 것은 그에게 재앙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섬을 어떻게든 중심부(서구화된 사회, 산업사회, 기독교 사회)처럼 만들기 위해 24시간을 기독교적으로 인식하고 쪼개어 일하고 기도한다. 땅을 개간하고, 달력을 만들고, 동물을 길들인다. 원주민들은 죽여 없애야할 적이고, 그 중 살아남은 프라이데이는 친구가 아니라 노예가 된다. 크루소는 무인도의 왕이 되지만 주변부인 그곳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서구 기독교 사회 (중심부)로 돌아가기만을 꿈꾸고 결국 그 꿈을 이룬다.


반면 <잔류인구>의 주인공부터 주변인(늙은 여자, 컴퍼니의 사업에 쓸모없어서 이주비용조차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주인공은 주변부(버려진 행성)에 혼자 살기를 기꺼이 선택한다. 오필리아가 원하는 것은 오직 “자유”다.   그녀는 일체의 가부장적인 가치관 - (공적인 목소리, 아들내외로 대표되는 가족중심주의, 품위/공적인 목소리 등으로 대표되는 외적 가치관, 안전/규칙 등으로 대표되는 집단중심주의, 심지어 인간중심주의까지도)을 거부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 괴동물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쫓아내는 게 아니라 공존하고 배우고 그들을 양육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 그는 끝까지 이 행성에 남아, 인간과 비인간의 교류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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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피드에 올렸던 “아기를 낳아도 될까” 라는 영문기사에 나왔던’에코토피아’ 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잔류인구는 바로 그 에코토피아,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시대를 상상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서평이벤트로 출판사에서 책을 후원받아서 읽고 쓰는 주관적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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