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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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아주 길다.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통증을 견디는 주드의 시간처럼 길다. 짧은 단편이었다면 그의 고통이 이렇게 예리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다.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주드의 하루하루가 두꺼운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날카로운 유리에 베인 것처럼 아프다. 하지만 길어서 다행이다. 알고 싶고, 보고 싶은 인생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주드와 여러 친구들, 부모님들, 어른들의 오랜 시간과 사건, 경험, 기쁨,갈등,고통, 증오 등 다양한 감정들이 낯설지 않다. 내 인생을 스치고 간 여러 사람들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하다. 주드, 윌럼, 맬컴, 제이비, 알리, 해럴드, 헤밍, 펠릭스 등등 어느 인물 하나 완전히 생소하지 않다. 살면서 만난 많은 친구들, 선생님들, 부모님들, 이웃사람들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포근한 향수에 젖는다. 하지만 향수란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잊고 싶은 기억들, 찢어지게 아팠던 기억들도 함께 떠오른다. 구석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헤집으니, 책을 읽는 시간 내내 불편하고 불안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행복한 시간이란 있을 수 없으니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주드가 애너의 간절한 부탁에도 힘든 기억들을 꽁꽁 숨기듯이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숨겨야 하는 비밀은 알고 보면 그렇게 많지 않다. 털어놓고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들, 시간이 흐르고 보면 '그랬었구나. 진작에 말하지'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등장인물들의 속마음과 부끄러운 일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숨기고 싶은 수치스런 기억과 슬픈 기억들이 햇살에 눈녹듯 사라지며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나를 털어놓고 누군가에게 물어봤었어야 하는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후회가 밀려온다 해도 나는 아직은 털어놓거나 쉽게 물어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어설픈 평화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흔들림을 못본 척 할 것이고 소중한 이들의 '괜찮다'는 거짓말을 억지로 믿어내며 나중에 산산이 깨질 관계와 상황을 근근이 붙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월럼이 주드에게 일찍 질문하고 친구들이 주드의 대답을 진지하게 기다려줬다면 그들의 관계는 더 아름다워졌을까. 주드가 털어놓는 말들이 그들에겐 '몰랐으면 좋았을' 부담스런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말해봤자 모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봤자 맬컴은 주드의 가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 모든 관계는 두려움을 품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움에 갇혀서 다른 미래를 꿈꾸고 극복할 기회를 놓칠 것인가.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경험과 기억과 고통과 슬픔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윌럼과 부모님이 헤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감정과 고통을 나누었다면 모든 일들이 끝난 후 '어쩐지 이래서 그랬구나' 하는 아픔은 없었을 것이다. 제이비가 그의 친구들, 부모님, 어른들과 진작에 아픔과 속마음을 나누었다면 친구들이 좋아하는 제이비의 모습을 볼 기회가 많아졌을 것이다. '솜털 봉오리들이 가득한 목련가지 한 다발을 꺾어 안고 돌아오는 제이비' 

 책 속 등장인물들 모두의 인생은 작다. 하지만 소중하고 반짝거린다. 이름 없는 작은 별들이 모인 아름다운 밤하늘처럼 말이다. 인생의 정체성과 가치는 한 순간의 사건이나 행동으로 간단하게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뭔가가  끝나면 '하지만'의 가능성이 있다. 망가지고 산산조각 나도 그 상실과 아픔을 대체하는 근사한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은 떨어지는 절벽이 아니라 비좁은 골목길을 헤매다 꺾어지면 갑자기 나타나는 바다처럼 놀라움과 근사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그러니 절망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하지만'이 생기니까. 하지만 '하지만'이 생길 일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서로가 서로의 '하지만'이라는 근사한 삶의 방식이 되는 용기를 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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