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보다 Vol. 2 벽 SF 보다 2
듀나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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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SF'가 들어가 있으니까 당연히 한국에서 공상과학으로 번역되는 그 장르의 문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뒷표지의 책날개에 '동시대를 관통하는 주제와 작가들의 상상력을 결합한 단편 등을 묶은 단행본 시리즈로 'S(story)'를 담은 다채로운 'F(frame)'로 문학의 스펙트럼을 넓혀간다'는 뜻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더라고요 ㅋㅋㅋ 각설하고, 아무튼 정말 취지대로 정말 재미있고 자기 색깔이 선명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어서 행복한 독서였습니다 :blobhappy:

부제목대로, 이번 단행본의 주제는 '벽'입니다. 「하이퍼―링크: 넘을 수 없는, 넘어야 하는」에서 문지혁 소설가님은 벽을 '나누고 제한하는 경계', '열고 연결하는 출입구', '하나가 되어버린 성'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문학, 즉 이야기란 벽이 되고 문이 되고 세계가 되는 것이며 책이란 그것의 구성요소인 벽돌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도 이러한 벽의 세 가지 특성을 기억하며 벽돌, 그러니까 수록 된 이야기 하나하나를 읽어보았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각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레나」 - 듀나
한국 배경의 근미래 아포칼립스 히어로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생화학적(?)' 재난을 당해 고립된 남한 사회에 도리어 그 재난으로 인해 초능력을 각성한 사람들이 히어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히어로도 'K-'를 피할 수 없었는지, 이들은 마치 오늘날 한국 아이돌처럼 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벽'은 물리적으론 악당으로부터 본부를 보호하는 '방호벽'으로서 등장했지만, 모든 등장인물들이 전부 '고립'된 사회 속에서 마음이 '닫혀'있고, 본심을 '숨기고' 있어요. 그래서 이 작품에서 벽은 <고립, 단절, 은닉>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듀나님 특유의 냉담한 문체와 정말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어요. 잘 구축된 탄탄한 세계관 덕에 원래 한창 연재중이던 텍스트의 단편 일부를 본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더 보고 싶다는 말)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 아밀
현대 한국 배경의 판타지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상 속에 환상 한 스푼 첨가된 맛입니다. 제목부터 이제는 거의 관용어가 되어버린 '넘사벽'이지요. 말 그대로 뛰어난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손이 작은 동양인 여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힌 주인공이 마녀를 만나 차원을 넘어 자신의 '벽'을 뛰어넘고자 했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인공이 벽을 뛰어넘은 것이 도리어 그 벽 너머에 고립되어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넘으려고 뛰어 들어갔던 것이 오히려 그 벽으로 동그랗게 막혀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버린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이 작품에서 '벽'은 <당장엔 불확실해보이는 인생, 가능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ㅎㅎㅎ 아밀 작가님 특유의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세계에서 마음껏 연주되다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깡총」 - 이산화
유일(?)한 외국(?) 배경의 근미래 아포칼립스물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빠른 번식력을 이용해 빠르게 진화하던 토끼들이, 기어코 시공간 마저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인류를 위협하는 세상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물리적인 벽, 토끼들의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만든 '장벽'이 등장하고, 또 '시공간'이라는 비물리적인 벽도 나옵니다. 인간이 이 벽들에 대해 끙끙거릴 때도 토끼들은 깡충 뛰어오릅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벽은 <넘어서는 안 될 선, 한계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왜 그런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이산화 작가님의 작품을 읽은 것이었는데, '작가님 여전하시구나!'했어요. 이렇게 진지하게 허무맹랑한 소재(?)로 시작하더니 뭉게뭉게 살을 입혀 스케일을 아득하게 키워버리는 작가님 특유의 전개가 너무너무 좋았어서 기쁘게 읽었습니다. 토끼가 세상을 지배한다.

「월담하려다 접천」 - 이서영
한국 배경 근미래 디스토피아물입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재난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은 방화벽에 둘러싸인 '『1984』'가 되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정의로운줄 알고 살던 주인공은 사라진 친구를 찾으려 '월담'하려다 다른 세상으로 떨어지는 '접천'을 하고 말죠. 개인적으로 직관적인 제목과 대놓고 부처를 은유하는 등장인물관 달리 결말부는 살짝 이해하기가 힘들었어요. 재미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모호했달까요. (뭐, 저는 여러 차원을 넘나든 적이 없는 존재니까 그렇겠죠) 아무튼 이 작품에서 '벽'은 <보호인 척하는 고립된 성, 그리고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출입구>라는, 다소 대비되는 것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 벽을 넘으려 했으니 아예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이겠지요.

「무너뜨리다」 - 이유리
역시 현대 한국 배경의 판타지 한 스푼물입니다. 이 작품은 유일하게 '물리적인' 벽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의 벽'이 나와요. 이 비물리적인 벽을 상당히 흥미롭게 활용한 작품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소절을 읽고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저 혼자 엄청 오래 생각했었거든요. 저는 '의리'라고 합리화하던 '서로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 마음의 벽'을 무너뜨렸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는데, 이건 다른 분들의 의견도 많이 궁금하네요. 그런 의미로 이 작품에서 '벽'은 역시 <경계>라고 생각해요. 초반을 읽을 때 혼자 오해(?)했던 것이 있어가지고 결말과 제목의 의미 생각하면서 시간이 지날 수록 여운이 점점 더 깊어지는 작품이었어요. 아, 이것과 관련해서 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러면 작품 줄거리 전체를 관통한 뒤 이야기를 해야해서 아쉽게 여기까지 줄여보아요...

「무르무란」 - 정보라
이 작품의 배경은 완전히 창작된, 현대의 우리의 관점으론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는 세상' 입니다. 그렇지만 굳이... 정의해보자면 신석기시대?이지 않을까요. (민족지라기엔 청동기와 철기의 언급이 전혀 없고 석기와 골각기만 도구로 쓰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 작품에서의 '벽'은 유일하게 경계도, 문도, 성도 아닙니다. 바로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처럼) 자신들의 정보, 지혜, 지식, 문화, 정신세계를 기억하고 후대에게 길이길이 알려주기 위해 기록하는 곳이 바로 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사샤머니즘적인 이야기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데다가 믿고 읽는 정보라 작가님 필력까지 합쳐져 이 작품은 작품을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절 행복하게 만들어 줬어요... 또 앞서 '책은 이야기라는 벽과 문, 세계를 만드는 벽돌'이라는 문장과 함께 이 책의 여정을 너무 훌륭하게 마무리 지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티크: 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 가지 일」에서 심완선 평론가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벽은 경계이자 고립을 야기하는 수단이자 다른 세상으로의 문이 되고, 그런 벽을 넘나들게 해 주는 건 비현실의 힘이라고요. 또 그렇기에 소설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불확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며, 어느 한쪽으로도 빠지지 않게 해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 공감을 하며 책을 덮게 되었네요. 어쩜 '벽'이라는 이 하나의 단어만 가지고 6가지의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니! 책을 읽는 내내 제 세계가, 제 벽이 확장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흥미가 생기신 분께 자신있게 추천드리고 싶어요.

이토록 멋진 글을 써주신 여섯 작가님과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문학과지성사 출판사께 감사 인사 드리며 이만 리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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