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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2 벽 SF 보다 2
듀나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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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SF'가 들어가 있으니까 당연히 한국에서 공상과학으로 번역되는 그 장르의 문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뒷표지의 책날개에 '동시대를 관통하는 주제와 작가들의 상상력을 결합한 단편 등을 묶은 단행본 시리즈로 'S(story)'를 담은 다채로운 'F(frame)'로 문학의 스펙트럼을 넓혀간다'는 뜻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더라고요 ㅋㅋㅋ 각설하고, 아무튼 정말 취지대로 정말 재미있고 자기 색깔이 선명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어서 행복한 독서였습니다 :blobhappy:

부제목대로, 이번 단행본의 주제는 '벽'입니다. 「하이퍼―링크: 넘을 수 없는, 넘어야 하는」에서 문지혁 소설가님은 벽을 '나누고 제한하는 경계', '열고 연결하는 출입구', '하나가 되어버린 성'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문학, 즉 이야기란 벽이 되고 문이 되고 세계가 되는 것이며 책이란 그것의 구성요소인 벽돌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도 이러한 벽의 세 가지 특성을 기억하며 벽돌, 그러니까 수록 된 이야기 하나하나를 읽어보았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각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레나」 - 듀나
한국 배경의 근미래 아포칼립스 히어로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생화학적(?)' 재난을 당해 고립된 남한 사회에 도리어 그 재난으로 인해 초능력을 각성한 사람들이 히어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히어로도 'K-'를 피할 수 없었는지, 이들은 마치 오늘날 한국 아이돌처럼 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벽'은 물리적으론 악당으로부터 본부를 보호하는 '방호벽'으로서 등장했지만, 모든 등장인물들이 전부 '고립'된 사회 속에서 마음이 '닫혀'있고, 본심을 '숨기고' 있어요. 그래서 이 작품에서 벽은 <고립, 단절, 은닉>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듀나님 특유의 냉담한 문체와 정말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어요. 잘 구축된 탄탄한 세계관 덕에 원래 한창 연재중이던 텍스트의 단편 일부를 본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더 보고 싶다는 말)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 아밀
현대 한국 배경의 판타지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상 속에 환상 한 스푼 첨가된 맛입니다. 제목부터 이제는 거의 관용어가 되어버린 '넘사벽'이지요. 말 그대로 뛰어난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손이 작은 동양인 여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힌 주인공이 마녀를 만나 차원을 넘어 자신의 '벽'을 뛰어넘고자 했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인공이 벽을 뛰어넘은 것이 도리어 그 벽 너머에 고립되어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넘으려고 뛰어 들어갔던 것이 오히려 그 벽으로 동그랗게 막혀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버린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이 작품에서 '벽'은 <당장엔 불확실해보이는 인생, 가능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ㅎㅎㅎ 아밀 작가님 특유의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세계에서 마음껏 연주되다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깡총」 - 이산화
유일(?)한 외국(?) 배경의 근미래 아포칼립스물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빠른 번식력을 이용해 빠르게 진화하던 토끼들이, 기어코 시공간 마저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인류를 위협하는 세상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물리적인 벽, 토끼들의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만든 '장벽'이 등장하고, 또 '시공간'이라는 비물리적인 벽도 나옵니다. 인간이 이 벽들에 대해 끙끙거릴 때도 토끼들은 깡충 뛰어오릅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벽은 <넘어서는 안 될 선, 한계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왜 그런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이산화 작가님의 작품을 읽은 것이었는데, '작가님 여전하시구나!'했어요. 이렇게 진지하게 허무맹랑한 소재(?)로 시작하더니 뭉게뭉게 살을 입혀 스케일을 아득하게 키워버리는 작가님 특유의 전개가 너무너무 좋았어서 기쁘게 읽었습니다. 토끼가 세상을 지배한다.

「월담하려다 접천」 - 이서영
한국 배경 근미래 디스토피아물입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재난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은 방화벽에 둘러싸인 '『1984』'가 되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정의로운줄 알고 살던 주인공은 사라진 친구를 찾으려 '월담'하려다 다른 세상으로 떨어지는 '접천'을 하고 말죠. 개인적으로 직관적인 제목과 대놓고 부처를 은유하는 등장인물관 달리 결말부는 살짝 이해하기가 힘들었어요. 재미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모호했달까요. (뭐, 저는 여러 차원을 넘나든 적이 없는 존재니까 그렇겠죠) 아무튼 이 작품에서 '벽'은 <보호인 척하는 고립된 성, 그리고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출입구>라는, 다소 대비되는 것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 벽을 넘으려 했으니 아예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이겠지요.

「무너뜨리다」 - 이유리
역시 현대 한국 배경의 판타지 한 스푼물입니다. 이 작품은 유일하게 '물리적인' 벽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의 벽'이 나와요. 이 비물리적인 벽을 상당히 흥미롭게 활용한 작품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소절을 읽고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저 혼자 엄청 오래 생각했었거든요. 저는 '의리'라고 합리화하던 '서로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 마음의 벽'을 무너뜨렸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는데, 이건 다른 분들의 의견도 많이 궁금하네요. 그런 의미로 이 작품에서 '벽'은 역시 <경계>라고 생각해요. 초반을 읽을 때 혼자 오해(?)했던 것이 있어가지고 결말과 제목의 의미 생각하면서 시간이 지날 수록 여운이 점점 더 깊어지는 작품이었어요. 아, 이것과 관련해서 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러면 작품 줄거리 전체를 관통한 뒤 이야기를 해야해서 아쉽게 여기까지 줄여보아요...

「무르무란」 - 정보라
이 작품의 배경은 완전히 창작된, 현대의 우리의 관점으론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는 세상' 입니다. 그렇지만 굳이... 정의해보자면 신석기시대?이지 않을까요. (민족지라기엔 청동기와 철기의 언급이 전혀 없고 석기와 골각기만 도구로 쓰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 작품에서의 '벽'은 유일하게 경계도, 문도, 성도 아닙니다. 바로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처럼) 자신들의 정보, 지혜, 지식, 문화, 정신세계를 기억하고 후대에게 길이길이 알려주기 위해 기록하는 곳이 바로 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사샤머니즘적인 이야기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데다가 믿고 읽는 정보라 작가님 필력까지 합쳐져 이 작품은 작품을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절 행복하게 만들어 줬어요... 또 앞서 '책은 이야기라는 벽과 문, 세계를 만드는 벽돌'이라는 문장과 함께 이 책의 여정을 너무 훌륭하게 마무리 지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리티크: 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 가지 일」에서 심완선 평론가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벽은 경계이자 고립을 야기하는 수단이자 다른 세상으로의 문이 되고, 그런 벽을 넘나들게 해 주는 건 비현실의 힘이라고요. 또 그렇기에 소설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불확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며, 어느 한쪽으로도 빠지지 않게 해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 공감을 하며 책을 덮게 되었네요. 어쩜 '벽'이라는 이 하나의 단어만 가지고 6가지의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니! 책을 읽는 내내 제 세계가, 제 벽이 확장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흥미가 생기신 분께 자신있게 추천드리고 싶어요.

이토록 멋진 글을 써주신 여섯 작가님과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문학과지성사 출판사께 감사 인사 드리며 이만 리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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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샤우트
P. 젤리 클라크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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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을 나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에 검색하기만 한다면 뭐든지 알 수 있는 세상이 된지 한참 지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색’을 했을 때 이야기다. 검색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랐던 세계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두 책에서 얻었다. 설사 그것이 소설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책 제목 〈링샤우트〉 조차도, 책을 읽다가 이것이 실존하는 아프리카에서 기원된 미국 남부 흑인들의 춤과 노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링샤우트’는 책의 제목인 만큼, 책 속 세계관에서 ‘현실’과 ‘마법’을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작중 주인공 마리즈는 죽은 흑인들의 영혼이 깃든 마법의 검을 들고 싸우는 데, 이 검은 ‘노래’를 부르며 적을, 괴물을 베어낸다. 그리고 진 할머니의 링샤우트 ‘의식’ 또한, 영혼을 불러내거나 마법의 물을 만들어내곤 했다. 마치 ‘링샤우트’ 그 자체가, 그들 즉 미국에서 살고 있는 흑인의 정체성이자 ‘마법’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링샤우트는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불렀던 춤과 노래다. 괴로운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이 우리와도 닮아있단 생각이 들었다. 링샤우트 공연 영상을 찾아 본 뒤, 또는 보면서 이 책을 읽으면 더욱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니, 추천한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우리가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달달 외우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내는 것처럼, 소설을 읽을 때 시대적 배경에 대해 해박해야 하는 건 아니다. 책을 펼치면, 화약과 불에 탄 냄새가 가득하여 텁텁한 1920년대 미국으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나는 ‘금주법 시대’, 또는 ‘광란의 20년대’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의 미국에 대해서, 이러한 대명사 때문에 그러한 단편적인 부분밖에 모르고 있었다는 점도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20년대에 인종차별 역시 극심했으며, 쿠 클럭스 클랜 즉 ‘KKK단’의 존재와 그것이 무엇인지 정도만 알고 있다면 작품 속 인물들이 문제없이 독자들을 이끌어 줄 것이다.



특히나 이 책은, 이러한 ‘적당히 알고 있음’의 재미를 상당히 끌어올려주는 작품이다. 저자 R. 젤리 클라크는 앞서 언급했듯이 현실과 마법 사이에서 정말 감질맛 나는 줄다리기를 한다. 나는 소위 말하는 ‘서구식 공포 클리셰’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니까, ‘귀신인 듯 사람인 듯하다가, 사실 이 모든 건 크리스트교에서 형상화하는 악마의 소행이었습니다! 악마는 진짜에요!’하는 내용들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에도 그러한 ‘클리셰’가 등장한다. 하지만 클리셰를 잘 이용한다면 그건 참신함이 된다. 이 작품에서 KKK단은 ‘악마 같은 놈들’이 아니라 ‘진짜 악마’다. 정확하게는 사람도 섞여있고, 크리스트교의 악마보단 지구 너머의 괴물들이지만, 현실 속 비유를 소설 속 참으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현실에 실존하는 영화인 〈국가의 탄생〉이 소설 속 세상에선 악마를 끌어들이는 기폭제가 된다는 점도, 주인공 마리즈의 동료이자 함께 ‘악마’와 맞서 싸우는 인물 ‘셰프’가 역시 현실에 실존했던 흑인 부대인 ‘할렘 헬파이터’ 소속 참전용사라는 설정도 작중 내내 이 캐릭터를 설명하는 아주 훌륭한 경력이 되어준 점도 작품의 재미를 끌어올려주는 요소가 되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간의 경계를 허물며 현실의 ‘비유’가 ‘누군가’에겐 비유가 아닌 현실 그 자체라는 풍자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반부에 ‘민담 속 존재가 사실은 실존한다’는 클리셰 장치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다가왔다. (여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 클리셰가 클리셰답게 느껴지지 않았던 독자의 무지가 한 몫 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현실을 환상으로, 환상을 현실로 비틀며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하는 부분은 바로 ‘증오’라는 것이다. 이 지점이 이 책에서 마리즈와 함께 뜨겁고 휘몰아치는 액션이 펼쳐지는 전장을 활보하던 독자들로 하여금 우뚝 멈춰 생각해볼 여유를 주는 때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이 작품은 단순한 ‘오락거리’같은 책만은 아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기면서부터 철저한 피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흑인들에게 KKK단이 ‘인간’이 아니라 ‘진짜 악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그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도륙내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증오의 대상을 죽여도 되는 ‘정당한 사유’가 생겼고, 나에겐 그럴 ‘힘’이 있다면,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증오는 폭력적인 복수로만 파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하나의 정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 1920년대 미국의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만 던질 수 있는 질문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마리즈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책의 결말부를 확인해보길 바란다.



이 책이 ‘증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무겁고 철학적인 책이라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듯, 현실과 환상을 기막히게 적절히 섞은 소재와 시원시원하고 짜릿하며, 마치 클로즈업과 롱테이크가 펼쳐지는 듯한 묘사는 분명 활자를 읽고 있음에도 독자들의 머릿속에 ‘넷플릭스’가 펼쳐지게 해 준다. (넷플릭스 영상화가 확정되었다니,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 묘사가 혹자로 하여금 잔인하고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소설에서 영상 같은 생생한 속도감을 원하는 사람에겐 주저 없이 추천해주고 싶다. 그렇기에 이 책은 영상화에 최적화 된 문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기대 중이다. 링샤우트같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가 지식이 없는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영상으로 표현된다면, 다시 나의 지평을 넓혀주며 이 책을 잡고 첫 장을 읽기 시작했던 그 때로 돌아갈 것만 같다. 그 전까진, 나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이 드라마를 즐겨야겠다.



끝으로, 오늘도 이 멋진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 황금가지 출판사에게 감사 인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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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내 유튜브 알고리즘 좀 이상해 - 정체불명 괴담 테마 단편집 구구단편서가 6
일월명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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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 제목부터 우리 일상에 너무나도 맞닿아있는 용어들이 시선을 끈다. 필자 역시 이 제목에 흥미를 느껴 이 단편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튜브를 이용하다 보면 도대체 무슨 원리로 내가 좋아할 영상으로 난생처음 보는 주제의 영상들을 추천하며 들고 오는 건지 궁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이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 그 추천 영상들을 별 의심이나 불만 없이 보고, 오히려 의외로 정말 취향에 맞아 만족스럽게 시청하곤 한다. 종종 댓글 창에 알고리즘이 날 여기로 불렀다류의 댓글이 많은 추천을 받으며 상위권에 있는 걸 보면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런 맥락으로, 내 유튜브 알고리즘 좀 이상해의 단편들이 전부 이 유튜브 알고리즘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같은 이름의 작품이 표제작이 되지 않은가 싶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저 필자 안의 알고리즘재밌어 보여서무모(?)하게 선택했던 이야기들이었는데. 수록된 작품들 하나하나 전부 거를 타선 없이 만족스러워서 마지막엔 이 페이지가 끝이라는 사실에 아쉽기도 했다. 혹시라도 필자처럼 알고리즘에 이끌려이 책을 찾아왔다면, 댓글 창에 알고리즘에 이끌려 이 영상을 봤고,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글을 먼저 적어 주기 위해 부족하게나마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괴담들은 전부 각양각색의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심지어 같은 작가의 작품일지라도), 묘하게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작품의 소재가 불특정다수의 독자들도 흔히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을 비틀어버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시작해서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헤매던 기억, 메일로 받는 군대와 관련된 사연, 힘든 일상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위해 꺼내오는 달걀, 수학(또는 숫자 그 자체), 무기력증이나 우울증, 또는 번아웃 등으로 지쳐버린 나날로부터의 도피 욕구, 장롱의 어둠 속에 대한 상상과 덕질을 위해 특정 분야를 파고들던 경험, 혼자 있을 때 정체불명의 소리를 듣는 경험이나 죽음과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까지. 이러한 소재만 쭉 나열해보면 여느 일상을 나누는 에세이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결국 괴담집아니던가. 작품들은 모두 앞서 나온 일상사이로 파고들어서 그 깊은 곳까지 들어가 비틀어버리며 독자들이 이 뒤틀린 일상으로부터 결국엔 위화감과 공포를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의 작품들이 괴담이라 분류될 수 있는 이유도, 분명 안전한 영역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상에서부터 일어나는 기이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흔히 공포나 괴담과 관련된 창작물들을 생각해보면, 주인공은 꼭 누가 봐도 수상하고 무슨 일 있어 보이는 공간에 제 발로 찾아가서 들쑤시다가 결국 화를 입지 않는가.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런 법칙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어느 순간 뒤틀려버린 자신의 일상에 발이 빠져버린 셈이었다. 이 점으로부터 독자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겪은 일상이 기이한 사건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러니까 독자 자신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겪었던, 그들과 같은 영역으로써 발을 걸치고 있었던 이 기억들, 이 안전지대가 침해당한다는 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여타 다른 괴담들보다도 더 크게 와 닿게 하고, 그것으로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작품의 두 번째 공통점은 이러한 독자로부터의 도전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바로 메타적 서술이나 연출을 활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스크린이나 무대 너머의 관객의 존재를 인식하는 제4, 또는 제3의 벽을 깨는 연출들에 특히 더 열광하고 이입하곤 한다. 어디까지나 작품 속의, 다른 차원의 존재에 불과했던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이 그 너머 한 차원 위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그들의 이야기 속에 이제 관객들도 포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은 괴담류에서도 흔히 사용된다.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귀신이나 살인자가 갑자기 카메라를 바라보며 너도 봤지?’다음은 네 차례야와 같은 대사를 한다던가, 인터넷 괴담 등에서 결말 부분에 갑자기 이 기이 현상은 이 글을 읽는 순간 옮아간다는 사실을 밝힌다던가, 아니면 이 글의 독자들도 공범이나 사건의 목격자’, 심지어 다음 희생자로 낙인찍는 등의 연출들은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메타적 연출을 정말 좋아하는지라, 각각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 필살기들은 필자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좋은 의미로) 독자가 직접 한영 변환으로 구절을 쳐봐야 끝나는 이야기부터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는 장치가 숨어있다고 설명한 저주를 아무 경고 없이 독자에게 그대로 보여준 이야기, 실화라고 거듭 강조한 이야기 등 생각지도 못한 공격(역시 좋은 의미로)’을 받았단 감상이었다. 심지어는 실제 이 작품을 쓴 작가에게 메일이나 편지를 보내서 그것을 실었다는 말이 너무 그럴듯해서 정말 그랬는지 작가의 sns 계정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덕분에 이 자체가 소설이었고 필자는 그 소설에 속았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전혀 기분 나쁘진 않고 오히려 속아 넘어가서 정말 즐거웠다. 그러니까 이 책의 괴이들은 책이라는 수단으로 그들의 모습을 한 차원 너머에서 구경하고 있던 위치였던 독자들의 존재를 분명히 인지하고 우리들도 그들의 괴담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연출들을 통해 갑자기 소설현실의 거리가 마치 멱살이 잡힌 듯 훅 끌어당겨지며 가까워지는 경험을, 이 작품을 읽으며 꼭 경험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품집의 이야기들은 이처럼 끊임없이 픽션논픽션의 경계를 그들의 일상을 침투하는 방식으로 허물며 독자들에게 공포심을 선사한다. 솔직히 이러한 소설의 도전에서 이 책이 끝이 났다면 필자는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읽었다, 신선했다 정도로 생각하고 금방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편선의 마지막에 위치한 이야기는 마치 놀란 독자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듯, ‘괴이라는 것이 여태 등장한 녀석들처럼 마냥 두렵고 사람을 해하려고만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나아가 과연 이 초현실적인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따뜻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필자는 오랫동안 이 작품들을 곱씹으며 그 여운을 즐겼다. 조금은 오싹할지라도, 우리의 일상을 뒤틀어버리는 것일지라도, 결국엔 우리 일상의 일부로써 언제든지 있는 것이 이 괴이’, 또는 기이라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이 제4의 벽을 허물면서까지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간다. 그들도 우리 일상의 일부이고, 우리도 그들 일상의 일부라는 것. 그렇게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일상이 아닐까.


여러모로 편하게 읽기 좋은 단편집이었단 감상은 변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길이도 상대적으로 짧은 단편 소설이니, 바쁜 일상 틈바구니에서 우리 일상의 그림자를 짬짬이 만나보려면, 이 책이 제격이 아닐까. 짧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결코 짧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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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시가 된다 위대한 도시들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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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의 이름을 대라면, 뉴욕은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마 제일 먼저 언급될지도 모른다. 미국의 수도를 묻는 퀴즈에 항상 함정으로 등장하는 것이 뉴욕일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정작 이 도시의 명성에 비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저 '유명한 도시' 정도로만 아는 것이 다 인것 같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마블 코믹스> 히어로들의 무대가 되는 바람에 항상 기상천외한 빌런들의 희생양이 되는 곳 정도랄까. 


그러고보니 이 N.K.제미신의 신작도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 유명한 <마블 코믹스>와 지향점은 같다고 볼 수 있겠다. 주인공들의 목표가 뉴욕을 노리는 악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내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여타 다른 '히어로물'을 생각하고 책을 펼친다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도시가 된다>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뉴욕을 지켜야 하는 건 맞지만, 그건 그들이 '히어로'라서가 아니라 -제목에서 대놓고 알려주고 있듯- 그들이 도시, 그러니까 뉴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인공들은 모두 뉴욕의 다섯개의 자치구인 맨해튼, 브루클린, 브롱크스, 퀸즈, 스태튼 아일랜드가 인격화된, 도시의 '화신'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개개인은 각자 도시의 이미지와 사회성을 집약시켜놓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뉴욕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나로서는, 이 신선하고 대담한 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뉴욕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지만 흔히 뉴욕의 캐치프레이즈로도 불리는 '자유의 도시'라는 말이 얼마나 편협적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재산을 갖춘, '중산층 백인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이라는 필터에 필터를 거쳐야만 비로소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뉴욕에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뉴욕 거리 한복판에 서서 10분 동안 거리를 지켜본다면,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인종은 장담컨데 백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종의 혼합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다 시스젠더 이성애자라곤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는 언제나 저 '특권층'을 주목하고 그들에게만 마이크를 쥐어 준다. 뉴욕이 저 '자유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이유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뉴욕과의 첫 대면을 제미신으로 하게 된 걸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나는 솔직한, 진짜 뉴욕을 맛본 것 같다. 


작가인 N.K.제미신도, 독자인 나도 뉴욕의 '특권층'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독자인 나는 1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을 읽을땐 기본적으로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며 읽는다. 주인공이 남성이라면, 그리고 그가 이성애자라면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 전반엔 나와 같은 이러한 냉소와 비판이 직접 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만 잡아낼 수 있는 솔직함으로 한층 더 무장하여 진하게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스스로도 웃기긴 하지만, 토종 한국인인 독자는 뉴욕의 화신들이 뉴욕을 구하는 내용의 책을 읽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인물들의 찰진 욕설로 인해 나오는 피식거림은 덤이었다.) 당연하게도 뉴욕엔 시스 헤테로 백인 남성만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뉴욕의 화신들은 전부 뉴욕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다. 슬럼가 흑인, 미성년자, 여성, 성소수자 등 '진짜' 뉴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도시를 위협하는 집단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낼 사명을 받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컨텐츠들이 특권층의 입맛대로만 생산되었다는걸 새삼 실감했다. 


이렇듯 그동안 주인공이나 히어로가 되지 못했던 집단이 '영애로운'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면, 반대 집단도 이번 기회에 '악당 괴물'을 해보는 편이 공평하지 않을까? 그렇다. 이 다채로운 뉴욕을 위협하는 자들의 '퍼스널 컬러'는 하얀색이다. 그들이 인간들 사이에 숨어들어 도시를 멸망시키려고 할 때 '화신'삼아 잠식하는 사람들도 모두 백인이다. 그리고 이들이 도시를 위협하는 수단도 촉수인데, 사실 작중에도 대놓고 등장하긴 하지만 이것은 아무리 봐도 미국의 위대한 차별주의자 H.P.러브크래프트를 노렸음이 자명해 보인다. 여러모로 다문화 사회의 상징인 도시 뉴욕을 좀먹는, 물리쳐야 할 '악당', '괴물'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이 도시의 '생명'을 이루는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작가 제미신이 작정하고 세상에게 선언하기 위해 탄생한 책이 아닌가 싶다. 장담컨데, '중산층 백인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그 어떤 배경을 가지고 어디에서 살든 재밌게 즐길 수 있을것이다. 물론, 소설은 소설일 뿐이니까, 그리고 워낙 시원시원하게 독자들을 플롯으로 이끄는 필체와 생생하고 탄탄한 묘사력을 가진 제미신의 작품이니까, 세상에 딱히 불만이 없는 '당사자'들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좀 찔렸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도시가 된다>는 전적으로 '현실적인', 하지만 비현실적인 히어로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평소 마블 컨텐츠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최근엔 마블 또한 다양성을 담으려 노력하는 시도를 꾸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계열로 느끼며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흑인인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되어 영화 주인공으로서 연기를 했던 순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 소회하는 배우의 인터뷰가 최근까지도 나오고 있는 와중에,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빨리 '컨텐츠 비주류'들의 비상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특별한 작품이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루빨리 후속작이 나와 이 솔직하고 영웅답지 못한 영웅들의 활약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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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까 되게 이상한 꿈을 꿨어요 - 코코아드림 기묘한 공포 단편집 구구단편서가 3
코코아드림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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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구단편서가 규칙괴담 단편집 <에덴브릿지호텔 신입직원들을 위한 활동지침서>에서 기묘한 괴담들을 선보여주신 코코아드림 작가님의 단편집이 나왔다는 말에 흥미를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이전 규칙괴담에서도 생각했지만, 정말 '전자책'과 '인터넷'이라는 특성을 잘 활용하는 작가님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의 괴담들 찾아 읽는거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정말 만족스럽게, 어쩌면 남은 쪽수가 얼마 남지 않을수록 아쉬워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저부터가 그러했으니까요!) 인터넷 게시판, 인터넷 기사 등의 형태로 그 형태에 잘 맞는 이야기를 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스토리의 퀄리티도 여느 인터넷의 '레전드 괴담 썰' 못지 않게 기묘합니다. 굳이 괴담 읽는다고 여름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요.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읽다보면 어느새 여름날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밤새워 괴담을 읽던 그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크롤 형식으로 읽을 수 있다면 200%의 몰입도 장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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