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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의 정치학 - 왜 진보 언론조차 노무현·문재인을 공격하는가?
조기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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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지긋지긋하다.

정말... 속되게 말해서 이 놈이 이놈같고, 저 놈이 저 놈 같은.

게다가 보이는 것은 늘 주먹다짐에, 고성방가, 남을 비판이 아닌 비방으로 깎아내리는 모습들 뿐.

그 결과 나는 부끄럽게도 정치와는 가깝지 못하다. (투표는 늘 하지만...)

최근 국정농단, 최ㅅ실게이트와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아무리 정치와 멀어졌다지만, 신경을 안 쓸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이 ... 참.. 살기 힘들다.


이것 저것 찾아보긴 했지만, 워낙에... 예전부터 언론을 신뢰하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수용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는 것 같았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치에 대해서도 공부를 좀 해야겠구나, 그래야 엉망인 언론 사이에서도 알아서 정보를 좀 추려낼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생각만 해도 막막한 것이.. 누가 옆에다 날 끼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눈을 가르쳐 줄 것인가. 그러던 중 위즈덤하우스 출판사 블로그를 알게 되고, '왕따의 정치학'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사실, 책일 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정치에 문외한 이었던 나는 여전히 정신이 없다.

이 책만으로 정치를 깨우치겠다!!!하는 헛된 희망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왕따의 정치학을 집필한 조교수님(호칭 정하기가 어려워서 교수라고 통칭하기로 했습니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헐렁하게 읽어도 워낙에 다양한 사례로써 접근을 해주셨기 때문에 그는 캐치를 할 수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 책에서 나는 몇가지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었다.

왕따, 언론, 포퓰리즘.

이 세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진보와 보수 같은 단어도 많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개념들이 거의 위 세가지 단어의 내용에 빠지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제외했다.


위의 세 단어는 요즘 심심치 않게 들리며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는데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나는 이 세 단어가 꽤나 문제를 담고 있는 단어라고 느낀다. 요즘 자주들 쓰는 말을 빌려쓴다면, 부정적인 느낌적인 느낌이 든달까.

나는 글 첫머리에 언론을 믿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 이유는 기자가 자기 입맛에 맞추어 인터뷰의 내용을 비틀고 과장하고 허위의 느낌까지 더해 기사를 뱉어내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진보성향의 언론이든 보수성향의 언론이든 결국 다 똑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면접을 준비하기 위하여 신문 기사들을 모조리 훑어보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하나, 두 개 생겨나기 시작했다.

1. 하나의 기사 혹은 주제를 가지고 돌려막기 하는건가.

2. 대체 보수/진보성향의 언론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물론 하나의 이슈가 있을 때 그것을 주제로 다양한 관점에서의 기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것이 아무리 비약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하나의 관점에서 나온 여러가지 기사를 읽는 것보다는 다양하고 심층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은 내가 진보언론이라고 들었던 신문이든, 보수언론이라고 들었던 신문이든 관점이 매 한가지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도 기사가 언제 업로드가 되었느냐, 누가 썼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대체 이럴거면 보수, 진보는 왜 나눴지? 싶은 기사가 많다. 그만큼 관점은 한 쪽으로만 편향되어 있고, 국민들은 그 편향된 기사만을 접해 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이런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의도치않게 이 왕따의 정치학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조교수님은 여러가지 이유로 대답해 주고 있다. 그 중 몇가지를 보자면, 1.진보언론의 양심 결벽증, 2.시간과 재정이 부족한 진보언론의 열악한 업무환경, 3.스톡홀름 신드롬, 4.언론권력의 사유화 등이 있는데, 나는 이 몇가지 중에서도 특히 1과 2사유에 대해서 꽤나 비딱한 마음이 든다.

2부터 꼬집어 보자면 진보언론은 보수언론보다 기사로 낼 어떤 사항에 대하여 연구하고 생각할 시간과 재정이 부족하다. 그래서 보수언론이 짜놓은 틀을 가지고 진보언론이 기사를 써 낸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무리없이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적으로 긍정해 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진보, 보수언론은 각기 관점이 다르고 대변하고 있는 관념이 다를텐데 같은 틀로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뱉어내는 것은 왜 굳이 자신들을 '진보언론이다' 하면서 선을 긋고 있는지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조교수님이 왕따의 정치학에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정치권의 왕따와도 관련이 되는 이야기이다. 이 왕따와 관련된 이야기는 사유 1을 꼬집을 때도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단어가 '왕따'라고 볼 수 있다. 왕따이야기는 그만큼 모든 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왕따 이야기는 뒤로 돌리고 1의 사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 하고 왕따의 이야기는 뒤로 밀어두겠다.

두번째 '진보언론의 양심 결벽증'은 진보언론에서 기사를 내는 사람들의 결벽증에 관한 내용이다. 명문대를 나와서 사명감 하나로 진보언론에 들어왔기에 자존심이 강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양심이 강하다보니, 자기편을 옹호하는 것을 그 사명에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해 자기편에 더욱 엄격한 이중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면 "팔이 안으로 굽지 않고 의도적으로 팔을 밖으로 굽힌다는 생각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의 솔직한 심정은 '그러다 결국 팔이 부러진'였다. 팔은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을 아무리 양심 결벽증이라고 이유를 대더라도 의도적으로 팔을 밖으로 굽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다보니 결국 그 이중잣대는 진보언론만의 관념, 관점을 아무짝에 쓸모없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진보언론이 말만 진보지, 보수언론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내가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 결과 위에서 잠깐 나왔던, 결국 정치적 왕따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왕따 이야기에 앞서 잠깐 포퓰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포퓰리즘(populism).(←단어 클릭하시면 백과사전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나도 이런 어려운 정치적인 단어는 모른다. 하지만 뉴스에서 왕왕 나오는 단어이고 요즘 피할 수 없는 단어임에는 분명하다.

트럼프 정치에 대해서도 그렇고, 프랑스 대선에 관한 뉴스에서도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포퓰리즘이란 링크로 걸어놨지만 정말 간략하게 말하자면 단어의 어원(pop)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중의 생각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치적 활동이라고 한다. 간략한 의미한 보면 국민의 생각을 대변하고자 하는 정치적 행동이니까 딱 좋아보일 수 있지만 포퓰리즘이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이 사상이 그리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일 것만은 아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모든 일은 앞과 뒤가 있듯이.

이 대중적인 호소와 반(反) 엘리트엘리트주의 적인 사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트럼프다.

인종차별적 발언과 이민자를 배척하는 발언으로 백인 노동자층을 흔들어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 지도층의 잘못을 감추고 화살의 방향을 힘없는 이들에게 돌림으로써 지도층의 정책때문에 고통받던 대중의 호소를 이끌어내는, 그때문에 미국사회도 한참 정신이 없다. 이처럼 포퓰리즘은 '대중의 생각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와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한편으로는 기회주의에 편승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이용된다는 뒷면이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거 때마다, 그리고 정치권에서 늘 포퓰리즘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중에게 퍼트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그 언론이..... 위에서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 될테지만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깨어있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은 누가 말했을까. 정말 딱, 맞는 말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언제나 정신이, 현상을 보는 눈이, 판단력이 날카로워야 한다. 그래야 단순히 깨어있는 상태가 아닌, 죽어있는 상태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깨어있는 국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되돌리면,

깨어있는 시민은 편향된 언론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으며, 비현실적인 정책으로 대중을 뒤흔드는 포퓰리즘적 세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누가 대중을 위한 정치인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치권 내의 왕따가 언론으로 인하여 만들어지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대중에게 비춰진다고 한들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이다.

'왕따(집단 괴롭힘)'라는 단어는 일본의 이지메와 유사한 성격의 사회적 현상이다. 왕따는 흔히 어린 학생들 사이만의 문제로 알려져 왔었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학교, 직장, 사회에까지 만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조교수님은 왕따의 정치학에서 정치권 내에서도 왕따가 있으며, 언론을 통하여 왕따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그 피해는 왕따 피해자 뿐만 아니라 언론을 접하는 국민에게까지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왕따의 피해자가 누구인지는 책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으니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다.)

왕따라는 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질문을 해보고 싶다.

'당신은 왕따를 당해 본 적이 있는가?',  '왕따 피해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나는 왕따를 당해본 적이 있다. 내가 당할만 해서 왕따를 당했을까?

어렸을 때 나는 체구가 작고 마른, 그래서 늘 앞자리에 앉는 학생이었다. 그것도 교탁 바로 앞자리.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교탁에 자리잡는 선생님과 의미가 없(오늘 몇 쪽 할 차례니?와 같은)더라도 대화가 잦았고, 거기다 나는 성적이 꽤 좋은 학생이었다. 그리고 성격적인 면으로는 친구들과 운동장을 뛰놀거나 자전거로 동네를 누비는 라이더(!)일 정도로 놀기 좋아하는 활달한 학생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반의 일부(반 전부가 편승한 왕따는 아니었으나 대부분은 분위기 상 방관자) 무리로부터 무시가 시작되었고 학교에 있는 시간은 그저 몇 몇의 친구(방어자 역할을 해주었던)와 지내며 왕따에는 무시로 일관하여 대응을 하지 않고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는 시간이 되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복수의 화신이 아닐까 스스로도 생각했을 정도로 나와 내 주변을 건드리는 사람한테는 그닥 좋은 성격이 못 된다.ㅎㅎ 게다가 칼 같이 자르는 성격은 친한 친구들도 무서워하는 성격임을 덧붙인다).

왕따를 당하더라도 이유나 알자 싶어서 한 번은 왕따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앞자리에서 선생님께 예쁨 받는 성적이 좋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왕따를 당한 것이다. 딱 그 이유라고 가해자는 말했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참 유치하고 어이가 없다.

그럼 지금 다시 질문을 해야겠다. 내가 왕따를 당할만 해서 왕따를 당했을까?

대답은 NO다.


아무튼 내가 당한 왕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자랑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왕따의 정치학에서 왕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따의 이유에는 여러가지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왕따는 당해도 쌀(?)만한 이유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것도 있지만, 주로 피해자가 자신(가해자)과는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왕따를 시키는 경우가 많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당해도 싸다 싶은 이유가 있는 경우에 사람들은 대부분 아예 엮이고 싶지 않아서 회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보이고, 그것도 나름 왕따라면 왕따라고 볼 수 있지만 정작 이런 경우의 피해자는 자신이 왕따를 당한다는 자각이 없어 보인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경우는 피해자가 가해자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왕따를 시키는 경우이다.

말수가 적다거나 키가 작다거나 몸집이 작다거나 혹은 살이 쪘다거나 못생겼다거나 건강하지 않다거나 소심하다거나 등등 많은 이유가 있다. 내가 지금 나열한 이유는 가해자가 주관적이긴 하지만 피해자를 자신의 '아래'로 볼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럼 왕따에는 이런 이유만 있을까. 나의 경우에서만 봐도 그것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도 왕따를 시킬 수 있다. 흔히 '시샘, 질투'로 인한 왕따다. 이 경우는 누가봐도 유치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는 그만큼 자신이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단순히 피해자의 노력에 눈을 감고 자신의 잣대로만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나도 노력해!'라고 항변한다고 해도 그 노력은 노력끼리 비교했을 때, 혹은 수치로 따져보았을 때 동등하고 알맞은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노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노력은 비교할 필요도 없이, 노력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를 다시 되돌리면, 자신과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순수하게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왕따를 시킨다는 것이다.

조교수님은 정치권에서도 그런 왕따가 생겨났다는 것이고, 그 왕따의 피해자는 당해도 싼 이유가 아니라, 가해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우수하기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보언론은 자신의 양심 결벽증 때문에 피해를 더욱 가중시켰고, 그 결과 방어자 하나 없는 피해로 인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본다.

(이런 양심 결벽증은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되돌릴 수 없는 결과'의 죄책감은 언론에게도 있어야 하지만, 그 언론과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국민에게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이 죄책감은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이고, 깨어있는 시민이 더욱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단순히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가 죄책감 뿐만은 아니다. 우리는 꿈을 꾸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올바른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국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여지껏 정치에 문외한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던 내가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선거만큼은 거르지 않았던 만큼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무관심으로 응대를 할 것이 아니라 내 속이 터져나간다 욕하면서라도 정치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두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왕따의 정치학을 한 번만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읽으면서 그 뜻을 파악하고 새길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 그리고 왕따의 정치학을 끝이 아닌 시작으로 삼고 더욱 날카롭게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 위즈덤하우스에서 해당 도서를 제공받아 독서 후 작성한 주관적인 후기임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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