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한옥에 살다
이상현 지음 / 채륜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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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외국인 친구와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갔던 적이 있었다. 800여 채의 한옥이 모여있는 그림같은 풍경 속을 거닐며 우리는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한옥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꽤 난감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냥 '한옥=자연미, 곡선미' 등의 주입된(?) 공식으로, 민족적 자긍심으로 한옥이 아름답다고 여겼지, 왜 아름다운 건지,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곰곰히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이런 책으로 미리 눈을 틔우고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내 경험에서도 그랬듯, 우리는 그냥 쉽게 한옥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삶과 가치관을 한옥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대부분 한옥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책날개의 지은이에 대한 소개글에서 '한옥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한옥 목수 일까지 배웠다'가 더욱 강하게 남았다. 몸으로, 마음으로 한옥을 품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쓴 책답게, 충실하게 밀도 있게 읽힌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한옥에 대한 지은이의 애정과 열정에 나도 전염되는 기분이 든다.

 

책은 미학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무척 흥미롭고 공감가는 내용이었다. 인문학적인 가치, 미적 태도를 서양과 달리할 수밖에 없게 한 한옥의 특성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준다(지은이가 한옥에 대한 강의로 명성이 높다고 하던데,과연!). 특히 한옥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고전미학이 아닌 현대미학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대상에 속해 있던 아름다움을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 놓은'(41쪽) 변화 속에서, 엄격한 비례미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비례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새로움이 중요해진 현대적인 관점과 한옥의 미가 통한다는 사실이, 시간을 뛰어넘어 그렇게 연결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의 지은이는 생각의 고리들을 연결짓는 마술사같다. 한옥을 끊임없이 여러 인문학적인 주제거리들과 연결시키고 다채로운 사유로 확장해간다. 그 연결고리들을 따라 함께 나아가는 여정이 즐겁기만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아름다움의 세 가지 형식에서부터 세잔과 베이컨의 그림들, 플라톤, 니체, 하이데거, 칸트, 하이데거, 스피노자, 벤야민... 한옥과 연결되는 인문학적인 사유의 틀들이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다니. 우리 한옥을 접한 경험이 아마도 없었을 서양철학자들이 지은이의 상상력 덕분에 한옥과 끊임없이 만난다. 플라톤과 한옥이 통하기도 하고, 스피노자가 한옥의 숭고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칸트와 한옥이 결별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것은 벤야민은 그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건축은 시각적이기보다 촉각적이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활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에게 건축은 그런 의미가 강했습니다. 아마도 벤야민이 우리 건축 한옥을 보았다면, 흥분해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253쪽)

 

한옥은 자연의 속성을 인공적으로 해치지 않고 보존하는, 자연 자체를 담은 건물이라는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생활 속에서의 숙련이 흥으로, 대상의 상과 소통하면서 만든 형이 바로 예술이 되는'(250쪽) 우리의 한옥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책, 고맙다. 한옥은 단지 옛 조상들이 살던 집, 박제된 문화유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축적해 온 삶의 문화가 고스란히 깃들어있는 한옥의 소중함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이 보람있었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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