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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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산만한 작품이오. 나 브라스 꾸바스가 스턴이나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자유로운 형식을 취했는지, 아니면 이 책에다가 염세주의의 투정을 집어넣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오."...(중략)

브라스 꾸바스에 대해서는 아마도 삶을 두루 여행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10쪽, 저자 서문)

 

정식 이름 주아낑 마리아 마샤두 지 아시스, 헉헉... 이름 한 번 제대로 부르기에도 꽤 험난한 이 작가는 브라질 소설가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히며 세계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한다. 외국에서는 이 작가의 작품만을 논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정도로 많이 연구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번에 <창비세계문학> 시리즈로 처음 소개되는 터라, 첫 책장을 여는 마음이 두근두근 셀렌다.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아프리카 등 비서구권 문학의 성취를 조금씩이라도 야금야금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저 감동할 뿐.

 

책을 여니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1896년 3판 저자 서문 뒷장의 멋진 헌정사가 눈을 끈다.

"나의 차가운 시신을 가장 먼저 갉아먹은 벌레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기념품으로 이 사후 회고록을 헌정한다."

 

이 헌정사와 소설의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이 소설의 주인공 브라스 꾸바스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1장이 '저자의 사망'이니, '소설의 시작=주인공의 죽음'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1장에서부터 160장 '부정적인 것'까지, 총 160개의 장이 브라스 꾸바스의 이승에서의 삶을 찬찬히 잘 정리...해주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뭐랄까... 참 거침없고, 얽매임 없이 나아가는 이야기들, 그리고 과감한 형식. 독자들은 때로는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받기도 하고, 때로는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한마디로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어떤 사건을 잘 회고하다가도 옆길로 새기도 하고, 어떤 인물이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가 끝을 맺지 않고 그냥 멈춰버리거나 다른 상황으로 슬쩍 건너뛰기도 하고(그러면서 꼭 독자 핑계를 댄다), 아예 한 마디 단어도 없이 말줄임표만으로 채워넣은 장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떤 장은 '이 장은 129장의 첫번째 문장과 두번째 문장 사이에 삽입되는 것이 적당할 것'(270쪽)이라고 제시되기도 하고, 약혼녀 도나 에우랄리아 다마세나 지 브리뚜(이름 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그냥 그녀의 묘비명만을 소개하기도 한다. 다른 아무런 이야기 없이.

 

도대체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초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이 독특한 소설이 무려 1880년 작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도대체 이런 실험정신 가득한 작품이 27세부터 평생 관료생활을 했던 작가가 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여러 공직을 역임하면서도 그는 정력적으로 시, 연극, 연대기, 소설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작품을 썼다고 한다. 괴물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산만한 작품'이다. 너무나 바쁘고 항상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의 눈에는 그 산만함이, 그 산만함 속에 담긴 풍요로움이 참 경이롭기만 하다. 산만하고 수다스러운 문체, 어떤 것을 묘사할 때 완결짓지 않고 멈추거나 슬며시 다른 상황으로 순간이동하는 모호한 문체 속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겠다. 당시 브라질 수도인 히우지자네이루를 배경으로 한 노예에서부터 상류층까지의 다양한 인물들, 그 각각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한 내면의 심리를 담고 있는 산만함. 철학과 문학, 역사에 해박한 작가의 촘촘한 배경지식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산만함. 이 소설 덕에 나는 그동안 부정적으로만 여겨왔던 '산만하다'는 말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어는 1g도 모르지만, 딱 봐도 험난한 산으로 보이는 이 작품을 번역한 옮긴이의 노고에도 경의를. '현대적 의미로는 해석이 되지 잘 되지 않는 많은 어휘들과 문장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여기에 매우 독특한 그의 문체가 또다른 걸림돌이 되었다(309~310쪽)'라는 옮긴이의 한 문장은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담았던 말이었을까. 그런 땀방울 덕분에, 이렇게 그동안 다른 세상이었던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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