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읊다, 서사시 대백제 1881 함께 읽는 교양 13
강수 지음, 오순제 감수.해제 / 함께읽는책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적, 삼국 시대의 역사를 읽으면서 늘 동경과 찬미의 눈으로 봤던 나라는 단연코 고구려였다. 친구들과 함께,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광활한 만주의 영토가 우리 땅이었을 텐데 하며 울분(?)을 토했던 기억도 난다. 그에 비해 백제는, 뭐랄까 좀 유약한 이미지의 나라였고 상대적으로 삼국 중 가장 나의 관심을 적게 받곤 했다. 물론 크면서 단순한 땅 크기재기에서 벗어나, 백제의 훌륭했던 문화와, 일본에게 미쳤던 커다란 영향 등 백제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고 공주와 부여를 답사하는 기회도 몇 번 얻긴 했지만, 여전히 백제에 대해서는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았다. 다행히 이 책 덕분에 이제는 백제가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백제의 700년 역사가 생생하게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랄까.

 

이 책은 온조왕과 근초고왕, 그리고 의자왕과 흑치상지를 소재로 한 서사시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서사시를 이렇게 책으로 만나기는 상당히 드문 일인 것 같다. 서사시, 하면 바로 길가메시 서사시나,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자동적으로 떠오르는데, 우리 역사를 이렇게 서사시로 만나는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다(기념해야겠다.^^;). 아,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졸면서 배웠던 용비어천가도 서사시였지. 암튼 그건 자발적 독서의 범주에 넣을 순 없으니 패스.

 

고대사 중 특히 백제와 고구려에 관련된 사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한다. 그래서 지은이는 사료로 메울 수 없는 부분들, 역사서에 있는 문구 하나에도 너무나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붙어있는 그 틈들에 문학적, 역사적 상상력을 불어넣어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팩트 포엠(fact-poem) 혹은 역사시(history poem)라는 이 장르의 가능성은 앞으로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상상을 해가며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네 명의 인물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 인물은 흑치상지였다. 백제 멸망의 혼란 속에서 백제부흥운동의 선봉장에 섰으나 배신과 좌절을 경험하고 끝내 자결로 생을 마친 비극적인 인물.

특히 흑치상지와 장수들이, 당나라로 잡혀가는 의자왕을 향해 절을 올리며 가슴을 치고 울 때 나오는 ‘백제의 흙이 부르는 노래’, 그리고 당나라 황실의 모함을 받아 혹독한 고문을 받은 흑치상지가 전쟁터를 누벼 온 육십 평생을 떠올리며 자결을 한 후 이어지는 ‘백제의 바람이 부르는 노래’, 그리고 백성들이 부른 산유화 노래 가사에 특히 반했다. 이런 것이 역사에서의 문학적 상상이라는 것이구나 싶었다. 나는 흑치상지라는 이름을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역사시간을 기억한다. 아무런 감흥 없이 밑줄쳐가며 연도별로 외워야했던 그 역사적 사실이 뼈와 살을 얻은 느낌이다. 오늘, 진짜 흑치상지를 만났고 그의 야망에, 그의 번뇌와 아픔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야 이름만 박제된 그가 아닌, 진짜 그를 알게 되었다. 다행이다.

 

 

나는

흑치상지의 발자국을 가슴에 새기고 있지

그와 그를 따라다니던 백제 백성들의 발자국을 알고 있지

맨발에서부터 짚신까지,

손ㅂ닥만 한 어린아이의 발부터 상처로 부르튼 어른의 발까지,

피 흘르던 그들의 삶을 모두 가슴에 새기고 있지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몸이

썩고 문드러져서 나의 몸이 되었지

내 몸속으로 흘러든 그들의 피로

나는 그들과 한 몸이 되었지

모두가 잊혀져 가는 삶,

역사는 이긴 자들의 것,

모두가 승자(勝者)를 칭송할 때

나는 홀로 부르지

몰락한 자들의 노래를......

 

                                   -391쪽, ‘백제의 흙이 부르는 노래’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