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월(the hours)'이란 단어를 명확하게 어떤 식으로 개념짓는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 그 단어에 담긴, 개개인의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으로, 무거운 것으로 또한 어떤 이에게는 나날이 새롭고 환희에 가득 찬 것으로, 절망과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는‘시간과 세월’이라는 이 거대한 주제는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여류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이‘세월’의 의미를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어느 여자의 이야기(델러웨이 부인)를 통해 전달하였고, 20세기 말 미국의 작가 마이클 커닝햄은 그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또다시 새로운 ‘세월의 의미찾기’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작품 ‘세월(the hours)’이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위대한 작가와 경쟁을 했다는 식의 비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원작을 도구로 삼아 독특한 구성과 뛰어난 문체를 보여준 마이클 커닝햄의 작가로서의 자질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이 작품에서는 실제인물인 버지니아 울프와, 두 명의 여자인물(브라운, 클라리사)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살아가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 닿아있다. 문학의 추구와 현실사이에서 갈등하는 버지니아 울프나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브라운, 지나버린 추억에 묶여있는 클라리사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여자로서의 삶을 요구받고 있다. 그녀들은 일상의 사소함에 안주하려고도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고통받고 탈출구를 원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이 작품이 여성들의 문제, 즉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시간과 세월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사용한 많은 소재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원하지 않은 일상을 살고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면서 고민하는 것은 남녀노소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단순히 여성문제의 차원을 넘어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의 하루가 시간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담담하게 펼쳐진다. 어떤 놀랄만한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 긴박한 반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선택하고 포기한다. 여기에 버지니아 울프와 마이클 커닝햄의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소설기법을 만들어낸 버지니아 울프처럼, 마이클 커닝햄도 그녀의 작품만을 빌려다가 가공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문체와 글 쓰는 기법까지 이 작품에 사용하였다.

주인공 내부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관념들이 물 흐르듯이 펼쳐지고 독자들은 그것을 따라가며 그녀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에 재기 있는 대사나 아기자기한 스토리가 펼쳐지기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인공들의 심리를 짚어가면서 책의 내용을 음미한다면 비로소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피었다가 사라지는 주인공들의 내면세계를 읽다보면 나는 마치 물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기도 하였고 중간중간 책을 덮기도 하였다. 도대체 그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사소한 일상의 자잘한 부분에서 고민하고 고통받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넘긴 지금도 그녀들을 통해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다.

단지 그는 수많은 일상의 나날 가운데 세 명의 여자가 살아가는 단 하루의 모습만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하루 속에는 그녀들의 세월이 응축되어 담겨있다. 그 하루를 통해서 진정한 세월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작가가 바라는 것이리라. 서두에 말했듯이 ‘시간과 세월’이라는 주제가 복잡하고 어려운 만큼,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이 얻게 되는 세월의 의미 또한 각자 다양하고 주관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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