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아이리스 M. 영 지음, 허라금 외 옮김 / 이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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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으로서의 삶


들어가면서

 

세월호 참사 이후 TV에는 온통 이준석 선장 이야기뿐이었다. 살인죄를 적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처벌의 범위는 어디 까지 인가. 뭔가 찜찜했다. 이 구조적인 참사의 원인을 개인에게 몰아가는 사회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에서부터 거기에 열광하는 일반 시민들 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더욱 무기력해 졌다. 진도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희생자 가족의 슬픔은 찾을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언딘의 회장과 배의 선장이 주인공이 되어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아이들은 없었다. 그곳에는 공동체 모두가 마땅히 느껴야할 아픔과 슬픔이 없었다. 뉴스의 중립과 중심이라는 미명아래 배제되는 아이들의 슬픔이 나로 하여금 리모컨 버튼을 돌리게 했다. 슬퍼할 시기에 정작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는 슬픔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난 의문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히 개인의 잘못으로 발생한 걸까? 아니 좀 더 넓게 봐서 유병언과 그 일가의 자본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으로 봐야하는 걸까? 그렇다면 분명 난 이 비극에 죄도 없고 책임도 없잖아. 그런데 왜 슬프지? 아니 화가 나지? 단순히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감정인걸까?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인 생리현상일까? 이러한 의문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세월호를 심판하겠다는 선거의 구호도 귓가에 들렸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아픔이었으나 다른 누군가에겐 소음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300km 밖에서 목숨을 잃은 자의 애통함보다 내 자신의 안위가 소중한 것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다. 내 욕망이 중요했기에 세월호는 잊혀 갔다. 아니, 잊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피했던 것일 수도 있다. 불편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결국 나는 살아있으니까.

 

관성의 힘은 무섭다. 어릴 때 힘들어 했던 젓가락질은 24살이 된 지금도 못한다. 고칠 노력조차 안했던 건 아니다. 부모님 역시 이상하리만큼 젓가락질에 서툴렀기에 나 역시 그래도 되는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흉이 되었다. 다 큰 어른이 아직도 젓가락질 하나 못하냐고.

 

어른이 된다는 건 아마 관성을 벗어나는 일인 것 같다. 회사가기 위해 더 자고 싶은 유혹도 뿌리쳐야 한다. 대학 때 내일은 없듯이 마셨던 술도 내일을 위해 줄여야 한다. 사고 싶은 옷도 집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욕망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관성이라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욕망을 인지한 채, 참고 버텨야만 되는 것인가. 젓가락질에 있어서만큼은 나 역시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렸을 때 형성했던 내 습관과 그것의 편안함이 관성의 벽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개인에게 관성이 있듯이 국가, 사회에게도 관성이 있다. 봉건제 사회에서 부르주아의 출현은 관성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들은 시민사회를 조직했고 왕의 존엄을 위협했으며 귀족의 경제적 우위를 빼앗았다. 근대 국가의 탄생이었다. 조직된 시민사회는 민주적 가치를 탄생시켰고 자유로운 시장은 자본의 힘을 부풀렸다. 커다란 공장들이 도시 곳곳에 지어졌고 도시는 잘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경제적 지위가 곧 그 사람의 지위로 변했지만 공정한 경쟁이라는 포장지가 불편한 사실을 감추곤 했다. 이러한 인간 삶의 변화는 인간 삶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이 변하다 보니 자연 역시 변했다.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지배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나무는 베어졌고 공기는 혼탁해 졌으며 강은 더러워 졌다. 사람들은 이런 삶에 염증을 느꼈다. 분명 물질적으로 좋아졌으나 그렇게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 관성을 깰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에게 잃을 건 없으니 바꾸자’고,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끝은 좋지 못했다. 러시아에선 혁명이 일어나고 곳곳에서 ‘평등’을 외쳤다. 지나친 아동 노동은 금지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기계는 노동자의 적이 되었다. 파업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 역시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 해달라는 노력도 있었다. 조금씩 관성의 틀이 깨졌다. 어떤 국가는 복지 국가가 되었다. 또 다른 나라는 더욱 심한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젠 우리는 알고 있다. 저 관성 역시 언젠간 깨질 것이라는 것을.

 

해방 이후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관성은 두 개가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경제 성장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바로 위에 적이 있으니 나 역시 싸울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 몸집을 키우고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적에게 동조하는 사람들 역시 처벌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반공을 국시로 하고 경제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회를 유지하려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욕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생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다. 첫 번째 욕망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욕망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인간이길 욕망하는 인간이라.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성선설도 있었고 성악설도 있다.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물가에 빠지려는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도 하고 누군가를 때리기도 한다.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행동도 스스럼없이 하곤 한다. 그런 사람에겐 짐승이라는 칭호가 붙고 결국 우리는 그 칭호를 부끄러워한다. 복합적인 인간의 행동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 하겠지만 우리는 종종 선한 행동을 하며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길 원하는 증거가 된다.

 

대한민국 사회 역시 사회 구성원들의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켜줘야 했다. 우선 첫 번째 욕망은 의외로 빨리 달성했다. 70년대를 거치며 수출입 10만 불을 초과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경제 순위는 기존 국가를 위협할 만큼 솟아올랐으며 세계를 호령하는 굴지의 기업도 창출했다. 그러나 어두운 면도 존재했다. 성장을 우선시 하다 보니 소외되는 것이 많았다. 노동자의 파업권, 노동권은 무시해야만 했다.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는 인내심은 직장인들의 필수 덕목이었다. 물론, 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보다 많았기 때문에 노동자에겐 덕목이 아니라 위협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여성은 남성보다 심한 차별을 받았다. 더 좋은 능력과 품성을 지녔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제외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육아와 휴직은 곧 퇴직을 의미했다. 국가와 기업은 종종 이익을 함께 도모했다. 재벌이라는 새로운 용어도 만들었다. 언론의 힘도 필요했다. 대중을 선동하고 생각을 개조하는 일에는 언론만큼 쉬운 것도 없었다. 국가의 지원은 받은 기업은 검은 비닐봉지에 가려진 콩나물처럼 자랐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기업이라 불릴 수 도 없었다. 규모의 영세함이 곧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길 원한다. 노동자는 노동자로서 여성은 여성으로서 중소기업 사장은 중소기업 사장으로서 걸 맞는 행위양식을 누리며 살길 원한다. 하지만 지난 우리의 역사의 관성은 두 번째 관성은 무시해 왔다. 독재, 성장, 반공이라는 용어와 인격, 권리, 자유, 평등, 법치는 함께 공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번째 욕망은 물질과 성장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막혀버렸다.

 

관성은 언젠간 깨지기 마련이다. 단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노력했다. 우리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은 4월,5월,6월 그리고 수많은 달과 해를 거치며 팽창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신의 조악한 손으로 피를 내며 관성이라는 돌을 깨기 시작했고 마침내 돌에는 금이 갔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달성. 위대한 업적이었다. 87년 체제는 그 전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만들었고 오늘날 우리의 삶의 양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관성의 속성에는 안정감이 깃들여져 있다. 회사의 매뉴얼이 있듯이 우리 사회에도 매뉴얼이 있다. 관성은 사회의 매뉴얼을 조직하고 재구성한다. 분명, 매뉴얼을 따르면 효율적이고 두렵지 않다. 하지만 혁신되지 않은 매뉴얼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 폐기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합리성은 혁신보단 안정을 택한다. 편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지금도 계속되는 이 비극은 폐기되지 않은 매뉴얼에서 시작한다.

 

5년마다 이어지는 선거를 보면 웃지 못 할 공통점이 있다. ‘변화’이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대한민국을 바꾸는데 적임자라고 외쳐 된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을 자신이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병폐는 쓸어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는데, 신기하게도 대중은 그걸 믿고 따른다. 물론 믿지 않으면 어떻하겠냐만은 그건 시민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특정인에게 의지하고 초월적 존재를 기다리는 자세는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의 적절한 대처가 아니다.

 

이 책은 세월호 이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지난 역사의 관성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구태여 못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겠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시민으로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자세와 인식이다. 구조적 부정의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위선을 고발하고 싶었다. 죄와 책임은 구분하되 나 역시 ‘악’에 가담할 수 있는 평범한 시민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선장과 악덕 사이비 종교인에 책임을 돌리며 애써 침착한 척 하는 우리들의 일상이 역겨웠다. 내일 모래면 세월호 200일이다. 변한건 없다. 자식잃은 부모의 슬픔은 여전히 진도 앞바다를 서성이고 있고 우리들은 ‘안녕’하며 산다.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삶은 책임지는 삶이다. 개인이 저지른 실수를 책임지자는 것에 국한하자는 것이 아니다. ‘죄’만이 책임의 발생 동기임을 인식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관성이 어떻게 불합리한 구조를 양산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 그 불합리가 정도를 넘었을 때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는 것, 그리고 연대하며 책임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시민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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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펀맨 One Punch Man 1 - 일격
ONE 지음, 무라타 유스케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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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펀맨

 

[기존의 영웅물과는 다르다.] 이 문장은 국내 유명 서점 한줄 감상평에 가장 많이 실리는 내용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낸다]라는 진부한 표현에 무색하게 우리는 영웅에 열광한다. 공권력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회의 부조리가 만연했을 때 갑자기 어디에서인가 나타나 악의 무리를 해치고 유유히 사라지는 영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에서 영웅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다.

 

이 공허한 마음은 일종의 체념과 밀접하게 연관하고 있다. 현실 사회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정치라고 한다. 정치는 너와 나의 다름 속에서 무디고 더디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속도가 아니다. 비록 과정이 늦을지라도 충분히 합리적인 토론과 대화를 거쳤다면,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공허함은 오늘과 같은 정도일리 없다. 진정 문제는 그 과정의 부조리에 있다. 각종 이념 공세와 효율이라는 선전 도구로 중무장하고 이것을 받드는 각종 언론의 지원 속에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한다. 이러한 불합리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정치에서 이탈하고 일종의 메시아적 존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메시아적 존재의 추구는 여느 사회에나 있지만 유독 건강한 민주적인 사회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그 열망의 정도가 크다. 메시아의 강림을 원하는 것이 그토록 잘못된 것일까?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렇게 불합리한 사회라면 차라리 초월적 존재의 힘으로 이 사회를 재구성하면 더욱 좋지 않겠냐는 반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적절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초월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정한 민주주의 원칙과 반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 대화와 토론의 질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 없겠지만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함으로서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 내고 그 합의의 결과물을 받아드림으로서 사회는 진보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민주주의는 과정인 것이다. 비록 우리가 나아가는 길이 항상 올곧은 직선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수많은 부침 속에 결국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신념으로 이 사회는 지탱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 초월적 존재의 일방적 지위와 힘은 평범한 다수와 민주사회의 적이다.

 

이 대목에서 사이타마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강함에 대해 제자 제노스가 묻자 사이타마는 ‘ 내가 강해진 비법은 신인류니 개조니 따위에 있지 않아. 매일 팔굽혀펴기 100번, 윗몸일으키기 100번 스쿼트 100번, 그리고 10km 달리기를 3년 동안 매일 빠지지 않고 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하루 쯤 빼먹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을 몰아 붙여 극한의 나를 완성하는 과정. 바로 여기에 나의 강함이 있다.’

 

 원펀맨이 다른 영웅물과 다른 이유다. 그 노력의 결과가 다소 과장되어 보일지라도, 그 과장이 과정을 희미하게 만들지라도 사이타마는 꾸준히 주장해온 것이다. 나의 강함은 바로 노력에 있다고. 우리의 삶,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은 한 번에 바뀌지 않는다. 다소 버거워 보일지라도, 다른 길로 향하는 유혹이 강할지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근기, 노력에 우리의 향방이 달려있다.

‘ 내가 강해진 비법은 신인류니 개조니 따위에 있지 않아. 매일 팔굽혀펴기 100번, 윗몸일으키기 100번 스쿼트 100번, 그리고 10km 달리기를 3년 동안 매일 빠지지 않고 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하루 쯤 빼먹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을 몰아 붙여 극한의 나를 완성하는 과정. 바로 여기에 나의 강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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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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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삶은 글쌔 존재할까? 불어터진 라면의 면발을 바라보며 그것을 무심히 삼키는 자의 비애 속, 삶의 고귀성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세상에는 돈을 벌어야하는자와 그렇지 못한자만 있지 않은가. 우리네 삶의 비참함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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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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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경제는 경제가 아니다. 경제는 정치이다. 시대에 따라 인간의 요구에 맞춰 변화했다. 경제는 도덕이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지 않으며 이타적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경제, 우리의 삶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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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개정2판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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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는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주었다.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라는 환상을.노동이 소외되는 삶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단지 정치적 체제로서 바라볼 때 나타난다. 사회적 상태로서 민주주의를 바라볼 때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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