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우연한 시선 - 최영미의 서양미술 감상
최영미 지음 / 돌베개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머무는 곳은 어항이다. 그 곳의 유일한 틈은 책이다. 이는 나에게 지천의 것들을 보게 만든다. 세상에는 옳지 않음에 손을 드는 사람도 있으며 요상한 눈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책은 또 다른 것들을 나에게 일러준다. <화가의 우연한 시선>또한 나에게 다른 틈을 알려주었다.

작가는 그림에 대한 보편적인 해설이 아닌 그림에 담긴 비껴선 시선을 찾아내 보여주고 있다. 산우스레트 3세의 초상 속 권력을 가진 자도 고뇌하며 진지한 우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비단을 걸친 여성의 부드러움을 그린 그림 외에 펜과 칼을 든 여성의 강인함을 표현한 그림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진보를 내세운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또한 작가가 설명하는 그림에 여실히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남들의 시선에 묶여 있지 않은 작품들을 골라내서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이는 평범한 토를 달지 않아 문장 하나 하나 그녀의 뇌를 풀어놓은 듯 하다. 그리고 작가가 느낀 그대로가 나에게 전이되는 것 같다. 그녀가 선택한 그림 속 여성은 얼굴 없는 노동자이고 악기 대신 펜과 붓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스러운 마돈나 대신 관능적인 마돈나의 이미지를 가진 여성으로 나타나 있다. 저곳의 여성은 관념적임을 거부한다. 그리고 너의 목소리를 내라고 일러주고 있는 듯하다. 특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이 아닌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화가들은 변부의 것을 중앙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에 보았으며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화가가 대상을 비껴서 표현한 것을 작가는 대중의 시선이 아니라 개인의 시선으로 그것을 나에게 보여준다.

그 동안 나는 얼굴 없는 노숙자를 유심히 관찰한 적이 없었고 시시각각 변해 가는 공기를 느끼지 못했다. 빛과 어둠 사이에도 무언가가 존재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 내가 어항에 고인 물이라면 그것에 시선을 둔 화가는 흐르는 물이다. 흐르는 물은 물길을 바꾸어 놓는 법이다. 후에 나는 증발해 버려도 그들은 흔적이라는 물길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이제 흘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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