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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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청아한 문체.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일본작가 바로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중 소설 <웨하스 의자>를 읽었다.


2004년 12월 15일 초판

2021년 11월 10일 개정판


에쿠니 가오리는 동화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폭넓은 집필 활동을 해 나가면서 참신한 감각과 세련미를 겸비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그녀의 작품 중 거의 17년 만의 개정판 <웨하스 의자>를 만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의 철모르는 갓난아기다. "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솔직한 일기 형식의 51편 이야기를 통해 꽤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관계에 대해, 일에 대해. 절망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허용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여자 주인공은 중년에 접어들었다. 화가지만, 주 수입원은 스카프와 우산을 디자인하는 일이다. 다행히 그 일은 그녀의 생활에 안정을 선사해 준다. 그리고 애인은 있지만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다. 지금 사랑하는 애인은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을 하고 있다. 애인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다. 그는 차가 없어서 어디든 갈 수 있기에 그들의 사랑은 더 자유롭다.


여자 주인공의 가족은 엄마 아빠 그리고 여동생 이렇게 네 식구였다. 그녀의 엄마도 화가였는데 성공한 화가는 아니었지만 항상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 방에서는 언제나 그림 그리는 냄새가 났다고. 캔버스 위에서 마른 물감과 기름 먹은 천 냄새. 그리고 그녀의 아빠는 잡지사 기자였는데 집에서 일하는 때도 있었지만 취재하러 나간 채 며칠이나 돌아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족 구성원 여동생. 여동생은 얌전하고, 우등생이고, 나이보다 늘 어려 보였던 동생을. 남자아이처럼 머리가 짧고, 아빠 말을 따라 캐치볼을 했던 동생. 치아 교정기를 끼고 매주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고, 유치원복의 감색 베레모가 잘 어울렸던 동생. 지금은 회사에 다니면서 일단은 자립했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때로 남자를 데려오기도 하는 여동생.


"우리는 예전에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의 운명에 대해서.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소멸할 운명이리라. 우리 둘(주인공과 여동생)이, 우리 가족의 끝이다. 모두, 어디로 가 버렸을까. 복작복작했었는데, 모두 어디론가 가 버리고 말았다. 아빠도 엄마도. 나는 두 번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없다."


부모님은 차례로 돌아가셨고, 자매가 지금처럼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주인공과 여동생이 가족의 끝이 될 것이다.


"죽음. 아빠는 슬퍼해서는 안된다. 슬퍼할 일이 아니야라고 했지만, 애인은 죽지 않았으면 싶었다. 당신은 죽지 마. 나와 동생은 죽음은 평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죽음은 언젠가 우리를 맞으러 와 줄 베이비시터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의 철모르는 갓난 아기다."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 죽는다. 모두에게 공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 초연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는데, 그건 나 자신을 홍차 잔에 곁들인 각설탕인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쓰일 일 없는 각설탕처럼. 나는 대부분을 어른 옆에서 지냈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어른과 함께인 편을 좋아했다. 아마도 홍차 잔에 곁들인 각설탕으로 지내는 편이 성격에 맞았던 것이리라. 쓸모없는, 하지만 누구나 거기에 있기를 바라는 각설탕인 편이."


주인공과 애인은 여행을 계획한다. 해마다 8월이면 둘이서 열흘 정도 이 도시를 떠난다. 그들의 휴가, 그녀와 애인은 허브차를 마시고, 몇몇 도시에 대해서 얘기한다. 지금까지 가 본 몇몇 도시와, 그리고 언젠가 가 보고 싶은 몇몇 도시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은 여자 주인공의 미술 대학에 다니던 시절도 함께 추억한다.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지만 훨씬 형편없는 여자였다고 자신을 회상한다. 애인을 이렇게 말한다. '만나 보고 싶네 그 시절의 당신도' . 그들이 사귄 지 6년인데 순간 불쑥 그것이 찾아온다. 그것이란, 애인이 돌아가는 순간을 말한다. 돌아가는 길, 그녀는 신중하게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찾아 걷는다. 혼자서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몇몇 남자를 만나고, 사랑을 했다. 그림 그리는 학생, 미술상, 시장에서 일하는 남자. 지금 애인은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을 하고 있다. 허벅지가 아름답고, 살에서는 깊은 숲속 냄새가 난다. 나는 그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 아 한 명을 빼놓았다. 아주 짧은 사랑이었다. 그 남자는 어느 극단 멤버였고, 궁상맞도록 가난했다. 동그란 얼굴에, 교진 팬이었다. 아마도 언뜻언뜻 비치는 피로감에 이끌렸던 것이리라. 지방이 끼기 시작한 배에, 살기 힘들어하는 표정에. 착한 남자였다. 따끈하게 데워 설탕을 넣은 우유를 좋아했다. 아르바이트를 몇 가지나 했다. 그리고 헤어지자고 하자, 울어주었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색다른 과일처럼 독특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멀고 애매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녀는 일을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다른 것을 깨끗이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럴 수 있는 시간은, 기억하는 한 3가지 밖에 없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 나비를 잡는 시간, 그리고 눈 내리는 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웨하스였다. 바삭하고 두툼한 게 아니라, 하얗고 얇고 손바닥에 얹어만 놓아도 눅눅해질 것처럼 허망한 것이다. 잘못 입에 넣으면 입천장에 달라붙어 버리는. 사이에 크림이 살짝 묻어 있지만, 그것은 크림이라기보다 설탕을 녹인 페스토처럼 묽다. 얇고, 애매한 맛이 났다. 나는 그 하얀 웨하스의 반듯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약하고 무르지만 반듯한 네모. 그 길쭉한 네모로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 조그맣고 예쁜,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를. 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 그리고 당연히 의자지만 절대 앉을 수 없다."


의자이지만, 절대 앉을 수 없는 행복을 상징하는 웨하스 의자. 웨하스 의자와 같은 존재인 그녀와 애인은 7년 전에 처음 만났다. 전시회장에서. 애인은 그림을 한 장 사 주었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작은 화랑, 한구석에 놓인 테이블에서 다시마차를 마시면서 그림 얘기를 했다. 애인은 솔직한 말투에,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올바른 무게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그림에도 일본 그림에도 꽤 지식이 많은 듯한 애인과 사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문득 애인과 헤어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애인이 아닌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지만 애인과 살려 하면 그녀는 갇히고 만다. 관계에 대해, 일에 대해. 절망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허용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사랑 없이는 죽음이기에 절망이 따르는 사랑이지만, 오히려 절망을 품고 자기를 긍정하는 강인함이 있어야 지속할 수 있는 그런 사랑. 보편적인 사회의 시선을 넘어서야 하는 그 사랑의 결말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은 바로 다양한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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