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부자 이야기 2
박용희 글, 지현우 그림, 손영운 / BH(balance harmony)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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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해례본, 신윤복의 미인도, 신윤복의 풍속화 화첩, 김득신의 파적도(한적한 농가 마당에서 병아리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와 놀라 날개 치는 어미 닭, 황급히 고양이를 잡으려는 주인 부부가 묘사된 그림),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도(인왕산 자락에 있던 견재 정선 자신의 집 풍경을 그린 그림) 등 우리가 학창시절 훌륭한 우리 문화재들을 교과서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최근에 몽블랑(몽실북클럽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책 '경성탐정이상'이 계기가 되어 실존인물로 등장했던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이야기를 학습 만화로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동대문 DDP에서 열렸던 '간송문화전' 관람을 계기로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은 대략적으로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나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일대기를 읽게 되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지난 2020년 5월 뉴스에서 재정난을 겪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국가보물로 지정된 금동 불상 2점( "보물 284호 금동여래입상" 과 "보물 285호 금동보살입상" ) 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소식을 보고 깜짝 놀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경매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인데, 누적된 재정난에 어려움 겪다 불상 등 정리해 해소하려는 듯 하다는 기사들이 주를 이루었고 미술계에서도 "놀랍고 안타깝다"라는 반응이 대다수 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간송의 소장품은 5000여점. 모두 간송미술문화재단에 귀속돼 있는데, 이 중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국보에 대해선 상속세가 없으나, 그외 다수의 소장품에는 상속세가 붙는다. 이번 간송미술관이 내놓은 불상 2점의 경매 시작가는 각각 15억원 이었으나 결국 유찰되었다.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경매시장에서 팔린다고 해도 턱없이 부족할 거란 얘기다. 안타깝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꿋꿋이 견뎌내며 우리 문화재를 지켜왔던 진짜 멋진 부자였다. 99칸의 한옥과 10만 석의 재산을 가졌던 거부였으며,당시 한양과 경기도 충청도와 황해도에도 큰 땅이 있었다.한양의 어지간한 기와집 100채는 살 수 있는 재산이었다고 한다. 우리 몇 식구만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우리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식구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전형필은 두문동에 은거했던 고려의 남은 신하 72명 중 한 사람이었던 전오륜의 자손으로, 전형기의 둘째 아들이면서 전명기의 양자로 맏아들 이었다) 의 가르침이 전형필을 만들었다.

 

60대 위창 '오세창' -최고의 심미안 감식가 / 40대 춘곡 '고희동' -최초 유학파 서양화가 / 20대 간송 '전형필' - 하늘이 내린 거부!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는 일!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는 소중한 민족 문화재를 지켜 내는 일! 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3분이 만나 시대를 아우르는 예술적 계보를 통해 우리 문화재를 지켜냈던 것이다. 간송은 알려지지 않는 그림도 귀하게 여기며, 물건 값을 깎는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귀한 물건은 주인이 싸게 내놓더라도 더 주라고 했다고. 이외에도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일본으로 흘러간 문화재를 사들인 감동적인 많은 장면들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33년 친일파 송병준의 집 아궁이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화첩 ‘해악전신첩’, 고급 기와집 10채 값인 2만원을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덥석 주고 얻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 1000원을 부르던 거간꾼에게 1만 1000원을 쥐어주고 건네받은 뒤 눈물을 쏟았다는 ‘훈민정음 해례본’ 이야기. 그리고 1936년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경성구락부(한국 최초 미술품 경매회사)에서 경매에 부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을 두고 일본 최고 골동상과 벌인 ‘기싸움’이다. 1만 4580원까지 치솟았지만, 간송은 기어이 낙찰을 받아내고야 만다. 1937년에는 일본에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끌어오기도 했다.‘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전형필은 고미술품 뿐만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고, 고아원 양로원 지원, 생활이 어려운 지인이나 문화예술인을 꾸준히 도왔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후학양성에도 힘썼다. 안타깝게도 1962년 1월 26일 57세의 나이로 급성신우염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신기하게도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유족들 또한 그의 뜻을 이어 대부분 미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미술계에서 '간송학파'라는 갈래가 생겼다고 한다. 겸제 정선-추사 김정희-위창 오세창-간송 전형필-혜곡 최순우의 계보를 뜻한다고.

 

간송 전형필 선생님을 오래 오래 기억하고 그 뜻을 기리는 일이야 말로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성탐정 이상'이라는 추리 소설 속에서 실존 인물로 만났던 선생님의 존재가 반가웠다. 바람이 있다면 간송 전형필 선생님에 관련된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영화가 개봉되서 진정 용기있고 가치있었던 일들을 실천에 옮겼던 선생님의 이야기들이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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