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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 내 마음대로 고립되고 연결되고 싶은 실내형 인간의 세계
하현 지음 / 비에이블 / 2021년 6월
평점 :

“모든 삶이 특별하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아요. 모두가 소중할 수는 있어도 모두가 특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거든요.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평범한 나로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요즘 제가 가장 열심인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달걀 프라이 옆에서도 기죽지 않는 명랑하고 씩씩한 달래양념장이 되고 싶어요. (...) 평범함 뒤에 숨겨진 노력에 조명을 비춰주는 마음으로. 여기 모인 이야기들은 모두 그렇게 쓰여졌습니다.” - 프롤로그 중
이 책에는 우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나 또한 약속이 갑작스레 취소되면 그 귀찮은 화장과 머리손질과 옷을 골라 입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서 지금 입고 있는 잠옷 그대로 다시 폭신한 침대로 돌아가는 기분을 알아서 그럴까. 책 제목을 보니 지금 내가 폭신한 이불 속에 들어와 있는 듯이 편안해진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피곤하다. 토, 일 연달아 잡는 건 더더욱 싫다. 꿀 같은 이틀의 주말 중 하루는 반드시 집에서만 뒹굴뒹굴 있고 싶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이상하다. 밥을 사 주는 사람보다 약속을 깨주는 사람이 더 고맙게 느껴질 때가 많다.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오히려 상대가 서운해할까 봐 적당히 아쉬운 척 대답한다. 어쩔 수 없지 뭐…….(아싸!) 괜찮아, 다음에 보자.(안그래도 나가기 귀찮았는데 고마워!) 그러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 15p.
아무래도 작가님은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분이시지 않을까 싶다. 어쩜 내 생각을 저렇게 고대로 옮겨 놓으셨는지...!! 저거 완전 나인데..!! 읽으면서 뜨끔했네...ㅎ 모듈형 인간이 되고 싶으시다는 작가님의 글도 너무 와닿았다.
“블록을 조립하듯 마음대로 세상과 연결되고 분리되는 사람. 외톨이가 아닌 채로 혼자일 수 있는 사람. 약속이 취소되면 나는 함께라는 가능성을 가진 채로 기쁘게 혼자가 된다. 친구도 피자도 노래방도 좋지만 그게 조금 더 좋을 때가 있다. 그 안전한 고립감이 너무 달콤해서 들키지 않게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창밖은 푸르고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어느 맑은 날에.” - 18p.
이 밖에도 책을 읽으면서 내 얘기같이 느껴지는 문장들을 많이 만났다. 누구나 일상을 살면서 느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들. 내 마음속에서 꺼내온 듯 익숙하고 편안한 이야기들. 그렇기에 내 얘기같은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약속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서 근처 커피숍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읽으면 어떨까. ‘함께’도 좋지만, 작가님처럼 안전한 고립감도 좋은 나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 혼자 앉아 이 책을 읽는 상상을 해본다.
집을 찾기 시작하면 집만 보이고, 나무를 찾기 시작하면 나무만 보이는 것처럼. 집을 찾는 사람이 나무를 찾는 사람을 만날 때 세계는 조금 낯설어지고, 꼭 그만큼 넓어진다. 나는 앞으로 집 말고 또 무엇을 찾게 될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모으는 사람이 될까? 이 질문은 내가 나에게 어떤 세계를 보여줄 것인지 묻는 말이기도 하다. 혼자서는 아주 좁고 얕은 세계밖에 볼 수 없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모으는지 곁눈질로 열심히 힐끔거린다. 그렇게 서로를 기웃거리며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먼 곳을 본다. - P42
그들의 가장 별로인 부분까지도 너그럽게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뻔뻔해지지도 용감해지지도 못하고 당황한다. 나 역시 그들에게 숱한 실망감과 참담함을 안겨주었을 텐데. 그 서글픈 순간을 그들은 어떻게 견뎌왔을까? 하지만 정말로 물어볼 용기는 없다. 우리는 아직 아주 많은 날을 우리로 살아야 하니까. 그 사실이 가끔은 막막하다. - P50
10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20대에는 냉정한 현실을 깨달으며 끊임없이 좌절하고 나를 미워했다. 그렇다면 30대는 평범한 나로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시간이지 않을까. 열등감이나 패배감에 잠식되지 않은 건강한 마음으로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사는 사람. 이제 나는 특별한 사람보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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