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유물을 관람할 때 소실되거나 찢겨 나간 부분에 무엇이 있었을지 궁금해하며 머릿속으로 그려본 적이 있다. 찢어진 문서에는 무슨 내용이 담겼을까. 부서진 조각상의 사라진 부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남아 있는 것보다 사라진 부분에 더 오래 눈길이 머무는 때가 있다. 사람들은 왜 그 유실된 부분을 그토록 궁금해할까. 만약 그 빈 공간을 자신의 상상으로 메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짜릿한 경험이 있을까.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그런 상상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카슨은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게리오네이스』를 번역하다가 원작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파피루스에 남은 단편과 다른 문헌에 인용된 구절만으로는 온전한 이야기를 복원할 수 없었다. 카슨은 그 비어 있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시로 쓴 소설’이라는 부제를 단 『빨강의 자서전』이다. 『게리오네이스』는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과 관련된 이야기다.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죽이고 그의 소떼를 차지한다. 영웅의 관점에서 보면 위대한 모험이지만 게리온에게는 자신의 목숨과 세계를 빼앗기는 억울한 사건이다. 게리온이 겪은 회한을 한가지 색으로 그릴 수 있을까. 책에서 '빨강'이라는 단어는 총 90번 나온다. 단순히 색채가 인간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한 인간을 하나의 색채로 규정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회한이 어떻게 빨강일 수 있고 과연 그런지”(247쪽)에 대한 250페이지 짜리 답이다.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서 “힘은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을 사물로”만들어 버리며, 일리아스의 진짜 주인공은 힘이라고 단언한다. 힘에 종속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행위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존재가 된다.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에서 게리온은 바로 그 힘에 종속된 존재다. 스테시코로스는 영웅의 위업이 아니라 패배한 괴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카슨은 스테시코로스가 시도한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다시 현대적으로 재구성한다. 게리온을 현대의 사춘기 소년으로 등장시키고, 신화 속 괴물의 내면을 현대의 한 소년이 겪는 상처와 사랑, 성장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빨강의 자서전』서두에 스테시코로스 이야기가 나온다. 호메로스와 견줄 만큼 서정성이 뛰어난 시인이다. 큰 차이점은 호메로스가 인물의 특성에 따라 정해진 ‘형용사’를 썼다면 스테시코로스는 대상에 따라 속성에 맞는 ‘형용사’ 를 사용했다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평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형용사’ 빨강이 이 책을 좀 더 색다르게 만들게 한다. 앤 카슨은 고대 스테시코로스가 게리온에 대해 쓴 긴 서정시에서 ‘형용사’의 활약이 돋보였던 점을 넘어서 그녀는 ‘형용사‘를 마치 인격이 있는 존재로 묘사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여러 번 읽다보니 스테시코로스에 대한 대단한 사랑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스테시코로스의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는 더 늦기 전에 그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했을까.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에서 스테시코로스의 매력은 신화나 전설로 전해오던 인물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스는 활과 봉을 지니고 사자의 피부를 지녔고, 게리온은 날개를 지니게 되었다. 앤 카슨의 책을 읽다보면 사포나 시모니데스, 스테시코로스같은 고대 그리스 시인의 시를 더 읽고 싶게 만든다. 『빨강의 자서전』을 그냥 소설로 읽어도 재밌지만 이런 기호를 발견하여 읽는 것도 재미있다. 장 보드리야르가 스테시코로스의 기호는 ’실체에 대한 열정’이라고 한 이유를 함께 찾아가는 것도 이 책의 묘미다. 카슨은 본 이야기의 제목 아래에 ‘로망스(Romance)’라고 적었다. 중세 기사 로망스에서 기사는 낯선 세계로 떠나 시련을 겪으며 자신의 용기와 가치를 입증하고 사랑도 여정의 일부가 된다. 카슨의 로망스에서는 괴물이 주인공이 되고 그를 죽였던 영웅이 사랑의 대상이 된다. 모험의 주체와 대상이 뒤바뀐 것이다. 게리온의 자서전이 아니라 『빨강의 자서전』이라는 제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게리온을 수식하던 색채가 자신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빨강에게는 비밀이 있다. 등에 난 날개다. 날개는 게리온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신체의 일부이지만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비밀을 다룰 줄 아는 이가 시인이다”라고 말한다. 비밀의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그 내용을 모두 말하지 않을 때 매혹이 발생한다. 카슨은 날개를 가진 소년을 보여주면서도 그가 품은 내면의 비밀을 남겨둔다. 자서전이라는 제목과 달리 이 작품은 주로 삼인칭으로 서술된다. ‘나는’이 아니라 ‘게리온’이라는 문장이 그의 삶을 이끌어간다. 화산의 내부를 보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인류학자들은 목격자라 부른다는 추측을 들려주는 대목이 있다. 사랑했던 이들은 한때 용암보다 더 뜨거운 시간을 겪은 사람들이다. 같은 사랑을 하고도 서로 다른 장면을 기억한다. “리히터 지진계는 최저치와 최고 한계점이 없는” 것처럼, 사랑은 ‘측정 불가능한 전율’로 타인은 알지 못하는 전율을 당사자들은 느낀다. 카슨은 이 문제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도 보여준다. 게리온은 다른 사람에게 관찰되는 괴물인 동시에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기록하는 사람이 된다. <빨강인내>에서 게리온은 1923년에 촬영된 화산사진을 바라보며 자신이 왜 심란한지 알지 못한다. 한 여성이 집 지붕에서 상자형 카메라로 15분 동안 노출하며 찍은 사진이다. 용암은 29개월 동안 흘렀고, ‘화산탄이 솟구치고 화산재가 떨어지고 소나무들이 죽어가는 900초가 한 장의 사진에 압축되어 있다. 자서전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 줄의 문장에는 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동안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다. 카슨이 작품 제목을 『게리온의 자서전』이라고 하지 않고 『빨강의 자서전』이라고 한 이유다. 시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시간은 움직임에 부여하는 하나의 의미라는 답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존 애쉬베리의 시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