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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ㅣ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평점 :
자신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인간 만세!
2014년, 새해라고 부르는 그때가 시작된지 벌써 스무날가까이 되었다. 새해가 시작되면 으레 새로운 스케줄러를, 약 한달의 시간을 들여 고심하고 고심하여 구입하고, 이루고자하는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우는데 몇날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항상 좀더 나은 인간이 되는것에 목표를 두고 사는 고리타분한 인간인지라 연말에는 한해를 돌아보며 지키지못한 계획들에 아쉬워하고, 내년에는 여러가지 의미있는 일들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희망을 갖는것이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올해는 12월이 다시 1월이되고, 2013년이 2014년이 되었음에도, 나는 아직도 왠지 2013년 13월에 살고있는 기분이다. 서른의 문턱에 와있는 나이 탓인건지 그 하루의 차이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도무지 따라잡을수가 없다.
열 여서일곱즈음에는 빨리 어른이되고, 스무 서너살이되고, 서른이 되어 의미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사람은 나이가 먹어갈수록 배우는것도, 아는것도, 깨닫는것도 많아질테니 더욱 가치있는 인간이 될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서른즈음의 나이를 동경했었고, 서른의 나는, 뭔가 이뤄낸 인간이 되어있을거라고 상상했다. 무슨 디즈니의 만화영화도 아니고 어찌 그리 알록달록 청순한 생각들을 주워담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할수가 없다.
언젠가부터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제작년까지도 새로나온 구두를 그냥 지나치면 무례한 인간인듯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새 구두와 가방을 사들이곤했다. 두달이 멀다하고 미용실을 드나들고, 일주일에 같은 옷을 두번이상 입으면 대굴욕사건이라고 명명하며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가방도 흥미가 떨어지고, 13cm의 킬힐을 왠만하며 피하게되었다. 운전을 자주하게 되어서라고 핑계를 대 보지만, 뭔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게 확실했다. 대학교 시험기간에 채 2시간을 못자며 지낼때도, 언제나 한시간 이상의 시간을 들여 머리를하고 옷을 입고 화장을하는 인간이었다. 언덕 끝자락 구석에 있는 미대건물까지 13cm의 힐을신고, 족히 4kg은 되는 빅백을 들고 달리던 인간이었다. 요즘은 120세까지 사는 시대라고들 하는데, 벌써부터 집중하며 살아야할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 기분이다.
러시아 작가 중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는 톨스토이다. 또, 톨스토이의 장편보다 단편을 좋아하는 편이다. 장편은 시간과 페이지가 넉넉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여유있게 풀어쓸 수 있지만, 단편은 그런 부분에서 좀더 긴장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 '크로체이르 소나타'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고, '세르기 신부'나 '가정의 행복'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 작가정신에서 출간된 '마부'는 막심 고리키의 단편이 총 열편이 실려있다. 그 중 아홉편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열편의 작품은 조금씩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의 여러가지 감정에 대한것들을 다루고 있다.
'마부'나 '종'에서는 돈을 최고로 여기며 살인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가치를 착취하는것에 조금의 죄책감도 느낄수없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부를 가지고있는 그들의 내면세계는 무엇보다 공허하다. '로맨스'나 '아름다움'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삶은 더럽게 살기 힘들어도 사랑이 있어서 버틸수있으며, 그것만이 고상하고 아름다운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인상깊게 읽은 단편은 '지난해'와 '시간'이다. 서술 방식이나 상황설정이 생소하기도 하고, 신선해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새해를 시작하는 때여서 조금 더 와 닿았던것 같기도 하다.
단편 '지난해'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새해를 맞이하고 사라질 지난해가 많은 주변인물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곳에는 쇠약하고 무기력해진 이성, 차갑게 식은 사랑, 망가진 믿음, 학대받은 진리 등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이 해내야할 일들을 해내지 못하고, 전에 있었던 의미와 기능은 모두 잃어버린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새해를 맞이하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지난해는, 자신의 의미를 상실한 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 무기력한 많은 이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비난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쇄신하지 못해, 지난해는 떠나지 못하게된다. 그저 새해의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있는것이다. 만년 꼴찌인 진리와 함께.
"안녕하십니까, 작별인사를 하겠습니다!" 지난해가 말했다. "운명이 정해준 날에 나는 죽습니다. 죽는다는 그 사실이 아주 기쁩니다. 하루만 더 살았더라도 빛바랜 삶의 슬픔을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과 같이 일하면서 영원히 사는 것은 지루한 일입니다! 일 년 전 내 생일에는 여러분 모두가 더 강하고 생기발랄하고 완벽했는데 유감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여러분을 동정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사람들에게 치여 무덤덤하고 진부하고 소심해졌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기형적 모습은 서로 아주 비슷해졌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인간의 특성인가요? 여러분은 힘도, 생기도, 열정도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사람들을 동정하는 바입니다."
- 지난해, 169p
이 열편의 단편들은 여러 유형의 인간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가치로 삼아야할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하는가를 말이다. 내가 13월의 기분으로 몇날을 보내고 있을때, 지난해가 내게 말했다. 너는 스스로의 기준이 아닌 사람들의 기준과 그들의 가치에 치여 생기발랄함은 모두 잃어버리고 그저 진부해져버렸다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고싶어하는 내 모습은 기형이라고. 생각, 감정, 생각의 독창성을 잃어버린 날들은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할 것이라고. 그 지루한 시간들이 영원히 계속될거라고. 그저 영원히.
서너장의 짧은 단편으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언제나 열정적으로 즐거워하고 슬플때는 몇시간이고 펑펑 울수 있었던것은, 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것 같다. 사회의 성공 기준과 누군가의 꿈이 아닌, 내 꿈이 있었고, 나의 기준이 었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녹록지않고, 내가 그리던 일과 생활이 가능한게 아니라는걸 아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살게 되는것이다. 삶은 원래 그렇고, 사람들의 기준에는 이것도 괜찮고, 이정도도 그저 나쁘지 않고.
2014년의 스케줄러를, 무려 일주일이나 지나서 구입하게되었다. 시간이 없기도했고, 내가 매번 쓰는 브랜드 매장이 근처에 없기도 했지만, 사실 될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던것 같다. 2013년도 엿같았는데, 2014년이라고 뭐 좀더 맛있는 엿이되기나 할까, 그냥 엿이지 라는.
이미 지난해는 갔고, 새해가 왔는데, 난 아직도 지난해를 보내지 못한것 같다.
평소보다 늦었지만,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하고 보내주게 되었으니, 이왕 보내는거 성대하게 보내버릴까 한다.
올 한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삶이 이뤄지는 날들이 없기를, 좀더 즐거워하고 진심으로 웃고 울수 있기를, 더이상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용감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인간 만세! 썩는 것과 불타는 것, 단 두 가지의 삶의 자세만이 존재한다. 겁쟁이와 욕심쟁이는 첫 번째를 선택하고, 용감한 자와 대범한 자는 두 번째를 선택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가 있는 곳에 위대함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지루하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서 그 시간을 아름다운 위업으로 가득 채우자. 그때 우리는 기쁜 설렘과 강렬한 도도함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인간 만세!
- 시간, 1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