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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한 거짓말들
케이트 보울러 지음, 이지혜 옮김 / 포이에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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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어디서 굉장히 많이 들은 얘기다. 굳이 종교 얘기로 넘어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신자나, 운명론자가 아니라도 일상에서 이런 말을 자주 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이 말을 하게 되는 상황은 대개 나쁜 일이 닥쳤을 때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일 앞에서 위안의 말로 자주 쓰인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럴 거야.' 하지만 대체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지는 않다.


 이 책의 제목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몸에 온갖 문제를 달고 살았다. 팔을 거의 못 쓰는 지경이 되기도 하고, 갖은 노력을 해도 임신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어찌 겨우 버텨나가며 살아가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결장암 판정을 받는다. 그의 나이 고작 만 34살에. 신학가인 작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고난 속에서 의문을 품는다.  모든 것에 이유가 있다면 내가 지금 암에 걸린 건 도대체 뭔 이유 때문인가? 

 이 책은 여타 다른 종교에 관한 책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런 류의 내용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도 한다. 신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건가? 신을 믿으면 걷지 못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걸을 수 있게 되고, 가난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인가? 이 책은 회의감에 빠진 신학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신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보면서 <사일런스>가 떠올랐다(엔도 슈사쿠의 원작 소설 <침묵>을 읽지 못했기에 영화로 대신해서 설명하겠다). <사일런스>는 17세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벌어지던 일본으로 선교를 하러 간 신부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박해에 시달리며 배교를 강요당하는 일본의 천주교도들과 그 과정에서 순교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허망하고 비참한 죽음과 그 과정에서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는 하느님의 침묵에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하느님은 본인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간절히 하느님을 찾을 때 왜 침묵하는가?’ 이것이 <사일런스>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이 책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의 내용과도 맞닿아 있다.

 <사일런스>에서 주인공은 다른 신자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결국 배교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하느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고통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내가 아쉬웠던 지점 중 하나다. 하지만 종교적 신앙에 대한 물음을 다루는 내용은 결국 믿음에 대한 확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의 경우도 저자는 다소 두루뭉술한 태도로 마무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하느님의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을 어디까지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내용이다. 종교에선 아직까지 신앙의 영역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해석하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그런 종교적 태도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무심히 지나치던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깨닫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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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권남희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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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자주 하던 생각이 있었다. ‘내가 기존의 제도권 교육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로운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 말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늘 그렇듯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후회에서 나오는 말이다. 나의 경우 경상도의 보수적인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는 성적순으로 서열이 있었고, 야간 '자율' 학습을 밤 10~11시까지 강제로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많이 포기하고 참아야 했다. 시작부터 얘기가 푸념 글로 흐르는 것 같아 급하게 정리를 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지난 일,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는 잘하지 않게 됐다. 아무리 후회해봤자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가 없고, 엎질러진 물 앞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차라리 과거를 교훈 삼아 앞으로의 선택을 잘 내리자는 주의로 바뀌었다. 


 <창가의 토토>의 주인공 토토는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1년도 안 돼 퇴학당한 학생이다. 전 학교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면 토토는 현대에선 전형적인 ADHD로 판정받을 아이다. 수업시간에 전혀 집중을 못하고, 어떨 때는 창가에 앉아 바깥만 쳐다보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토토는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해 도모에 학교로 옮겨야 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입학한 초등학교를 1년도 안 돼서 쫓겨난 '문제아'의 이야기가 되는 걸까?


 하지만 다행히 이야기는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이 책은 퇴학당한 '문제아'의 이야기도, 산만하고 말 많은 꼬마 아이가 어느 특별하고 열정적인 선생에 의해 '교정'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토토가 '토토다움'을 유지하면서 잘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도모에 초등학교의 교장 고바야시 선생님은 전학 첫날 토토의 이야기를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들어준다. 무려 네 시간 동안이나. 그리고 각각의 특성을 가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보듬어주려 한다. 도모에 초등학교는 아이들이 최대한 자유로운 환경에서 스스로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 해 준다. 그렇다고 절대 아이들을 방임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해진 한 길로 아이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함께 찾아주는 것이다.


 이 책의 토토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책이고, 주인공인 꼬마 아이는 호기심이 많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때로는 어른들의 눈에 돌발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자신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끼치는 어른(고바야시 선생님, 포르투가)을 만나게 되고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창가의 토토>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전개는 완전히 다르다. 제제는 자신을 둘러싼 가혹한 환경에 의해 너무 일찍 철이 들고, 우울해져야 했다. 하지만 토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도움으로 순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토토의 어머니는 토토가 예상 밖의 행동이나 말을 해도 최대한 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딸을 배려해줬다. 고바야시 선생님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이 책 또한 갑작스러운 안녕을 맞게 된다. 이야기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 시절의 일본이기 때문이다. 토토는 자신의 친한 친구, 자신의 애완견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고 도모에 학교는 폭격으로 불에 타고 토토의 가족은 피난 열차를 타고 떠나야 했다. 하지만 고바야시 선생님은 학교가 불에 타는 걸 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음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지 생각하고, 토토는 교장선생님이 자신에게 늘 하던 말 "너는 사실은 참 착한 아이야."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어린 토토의 관점으로 진행되긴 하지만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쓰여졌다. 그리고 중간중간 이제 성인이 된 작가의 생각이 들어가기도 한다. 도모에 학교는 그 흔적도, 기록도 거의 남지 않고 사라졌지만 작가가 책을 통해 기억해냄으로써 모두에게 알려지고 기억되게 됐다. 작가는 그를 통해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자신의 학교와 유년기를 추억하고, 미처 준비도 못하고 헤어진 것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을 고하고 싶었을 것 같다. 책이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쓰이게 된 것은, 작가 본인조차도 유년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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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국가 강의 - 정의롭고 좋은 삶에 관한 이야기
이종환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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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가장 왜곡되고 와전된 말 중 하나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다. 아마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퍼뜨린 게 아닐까 싶은 이 말은 위대한 철학가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말로 왜곡되어서 수십 년 동안 전해져 왔다. 이 말은 일단 가장 먼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딴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절대 '악법도 법이라서' 죽은 게 아니고, 소크라테스는 그런 식의 말을 절대 한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조금은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고소됐고, 재판 과정에서 타협을 할 수도 있었다. 또한 사형을 선고받은 후에도 감옥에서 도망쳐 해외로 도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그런 길을 택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어쨌거나 악법도 법이라는 개떡 같은 논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자신이 평생 동안 지켜온 정의에 관한 신념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는 변명하거나 도망감으로써 자신이 믿어온 정의를, 그 신념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러모로 중국의 공자와 비슷한 점이 많다. 소크라테스와 공자 모두 영향력은 생전에도 매우 컸으나 정치에 나아가거나 권력을 가진 적은 없었고, 대신 여러 제자를 양성했다. 또한 둘 모두 생전에 직접 책을 집필한 적은 없었고, 그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엮어서 책으로 만들었다. 다만 이때 만들어진 '책'에서 둘의 차이가 생긴다.

 공자의 말씀을 집대성한 <논어>는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 공자의 제자들이 그의 사후에 그가 평생 동안 했던 말들을 정리해놓은 것이기에 그렇다. 또한 <논어>는 공자의 가르침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금언집에 가깝고, 어떻게 전달이 됐건 공자가 '직접' 했다고 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소크라테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수많은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 저자가 플라톤으로 매우 명확하며 플라톤 또한 소크라테스에 버금가는 철학자다. 그리고 플라톤의 책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들은 실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지의 여부가 불명확하다. 무엇보다 플라톤의 책은 소크라테스의 말들을 집대성한 금언집의 형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다른 인물들의 대화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가깝고, 소크라테스 또한 이 이야기에서 플라톤의 생각을 대변하는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위의 말대로 <국가>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다. 그렇기에 다른 이야기들처럼 특정한 세계관이 있고, 그에 맞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논어처럼 단편적이지 않은 매우 길고 연결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긴 이야기의 과정에서 결국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지, 행복과 정의가 함께 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박이 오간다.

 소크라테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자신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먼저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모두 경청하고, 그에게 되려 그의 논리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상대방의 논리에 있는 허점과 모순을 스스로 알게 하는 식이다.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다른 이들이 어떤 것에 대해 무엇인지 명확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 대상에 대해 잘 모른다는 입장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 했다. 소크라테스는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는 백지의 상태로 한 대상을 알아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자가 가져야 하는 자질 중 하나다. 끝없이 지혜를 추구하고, 탐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자세 말이다. 철학자는 비록 자신이 특정한 신념을 가지게 되어도, 그 신념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면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끝없이 찾고 탐구해야 한다. 


 <국가>라는 책은 매우 어렵고 난해하게만 보이지만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에 기반을 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삶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이 과정에서 현대에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는 주제 또한 등장한다. 바로 "왜 정의로운 사람보다 부정의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사는가?"에 대한 문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그에게 왜 현실의 수많은 부조리 속에서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내세에서 보상받는다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은 하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하기도 한다. 

 <국가>에서는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부정의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이 행복한 길이 아니고, 개인과 국가 모두 정의롭게 자신이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한다면 그때 진정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되고, 모두가 서로 신세를 지면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매우 좋은 얘기다. 그런 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노예들의 일방적인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과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시민권을 갖춘 성인 남자만 해당한다는 것을 빼면. 하지만 이러한 주제, 즉 '정의로운 삶이 곧 행복한 삶인가?', '왜 세상은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않은 이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보이는가?'라는 질문들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 내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이 책은 플라톤의 <국가>의 핵심적인 내용을 말하며 그것을 현대사회의 상황에 대입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뻔한 사례나 단순한 대입이 나타나고 그 깊이가 조금 얕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다. 하지만 <국가>라는 매우 길고 어려운 책의 핵심을 짚어서 <국가>가 난해한 주제에 대해 다루는 것이, 아닌 지금 현실에도 대입 가능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는 책임을 알려준다. 또한 후에 직접 <국가>를 읽을 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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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
고든 마리노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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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저자 고든 마리노는 어린 시절 전혀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불량학생이었고 경찰서도 자주 드나들었다. 운동에 재능이 있어 대학에 스카우트됐지만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녔고, 강의는 거의 듣지 않으며 권투에만 열중했다. 대학원을 자퇴하고 약물과 음주에 의존하던 그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다 저자는 정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카페 겸 중고서점에서 키르케고르와 만났고 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키르케고르의 무엇이 저자를 바꿔 놓았을까? 저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안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리던 키르케고르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의 글들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비슷한 내면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나 철학자에게 더 끌리는 것은 본능에 가까우니까.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철학자이고, 북유럽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책을 읽기 전까지 키르케고르에 대해 알던 전부였다. 

 사실 실존주의라는 말은 어디서든 자주 접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 실존주의 문학, 실존주의 심리치료……. 하지만 나는 앞에서 말한 소위 실존주의 문학을 읽어보고, 대학교 강의시간에 실존주의 심리치료에 대해 배우고, 실존주의 철학을 수박 겉핥기 식이라도 자주 접해도 결국 실존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실존주의란 것이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실존주의에 대해서 내 나름으로 생각한 정의는 ‘존재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끝없이 탐구하고 고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주체적으로’가 아닐까 싶다. (또한 나는 학문적으로 어렵고 복잡하게 분류를 해서 그렇지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의 철학을 갖고 사는 철학자라고 믿는다.)


 이 책을 보면서 내내 이 책이 소위 말하는 ‘자기계발서’라는 분류에 포함되는 책인지 의문을 품었다. 쉽게 쓰여진 책은 분명히 아니다. 끝없이 고찰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또한 주제가 정해진 각 장이 그 주제에 대해서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책의 서술방식은 주제와 관련된 접근(주로 저자의 경험 등의 사례를 통해)으로 시작해서 키르케고르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다른 사상가나 작가의 견해, 종합적인 결론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이렇게 돌고 돌아 탐구해오는 과정에서 읽는 내가 다른 길로 새거나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기에 책을 제대로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불안, 우울과 정말,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 이 항목들이 저자가 각 장의 주제로 잡은 것들이다. 결론을 내린다는 게 이런 책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존주의에도 맞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계발서들이 흔히 범하는, 어떠한 길이 옳다며 그 길로 독자들을 이끄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는 우리가 실존주의적으로 성찰하도록 이끈다. 길을 걷는 법을 알려주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키르케고르의 신앙과 사랑에 대해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공감하지 못했다. 특히 사랑의 경우, 키르케고르가 결혼을 자신의 이상한 사명감 때문에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떠난 것을 어떤 경우에도 긍정하지 않는다. 특히 그렇게 떠나서 아예 연을 끊은 것도 아니라 계속 그 여인에게 미련을 보였다는 것에서 더더욱. 이것에 대해서 저자가 어떻게 변호하고 연결시키려 해도 키르케고르에서 반면교사 이상을 찾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렇게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유하고 자신만의 태도를 가지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충고하고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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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10주년 리커버 에디션)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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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웃라이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온 지 어언 10주년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한창 말콤 글래드웰의 책에 빠져있을 때였다. <아웃라이어>, <티핑포인트>, <블링크> 등의 책을 읽었고,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그의 새로운 생각에 깜짝 놀라 했다. 

  특히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시아인이 왜 수학을 잘하는지에 대해서 언어적으로 접근한 부분이었다. 우리가 숫자를 세고 발음하는 것이 서양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간단하기 때문에 숫자를 접하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언어적 측면의 차이를 통해 이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캐나다의 청소년 하키의 예를 들며, 동년배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학생들은 청소년의 하키 클래스를 나누는 기준일에 가장 가깝게 태어난 사람들이 많다. 성장기의 청소년의 경우, 짧은 몇 달 동안의 성장이 큰 차이를 보이곤 한다. 그렇기에 이 기준일에 가깝게 태어난 학생들이 더 늦게 태어난 학생들보다 더 우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같이 작으면 작다고 할 수 있는 요소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이 책의 내용 중 하나인 ‘1만 시간의 법칙’은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무렵에 정말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강의나 인터뷰, 다른 자기 계발서 등에서 수없이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은 정작 그가 책에서 말하는 내용과는 많이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분야든 1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즉 ' 노력'을 강조하는 식으로 정의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콤 글래드웰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마냥 ‘노오력’만을 강조하진 않는다. 앞서 아시아인이 수학을 잘하는 것이나 하키에서 생일이 빠른 사람이 더 뛰어난 성적을 내는 것, 이 두 가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누군가가 두각을 나타내고 재능이 발휘되는 데에는 우연·환경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그냥 1만 시간 동안 노력하면 다 잘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특히 이 ‘1만 시간’, 이 시간이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성장하면서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정도 시간의 연습을 해낼 수는 없다. 특수 프로그램이나 특별한 종류의 기회를 잡아야 그 정도로 연습이 가능하다. 환경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운’에 가깝다. 재능에 환경적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저자는 책 전체에서 강조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랭건과 오펜하이머의 비교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랭건은 IQ 195지만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거나 업적을 쌓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위대한 과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저자는 둘의 성장환경에서부터 둘의 차이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랭건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자랐고, 성장과정에서 그로 인한 불운이 많았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를 지원해줄 수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심지어 오펜하이머는 대학 시절 교수를 암살 시도까지 하였으나 가벼운 징계에 그쳤다. 하지만 랭건은 그것보다 훨씬 덜한 문제, 심지어 그가 저지르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잘 몰라서 재정 지원 서류를 제출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삶이 꼬이게 되었다.


 매우 부유한 집의 자식이었던 빌 게이츠는 10대 시절 그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그 특별한 기회는 빌 게이츠의 재능과 더해져 그를 현재의 빌 게이츠로 만들었다. 또한 책에선 정반대로 소위 ‘흙수저’ 집안에서 자란 사람의 성공에도 그 당시 사회 환경의 도움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1만 시간의 법칙은 특별한 기회와 부자들의 타이밍이 결합돼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태어난 시기도 매우 중요하다. 정신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개인의 성공에 지능이 가장 중요하긴 하나, IQ 130 정도를 넘어서면 그 차이가 심하진 않다. ‘혼자서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말콤 글래드웰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는 노력도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조던의 예를 들어보자. 마이클 조던이 최고의 농구선수가 된 것에는 그의 타고난 육체와 골격, 큰 손, 운동능력이 물론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걸 타고난 선수들은 꽤 많다. 여기서 차이를 갈랐던 것은 마이클 조던의 엄청난 노력,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승부욕이었다. 마이클 조던의 승부욕은 거의 병적이었다. 선수 시절 그는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트래쉬토크를 하면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만난 경기에서 바로 되갚아주곤 했다. 또한 농구 경기 말고도 포커 등의 도박이나 골프로 자신의 넘치는 승부욕을 해소하려고 했다. 그는 은퇴하고 나서도 경쟁심과 승부욕이 줄지 않고 그대로라서 어려운 면이 많다고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누구나 노력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노력할 수 있는 한계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웃라이어>의 내용 속 핵심들은 시간이 지나도 유효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 이 책은 노력만이 대수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환경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핵심은 우리가 지금 처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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