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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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 내 소유물, 내 가족과 내 인생 -이 한순간 휩쓸려 가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진짜란 무엇인가?'


깨어진 균형


누구에게나 인생을 그 일이 있기 전과 후로 나눌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바다 건너 미국의 9.11 테러, 옆나라 일본의 후쿠시마 대지진, 우리나라의 세월호 침몰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우리의 망상을 일으킨다. 또 우리로 하여금 지녔던 가치관과 물질적 소유에 대한 집착에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테러리스트의 삐뚤어진 마음, 지진, 쓰나미, 낡은 배의 녹슨 볼트와 같이 나의 잘못과 무관한 어떤 힘이 내 인생, 가족, 소유물을 송두리째 날려버렸을 때, 우리는 그제야 삶의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누리고 있던 평온이 외줄 위 불안정한 균형 잡기 속 한 순간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다.

균형은 이미 깨어졌다.


온 우주가 말을 걸던 무렵

'사람들이' 미친 짓을 하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온갖 일상적인 물건과 옷, 심지어 저녁 식사까지 입과 눈, 태도와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치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행동한다면 결국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유의지. 물건들은 정확히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돼지갈비와 플란넬 셔츠, 포춘쿠키와 고무 오리. 심지어 젓가락도 뭔가 할 말이 있었다.
디즈니 영화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을 '정신병'이라 일컫는다, 출처: 미녀와 야수


베니가 언제 처음 목소리들을 들었을까? 아버지 켄지가 죽은 것과 같은 해였다.

아버지가 죽고, 남은 가족인 베니와 애너벨에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아들인 베니는 주변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사랑하는 남편과의 추억을 집안 곳곳에 간직하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는 이 말을 현실적이고 의학적인 용어로 풀어내면, 아들은 '조현병', 엄마는 '저장강박증'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켄지의 죽음 이전과는 다른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엄마가 쌓아 올린 물건들의 목소리를 아들이 듣는다. 정리정돈되어 조화를 이룬 물건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지만,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물건들은 제각각 자기만의 비명을 지른다. 그러한 목소리들이 베니의 정신을 휘어잡고 마음대로 주무른다. 말 그대로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물건의 말-이야기-책

베니를 화나고 슬프게 하거나 동요하게 하는 상황: 엄마가 내 방에 물건을 가져다 놓거나 내가 날짜를 알려줬는데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을 때
당시 느낌: '우주에서 가장 밀도가 높고 가장 무거운 물질로 만든 거대하고 시커먼 혜성이 나에게 정면으로 아주아주 빨리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올려다보면 그게 다가오는 게 보여요. 그게 점점 더 커지면서 모든 산소를 빨아들여 숨을 쉴 수가 없어요... 공간이 부족해요.'
대처 방법: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기
도서관으로 오라


사람을 미치게 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물들도 목소리 내기를 자제하는 곳이 있다. 바로 도서관이다.  여전히 속삭이고 말을 하지만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모두가 이곳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에는 귀를 막지만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사물 각자는 자기만의 할 말이 있다. 베니는 그러한 말들을 연결 지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엄마가 재활용품 수거함에서 발견한 고무 오리가 품고 있던 바다와 조류와 파도와 해안선에 대한 것, 한때 자신을 만졌던 멋진 누군가의 손가락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의 묶음이 책이 된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베니를 도서관으로 이끈 것도 베니 내면의 '책'이었다.

고무 오리, 출처: TurboSquid


마음속 책 한 권

그가 혼자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책 함께 읽는 날에 아이들이 조용하고 고요해지는 것처럼, 머릿속의 모든 목소리들이 점점 조용하고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심지어 일과를 마치며 책을 카트에 반납하고 도서관 정문을 통과해 거리로 나간 뒤에도 목소리가 조용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책 한 권이 숨겨져 있다. 책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사람 삶의 이야기를 앞표지와 뒤표지 사이에 최대한 오랫동안 안전하게 간직한다. 또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인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에 대한 개개인의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책은 인간과 사물의 중간자적 입장에 있다. 감각은 없지만, 지각은 있는 '반인반물(?)'이다. 당연히 물질들의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선 책이 제일 상층에 위치한다. 심지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인간들의 숭배도 받아왔다.

왜 그토록 책을 숭배했을까? 바로 사람들을 무의미함, 망각, 심지어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이 부르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다. 다들 휴대전화를 확인하느라 바빠서. 점점 책이 인간과 접촉하는 게 쉽지 않다. 그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묶이지 않은 것들

그날 밤 넌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소년,
무한한 미지의 우주로 첫발을 내디딘 작은 우주비행사였어.


도서관 속 '묶이지 않은' 제본실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이야기들이 순차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동시에 나타나고 동일한 현재의 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소리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우리를 크게 웃으며 즐겁게 손뼉 치게 만들었지만, 어떤 소리는 너무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이 소리는 마음이 약한 자를 만나 잡음이 되기도 하고, 시인과 선지자, 성인과 철학자를 만나 '클래식'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작업을 마치고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이제 독자들의 차례가 되고 여기서 또 다른 종류의 뒤섞임이 일어난다. 모든 독자는 고유하기 때문에, 지면에 뭐라고 쓰여있건 당신들은 각자 우리가 다른 의미를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똑같은 책도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읽힐 때 전혀 다른 책이 되고, 파도처럼 인간의 의식을 관통해 흐르는, 끊임없이 변하는 책들의 집합체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유동적이고 모습을 바꾸며, 분리하고 증식하고 시간과 공간을 이동한다.

책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 정확히는 우리의 몸을 부러워한다. 책이라는 존재는 자신과 타자가 융합되는 무아의 황홀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상은 아주 잘하지만 진짜 이야기, 즉 실제 하는 이야기들은 우리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란 무엇인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라는 사실만이 진짜다. '변화'가 진짜다.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곁에 진짜가 숨어 있다. 베니는 좋아하는 소녀와의 입맞춤에서, 애너벨은 좋아하는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켄지는 좋아하는 재즈음악의 절정에서 '진짜'를 느꼈다. 비록 용기 있게 감행한 행동의 결말이 아플 때도 있지만, 변화는 그들 삶의 새로운 챕터를 열어주었다. 예술이라는 건 현상을 뒤흔들고 파괴하고, 낯설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삶의 균형점이 깨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깨어난다. 우리 인간이라는 작가는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야 경계를 허물고 세상 모든 것이 혼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시공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나약한 존재니까 말이다. 자기가 세상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관음'이라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된다.

마을 전체가 쓸려나갔다.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로 도왔다.
내가 지진 피해자 중 한 명에게 왜 매일 여기 나오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진짭니다. 진짜 일어나고 있죠. 우린 서로 도와야 해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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