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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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듄'의 유일한 단편!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단연 '듄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설 '듄'과 관계된 유일한 단편이라니... 나 같은 '듄친자'에게 이보다 강력한 미끼는 없었다. 16개의 이야기 중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었지만 가장 먼저 읽게 된 건 당연지사. 


'듄으로 가는 길'은 아라키스 도보 여행자를 위한 일종의 13페이지짜리 '관광홍보책자'이다. 시간이 한참을 흘러 영화 속에서 보았던 치열한 전쟁터는 예루살렘, 로마, 이스탄불과 같은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타지마할을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공 건축물 '아라킨 궁전'. 궁전 입구에서는 뉴욕의 관문 자유의 여신상처럼  관광객을 맞이하는 '성 알리아 아트레이데스 조각상'이 있다. 근위병 교대식을 즐기는 이라면 무앗딥의 개인 오니솝터 정비를 마친 수행원이 '그분의 물은 안전하다!'라고 외치는 퍼포먼스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관광의 마무리는 역시 기념품. 이룰란 공주, 던컨 아이다호의 공식 초상화를 구입하면 뜻깊은 관광의 추억이 될 뿐 아니라, 은퇴한 프레멘과 프레멘 고아들을 돕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성 알리아는 실물도 조각상급이다!  출처: 키노 라이츠


'듄'에 이르는 길


이 단편집이 관심을 끈 이유는 '듄'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직 '듄'의 관점에서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제법 많은 듄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허버트가 '폭력'을 대하는 자세


'정신의 장'이라는 단편에는 승려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나온다. 영원한 평화를 꿈꾸던 그들은 '폭력을 혐오하게 만드는 기구'를 만들어, 모든 태아들에게 주입시킨다. 그렇게 만들어진 1000년 간의 평온. 하지만 폭력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투지를 잃었고, 나아지고자 하는 동력을 상실했다. 세상은 서서히 죽어갔다.


'공청회'에서는 '지속 방출 레이저기'가 등장한다. 누구나 손쉽게 제작, 사용가능한 대량살상무기. 이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화를 잘 다스려야 한다. 이웃의 심기를 거스르면 모든 사람이 다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현명하게 관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한 사람이나 집단에만 맡기기에는 너무도 큰 힘. 이 '폭력적인 큰 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허버트는 말한다. 이 세계는 폭력적이라고. 이 안에서 생존하려면 적절한 폭력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권력을 쥔 한 사람이 우리 운명을 좌우하려 드는 건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에 이 힘을 최대한 빨리, 널리 퍼뜨리는 것이 최선이라 여긴다. 그가 폴과 같은 메시아를 경계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AI 개발에서 어느 한 회사가 독주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명하게 관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한 사람이나 집단에만 맡기기에는 너무도 큰 힘.  출처: 동아일보


질서 정연한 세상의 두 얼굴


'규정 제일주의'에서는 혼돈에 맞서 정확하고 정돈된 행동 체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그게 이 세상 모든 규정집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기계'에서 인류문화의 편집본에 해당하는 팔로스 문화는 사람들의 불만이 증가하도록 프로그램한다. 불만이 모험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주고, 인간의 잠재력을 거의 최대치로 발휘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생명의 씨앗'에는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키울 작물을 연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생물학자 호니다는 가장 길쭉하고 대가 곧고 이삭이 길고 완벽한 옥수수 대신 병들어 앙상하고 씨앗을 겨우 생산할 수 있는 옥수수를 선택했다. 새로운 행성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은 놈들이다. 예상대로 그놈들 살아남았다. 새로운 행성에는 그곳만의 룰이 있는 것이다. 아라키스에 프레멘만의 관습이 있듯이.


허버트는 일정한 틀과 질서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는 역동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때로는 틀 자체를 뒤흔들만한 혁명적인 변화도.


우리 둘 다 이곳의 문제를 알지. 지나친 편안함, 지나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있어. 삶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해. 어쩌면 그게 살아 있는 우주의 유일한 기본 법칙일지도 모르겠군.' - 단편 '도시의 죽음'


사건의 감춰진 진실

벼룩에게는 그 벼룩을 뜯어먹는 더 작은 벼룩이 있고, 그 작은 벼룩은 더 작은 벼룩이 물어뜯고, 그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 조너선 스위프트


'탈출의 행복'에는 '밀기(Push)'라는 기술이 나온다. 밀기는 정찰병의 확실한 귀환을 유도하기 위해 내장된 안전장치였다. 또한 정부에 반항적인 군인이 자기만의 세상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는 정신조작 장치이기도 했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외부 행성에서 원주민을 만나고 복귀하는 데이루트는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왜 밀기라고 부르지? 당기기라고 부르지 않고?'


'GM 효과'의 세계에는 '105 화합물'이라는 게 있다. 피험자의 의식을 유전적 계보의 어디로든 보낼 수 있고, 거기서 선택한 조상으로 '빙의(?)'되는 약이다. 듄에 등장하는 '생명의 물'이 산삼이라면, '105'는 인삼이랄까. 아무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약이다. 사실 'GM(유전기억) 효과'는 다이어트약 개발 도중 생긴 사이드 이펙트였지만 군에 정보가 흘러들어 가 국회위원 협박 및 군사용으로 변질되고, 개발자들은 죽음을 맞게 된다. 


'살인의 결정'을 보면 무한한 삶을 사는 자가 등장한다. 다만 겉모습은 수십 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 주인에 해당하는 자의 정신만 다른 몸으로 이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숙주에 해당하는 몸이 수명을 다해가면 근처에 있는 싱싱한 몸으로 옮겨가 그 사람의 정신을 살해하고, 그 껍데기를 차지한다. 만약 몸의 주인이 철저한 복종을 맹세하면 한 몸을 둘이서 공유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원래 인격이 있는 편이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덜기 수우니까. 한 몸에 공존하는 여러 개의 자아. 겉모습과 진짜 주인은 다를 수 있다. 은하제국의 진짜 주인이 베네 게세리트인 것처럼.


모든 것은 듄으로부터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갈 뿐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집에는 그의 사상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모두 담겨 있다. 또 단편에서 그가 시도한 아이디어 중 많은 부분은 장편 소설 '듄'에도 녹아들어 있다. 반대로 듄에서 파생된 이야기도 있다. 아마도 나와 같은 '듄친자'라면, 이 단편집이 다른 형태로 바뀌어진 '듄'의 세계를 만나볼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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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의 세계 - 『듄』에 영감을 준 모든 것들
톰 허들스턴 지음, 강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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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 직한 세계, 그럴듯한 이야기

때로 우리 SF 소설가들은 떼돈을 벌기도 한다. 현실 정치가 허구를 따라잡기 때문이다. - 프랭크 허버트


듄은 SF 소설이다. 허구의 이야기란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있음 직한 세계를 그리고,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블라드미르'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가 떠오르는가? 뒤에 '하코넨'이란 성을 붙이면 '듄 파트 1' 속 최악의 빌런이 되고, '푸틴'을 붙이면 러, 우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의 독재자가 된다. 또 하나 더, 이동을 가능케 해 주고, 사막 환경에서 발견되며, 채취 작업에 커다란 위험이 수반되는 귀중한 물질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듄의 세계에서는 이걸 '스파이스'라고 부르고, 현실 세계에서는 '석유'라고 부른다. 이처럼 듄은 무에서 창조해 낸 이야기가 아니다. 200권이 넘는 논픽션을 읽고 이슬람 신화부터 의미론, 천문학, 선불교,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의식 등 온갖 것을 공부한 '프랭크 허버트'가 약 6년간의 조사와 일 년 반 동안의 집필 기간을 거쳐 만들어낸 '현실기반 SF 소설'이다. 책 '듄의 세계'는 '듄'에 영감을 준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담고 있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듄 파트 2' 개봉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알아두면 영화 보는 재미를 2배로 높여줄 듄의 세계 속 숨은 이야기 몇 가지를 살펴보자.

개봉박두! 출처: 영화 '듄 파트 2'


인공지능 제작 금지령

인간의 정신을 본뜬 기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 오렌지 카톨릭 성경


서기 26,391년, 지금으로부터 2만 년도 더 흐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듄'에서 미래보다 과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 '버틀레리언 지하드' 때문이다. 영화 '듄' 속 이야기가 펼쳐지기 1만 년 전, 기계에 반대하며 100년 동안 이어진 성전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은하계에 존재하는 생각하는 기계란 기계는 모조리 파괴됐다. 그래서 '듄'에서는 우주선이나 레이저총 대결 대신 칼을 사용하던 중세 유럽의 근접전과 유사한 싸움을 하고, 복잡한 수학, 과학 문제를 컴퓨터 대신 '인간 컴퓨터 맨타트'가 해결하게 된 것이다. '버틀레리언 지하드'라는 이름은 영국 소설가이자 비평가 새뮤얼 버틀러에게서 따왔다. 그는 기계가 인간을 노예로 삼을 만큼 똑똑해지기 전에 러다이트 운동을 펼쳐 기계를 모조리 파괴하자고 주장했다. '기계'를 'AI'로 바꾸면 지금 시대에 치열하게 고민해봐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


가장 귀중한 물질

스파이스는 흘러야 한다. - 우주 조합


내연기관의 개발이 석유를 가장 귀중한 상품으로 만들었듯, 인공지능 제작 금지령은 스파이스 멜란지를 가장 귀중한 물질로 만들었다. 먼 곳으로 화물과 승객을 실어 나르는 초광속 여행이 스파이스 멜란지를 복용한 우주 항법사를 통해서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항법사들이 연합하여 만든 '우주 조합(The Spacing Guild)'의 위세는 듄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기준 연도가 A.G.(After Guild)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소위 말해 그 세상에선 '예수님 급'인 셈이다.


'오일 쇼크'가 일어나면 글로벌 경제가 흔들리듯, 스파이스 공급이 멈추면 전 우주의 흐름이 멈춘다. 그 정도로 귀중한 물질이다 보니 스파이스 채취, 공급, 판매는 은하제국 제1의 관심사였고, 그 물질을 차지하려는 권력가들 간에 갈등도 치열했다.


가장 부유한 가상의 조직


"포브스 선정 가장 부유한 가상의 조직 1위, 초암 공사"


스파이스를 차지한다는 것은 성간 무역을 독점하는 것을 의미하고, 무역을 독점하는 자는 은하 전체를 지배할 힘을 가진다. '초암 공사'는 바로 그 스파이스를 독점 공급하는 업체이다. 제국의 황제가 20%의 지분을, 나머지 귀족 가문 및 은하 제국의 실세들이 남은 지분을 나눠 가진다. 황제를 제외하고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두 가문이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넨'이다. 여러 우여곡절도 있었을뿐더러 커다란 권력과 이득을 나눠가져야 하는 두 집단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두 가문 서사에는 '듄' 집필 당시 한창 과열되어 있던 냉전 구도의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도 엿보이고, 전성기의 그리스와 부정하고 퇴폐한 로마의 모습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온갖 악랄한 짓을 일삼는 하코넨 가문의 통치자 '블라드미르 하코넨'은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복사판이다.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말, '누구에게나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있음을 명심해라.' 출처: 영화 '듄', '칼리굴라'

 

유목민 + 인디언 = 프레멘?


"사람이 살기 어려운 외딴 지역에 억압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기술적으로 진보한 국가에 대항해 종교적 색채를 띤 격렬한 게릴라전을 펼친다."


듄의 세계를 설명한 말이지만 이상하게 현실의 어느 곳이 떠오른다면? 맞다.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위의 설명은 정확히 중동, 북아프리카 사막지역에 사는 유목민족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눈만 내놓은 채 후드를 둘러쓰고 로브를 걸친 프레멘의 모습은 북아프리카 베두인 유목민을,

선불교, 수니파 이슬람교, 기타 여러 종교가 혼합된 그들의 종교 '젠수니'는 이슬람교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여기에 환경 보호와 생태학에 헌신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자연 중심적 신념을 섞어 독특한 프레멘 종족을 탄생시켰다. 스파이스는 혼합의 결정판으로, 아랍 음식처럼 특유의 계피향이 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종교의식에서 사용했던 '마법 버섯'처럼 환각 현상을 일으킨다.

푸른 눈은 스파이스에 오래 노출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출처: Vanity Fair


광신도가 메시아를 만났을 때

너의 동족들이 영웅의 손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재앙은 없다. - 파도트 카인즈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칭송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에 대한 욕구만큼 나라는 존재를 구원하고 올바른 세계로 이끌어줄 강력한 지도자, '메시아'를 갈망한다. 석가모니, 예수, 무함마드는 당시 고통받는 사람들의 '메시아'였다. 억압받는 프레멘들에게 '폴 아트레이데스'의 등장은 유구한 시간 동안 진심으로 올렸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을 것이다. 듄의 세계에서 폴은 다음과 같이 불린다.


퀴사츠 헤더락(시공을 초월한 자)

리산 알 가입(외계에서 온 목소리)

마디(인도된 자)


모두 '메시아'의 다른 이름이다. 폴은 추종자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프레멘 해방전쟁'을 이끈다. 하지만 허버트는 '영웅 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한 소설로 유명해진 작가이다. '듄'이 대표적이다. 동전의 양면을 모두 보여준다. 시공을 초월하는 예지력을 가지게 된 폴의 눈에 피로 물든 종교전쟁을 벌이는 프레멘 부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억압받던 사막 종족이 '스페이스 탈레반'으로 변모한 순간이었고, 그 시발점이 폴과의 만남이었다. 작가는 폴이 가장 위대해지는 순간에 '듄' 1권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듄' 시리즈는 총 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대한 영웅의 다음 챕터를 넘길지 말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영웅과 반영웅의 구분은 이야기를 어디서 멈추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 프랭크 허버트 


Welcome to 듀니버스!


책 '듄의 세계'는 소설과 현실 세계 간의 접점이다. 왜 우리가 '듄'의 이야기를 보면서 '기시감'이 드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듄의 세계에 처음 입문한 '듄린이'에서부터 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듄친자'까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전부가 이 책 속에 들어있다. 영화를 통해서든 소설을 통해서든 세상의 모든 '듄며든' 자들이여, '듄의 세계'를 읽을지어다. Welcome to 듀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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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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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 내 소유물, 내 가족과 내 인생 -이 한순간 휩쓸려 가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진짜란 무엇인가?'


깨어진 균형


누구에게나 인생을 그 일이 있기 전과 후로 나눌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바다 건너 미국의 9.11 테러, 옆나라 일본의 후쿠시마 대지진, 우리나라의 세월호 침몰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우리의 망상을 일으킨다. 또 우리로 하여금 지녔던 가치관과 물질적 소유에 대한 집착에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테러리스트의 삐뚤어진 마음, 지진, 쓰나미, 낡은 배의 녹슨 볼트와 같이 나의 잘못과 무관한 어떤 힘이 내 인생, 가족, 소유물을 송두리째 날려버렸을 때, 우리는 그제야 삶의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누리고 있던 평온이 외줄 위 불안정한 균형 잡기 속 한 순간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다.

균형은 이미 깨어졌다.


온 우주가 말을 걸던 무렵

'사람들이' 미친 짓을 하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온갖 일상적인 물건과 옷, 심지어 저녁 식사까지 입과 눈, 태도와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치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행동한다면 결국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유의지. 물건들은 정확히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돼지갈비와 플란넬 셔츠, 포춘쿠키와 고무 오리. 심지어 젓가락도 뭔가 할 말이 있었다.
디즈니 영화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을 '정신병'이라 일컫는다, 출처: 미녀와 야수


베니가 언제 처음 목소리들을 들었을까? 아버지 켄지가 죽은 것과 같은 해였다.

아버지가 죽고, 남은 가족인 베니와 애너벨에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아들인 베니는 주변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사랑하는 남편과의 추억을 집안 곳곳에 간직하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는 이 말을 현실적이고 의학적인 용어로 풀어내면, 아들은 '조현병', 엄마는 '저장강박증'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켄지의 죽음 이전과는 다른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엄마가 쌓아 올린 물건들의 목소리를 아들이 듣는다. 정리정돈되어 조화를 이룬 물건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지만,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물건들은 제각각 자기만의 비명을 지른다. 그러한 목소리들이 베니의 정신을 휘어잡고 마음대로 주무른다. 말 그대로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물건의 말-이야기-책

베니를 화나고 슬프게 하거나 동요하게 하는 상황: 엄마가 내 방에 물건을 가져다 놓거나 내가 날짜를 알려줬는데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을 때
당시 느낌: '우주에서 가장 밀도가 높고 가장 무거운 물질로 만든 거대하고 시커먼 혜성이 나에게 정면으로 아주아주 빨리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올려다보면 그게 다가오는 게 보여요. 그게 점점 더 커지면서 모든 산소를 빨아들여 숨을 쉴 수가 없어요... 공간이 부족해요.'
대처 방법: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기
도서관으로 오라


사람을 미치게 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물들도 목소리 내기를 자제하는 곳이 있다. 바로 도서관이다.  여전히 속삭이고 말을 하지만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모두가 이곳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에는 귀를 막지만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사물 각자는 자기만의 할 말이 있다. 베니는 그러한 말들을 연결 지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엄마가 재활용품 수거함에서 발견한 고무 오리가 품고 있던 바다와 조류와 파도와 해안선에 대한 것, 한때 자신을 만졌던 멋진 누군가의 손가락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의 묶음이 책이 된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베니를 도서관으로 이끈 것도 베니 내면의 '책'이었다.

고무 오리, 출처: TurboSquid


마음속 책 한 권

그가 혼자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책 함께 읽는 날에 아이들이 조용하고 고요해지는 것처럼, 머릿속의 모든 목소리들이 점점 조용하고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심지어 일과를 마치며 책을 카트에 반납하고 도서관 정문을 통과해 거리로 나간 뒤에도 목소리가 조용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책 한 권이 숨겨져 있다. 책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사람 삶의 이야기를 앞표지와 뒤표지 사이에 최대한 오랫동안 안전하게 간직한다. 또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인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에 대한 개개인의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책은 인간과 사물의 중간자적 입장에 있다. 감각은 없지만, 지각은 있는 '반인반물(?)'이다. 당연히 물질들의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선 책이 제일 상층에 위치한다. 심지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인간들의 숭배도 받아왔다.

왜 그토록 책을 숭배했을까? 바로 사람들을 무의미함, 망각, 심지어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이 부르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다. 다들 휴대전화를 확인하느라 바빠서. 점점 책이 인간과 접촉하는 게 쉽지 않다. 그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묶이지 않은 것들

그날 밤 넌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소년,
무한한 미지의 우주로 첫발을 내디딘 작은 우주비행사였어.


도서관 속 '묶이지 않은' 제본실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이야기들이 순차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동시에 나타나고 동일한 현재의 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소리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우리를 크게 웃으며 즐겁게 손뼉 치게 만들었지만, 어떤 소리는 너무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이 소리는 마음이 약한 자를 만나 잡음이 되기도 하고, 시인과 선지자, 성인과 철학자를 만나 '클래식'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작업을 마치고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이제 독자들의 차례가 되고 여기서 또 다른 종류의 뒤섞임이 일어난다. 모든 독자는 고유하기 때문에, 지면에 뭐라고 쓰여있건 당신들은 각자 우리가 다른 의미를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똑같은 책도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읽힐 때 전혀 다른 책이 되고, 파도처럼 인간의 의식을 관통해 흐르는, 끊임없이 변하는 책들의 집합체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유동적이고 모습을 바꾸며, 분리하고 증식하고 시간과 공간을 이동한다.

책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 정확히는 우리의 몸을 부러워한다. 책이라는 존재는 자신과 타자가 융합되는 무아의 황홀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상은 아주 잘하지만 진짜 이야기, 즉 실제 하는 이야기들은 우리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란 무엇인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라는 사실만이 진짜다. '변화'가 진짜다.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곁에 진짜가 숨어 있다. 베니는 좋아하는 소녀와의 입맞춤에서, 애너벨은 좋아하는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켄지는 좋아하는 재즈음악의 절정에서 '진짜'를 느꼈다. 비록 용기 있게 감행한 행동의 결말이 아플 때도 있지만, 변화는 그들 삶의 새로운 챕터를 열어주었다. 예술이라는 건 현상을 뒤흔들고 파괴하고, 낯설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삶의 균형점이 깨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깨어난다. 우리 인간이라는 작가는 충격적인 사건을 만나야 경계를 허물고 세상 모든 것이 혼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시공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나약한 존재니까 말이다. 자기가 세상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관음'이라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된다.

마을 전체가 쓸려나갔다.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로 도왔다.
내가 지진 피해자 중 한 명에게 왜 매일 여기 나오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진짭니다. 진짜 일어나고 있죠. 우린 서로 도와야 해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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