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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프
김사과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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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자주 말을 참는다. 호기심과 의문을 참고, 감동과 감탄을 참는다. 그러다 보면 자주 목구멍이 켁켁거리곤 하는데 그때의 감각은 마치 르뱅쿠키나 스콘을 한 입에 털어 넣고 입안 가득 부스러지는 식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앙물고 있는 것만 같다. 혓바닥 아래 고여 있던 침과 아직 촉촉하게 젖지 못한 부스러기가 뒤엉켜 있는 것 같은 느낌.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어떤 맛인지는 인지하고 있는데 그보다 목구멍 안쪽의 답답함에 허기를 채우듯 허겁지겁 씹어 삼키는 듯한 형세. 그런 모양새가 지금의 나다.

김사과 작가의 <하이라이프>를 읽으며 나는 최근의 ‘나’와 나의 주변에 대해 생각했다. 친구 사이에서의 나, 가족 사이에서의 나, 체육관과 도서관에서의 나. 그리고 회사 동료들 사이의 나. 모든 곳에서의 나는 조금씩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결국은 나다. 내가 무엇을 증명하든, 증명하지 않든 나의 인정과 동의에 관계없이 나를 지칭하고 포괄하는 시선은 동일하다. 그러다 보면 내가 사람들로부터 함부로 규정되거나 오해받지 않기 위해 원하는 키워드와 이미지를 갈구하는 것 자체가 허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록작 중 하나인 <두 정원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김은영과 윤은영에 대해서. 각자 ’절약의 화신‘과 ’소비의 화신‘으로 칭할 수 있는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는 은영과, 손에 쥔 것들을 아끼고 아끼며 살아가는 은영은 가치관과 소비 행태, 이미지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지만 작가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이들의 갈등을 꼬집고 있다. 은영이 은영의 사치를 비난하든, 은영이 은영의 구질구질한 생활에 질려하든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는 것. 스스로를 그곳에 산다는 걸, 소속감을 느끼는 그 자체로 사회는 그들을 ’은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규정된 틀 위에 규정된 틀.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끊어낼 수 없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형의 세계를 그와 평행하는 또 다른 정형으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요즘 나는 표출하는 것보단 침묵하고, 대항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으로부터 ’허영‘을 기대하거나 함부로 그들의 모양새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다 보면 오래 전의 나-재미없는 사람-가 되어가는 것 같아 조금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 대신에 얻은 것은 마음의 여유. 말의 무게를 체감하며 존재감을 옅게 풀어가면서 나는 몇 가지 특징으로 파악되는 단순한 사람이 아닌 오히려 규정되기 어려워 깊어지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단편적인 면만으로 다수에 의해 함부로 규정되더라도 그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언어와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세태 그 자체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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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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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창작과비평>에 실린 텍스트를 읽으며 나는 ‘이후의 시절’에 대해 생각했다. 수록된 작품 중 성해나 작가의 ‘길티클럽 : 호랑이 만지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주요 인물인 ‘나’는 ‘김곤’이라는 어느 영화감독의 팬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감독이 만든 콘텐츠가 아닌, 그 감독 자체를 덕질하는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할 정도다. ‘나’는 김곤의 작품을 보고 압도되는 느낌, 전율을 경험한 이후로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촬영 현장에서 윤리적이지 못한 환경을 조성했을 때에도 그것을 인간으로서 ‘실수’로 인식한다. 그를 함부로 이해하고, 용서한 것이다.

‘나’의 눈을 통해 ‘김곤’이 이후에 보여지는 행동과, 팬덤 내에서 이루어지는 갈등은 실은 중요하지 않다. 서사를 메우고 있는 사건과 장면들은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김곤’이 윤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으니까.”(p.230) 여기서 다른 문장은 필요 없다. 이 소설에서 남는 것은 하나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

최근에 나는 위선에 대해 생각했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사정을 봐줘가며 기회를 주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실수를 할 수 있고, 미성숙한 결정과 판단에 대해 너그럽게 용서를 해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너그러워질수록 이해받는 사람의 세계는 만만해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폭력을 경험하게 되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요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한다. 내가 과시하기 위해 괄시한 선택이 얼마나 세심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말이다.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김곤'의 팬들이 '동조자'라면 나는 때로 방관자이자 위선자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순수한 척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짓된 액션도 생겨나는 것 같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순간 때로는 규칙적이지 못하고 비정형성의 세계에 서로를 놓아두게 되는 것 같다. '김곤'의 팬이 공론화를 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김곤'은 공론화 되었을 것이다. 김곤의 문제의식은 이미 그 스스로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응징을 당하는 쪽은 더 불안한 쪽이라고 생각한다. '김곤'이 저들의 팬에게 '사랑' 받음으로써, '이해' 받음으로써, 스스로 죄를 뉘우치므로써 모든 것이 해결될까? '김곤'은 또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까? 오늘의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패턴으로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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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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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창작과비평>에 실린 텍스트를 읽으며 나는 ‘이후의 시절’에 대해 생각했다. 수록된 작품 중 성해나 작가의 ‘길티클럽 : 호랑이 만지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주요 인물인 ‘나’는 ‘김곤’이라는 어느 영화감독의 팬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감독이 만든 콘텐츠가 아닌, 그 감독 자체를 덕질하는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할 정도다. ‘나’는 김곤의 작품을 보고 압도되는 느낌, 전율을 경험한 이후로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촬영 현장에서 윤리적이지 못한 환경을 조성했을 때에도 그것을 인간으로서 ‘실수’로 인식한다. 그를 함부로 이해하고, 용서한 것이다.

‘나’의 눈을 통해 ‘김곤’이 이후에 보여지는 행동과, 팬덤 내에서 이루어지는 갈등은 실은 중요하지 않다. 서사를 메우고 있는 사건과 장면들은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김곤’이 윤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으니까.”(p.230) 여기서 다른 문장은 필요 없다. 이 소설에서 남는 것은 하나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

최근에 나는 위선에 대해 생각했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사정을 봐줘가며 기회를 주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실수를 할 수 있고, 미성숙한 결정과 판단에 대해 너그럽게 용서를 해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너그러워질수록 이해받는 사람의 세계는 만만해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폭력을 경험하게 되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요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한다. 내가 과시하기 위해 괄시한 선택이 얼마나 세심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말이다.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김곤'의 팬들이 '동조자'라면 나는 때로 방관자이자 위선자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순수한 척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짓된 액션도 생겨나는 것 같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순간 때로는 규칙적이지 못하고 비정형성의 세계에 서로를 놓아두게 되는 것 같다. '김곤'의 팬이 공론화를 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김곤'은 공론화 되었을 것이다. 김곤의 문제의식은 이미 그 스스로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응징을 당하는 쪽은 더 불안한 쪽이라고 생각한다. '김곤'이 저들의 팬에게 '사랑' 받음으로써, '이해' 받음으로써, 스스로 죄를 뉘우치므로써 모든 것이 해결될까? '김곤'은 또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까? 오늘의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패턴으로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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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 인문 기행 4 - 사천성편 중국 인문 기행 4
송재소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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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는 목소리만으로 한 사람을 온전히 감각해야 했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으며, 손끝으로 더듬어볼 수도 없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상상해봐도 생김새가 그려지지 않아 도무지 결을 알 수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시케의 마음을 이해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자리에 육신은 없고 단지 허영으로 둘러진 유속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 어이쿠야, 내가 실은 미쳐버려 환청을 듣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 뱉어지던 호흡과 기분에 따라 높낮이가 달라지던 목소리. 감탄사와 헛기침. 하하, 하고 터져나오던 웃음소리와 당황스럽거나 난감할 때 쩔쩔매듯 긴장감이 감돌던 침묵.

이런 것들로 한 사람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는 매일 소설을 쓸 때마다 가본 적 없는 세계를 연기한다. 적어도 내가 그려놓은 세계 속에서 나는 늘 옳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잘 알지 못하면서 잘 아는 척 둘러대어야만 하는 사람. 그것이 소설가, 헛된 희망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서글픈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나는 어느 날엔 내가 사는 세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적어도 나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모르겠어. 어느 날의 나는 정답인 것 같고, 어느 날의 나는 틀린 사람 같다. 문제는 내가 나를 못 믿으니 나를 둘러싼 세계, 타인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겉으로 드러난 내 모습만 보고 제멋대로 내 인생을 단정지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관념적인 것들은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오래도록 그래왔다.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만리장성을 눈앞에서 본 경험이 있다.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었다. 흐릿한 안개와 구름 사이 초록의 산등성이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던 성벽을 기억한다. 어찌 이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어떻게 인간이 만들었을까. 무려 14년 전의 기억이다. 눈으로 직접 보고, 호흡으로 느끼고, 손끝으로 감각한 그것은 내 기억 속에 평생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더 명확하게 말하면 내가 기억하는 것은 ‘만리장성’이라는 성벽보다는 그 길을 걸으며 빗길에 미끄러지고,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떨어뜨리고, 우산이 뒤집어지고,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들이 귓등을 때리고 가던 그런 찰나의 순간들이다. 즉, 그 여행에 담긴 이야기라는 뜻이다. 모든 역사에는 스토리가 겹겹이 배어 있다.

송재소 작가의 『중국 인문 기행』은 사천을 둘러보며 건축과 풍류에 담긴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내밀한 스토리를 힘 있게 풀어낸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다면 상도관과 천사동이었다. 도교의 수련장소인 천사동에 위치한 천사전은 ‘장릉’이 수련하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心淸水濁/山矮人高(마음은 맑고 물은 탁하며, 산은 낮고 사람은 높다’는 대련이 있다. 작가는 이를 사람의 마음이 매우 맑아서, 투명함의 대명사인 물조차 탁하고 그에 사람의 심성이 깊어 보이니 오히려 산의 높이가 우습게 보인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행지를 돌아보는 동안 작가는 문화사적으로 규정된 시선 외적인 요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주체성을 잃지 않는 여행기. 한 사람의 세계관을 오롯이 더듬어 볼 수 있는 향유의 장인 것이다.

프시케는 에로스가 구축한 세계관에 의해 모든 주체성을 통제당한다. 프시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편인 에로스뿐인데 그녀의 유일한 세계관인 에로스는 ‘불확실성’이라는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신적 존재로 ‘프시케’라는 세계관을 구축하던 에로스가 간과한 것은 그녀가 주체성이 있는 ‘인간’이며,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배우자’라는 사실이다. 에로스는 프시케를 너무도 얕잡아 본 듯하다. 프시케가 불확실성에 1을 곱해 ‘불확실성’이라는 물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더 이상 신에게 무엇도 의지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내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즉 주체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프시케의 의심은 에로스의 배신을 곧바로 불러일으킨다. 이후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도망치듯 버리고 떠난 에로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감상적인 면면을 보여준다. 프시케는 자신이 지닌 모든 패를 꺼내 보이고, 에로스는 프시케가 실수로 떨어 뜨린 촛농에 고작 어깨의 상처 하나만을 (의도치 않게) 들키고는 어머니인 비너스에게로 종종 거리며 사라진다. 끝내 비너스를 찾아가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며 죽음의 협곡을 넘는 쪽 역시 멋대로 한계를 규정지어 버린 오만한 신이 아닌, ‘다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기행을 읽는 것은 결국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책’이라는 신적 세계관에 의해 시선과 감상을 통제당한 채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롯이 감각해야만 하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보광사부터 낙산대불까지. 작가가 눈으로 보고, 맛보고, 향유한 이야기들엔 장소에 배어든 실제적인 감상과 역사적 기록이 균형감 있게 전개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명명되는 것들에 대해 골몰해 보았다. 시조와 풍류에 깃든 수만 가지 단어에 대해. 적어도 명명된 세계 안에서는 주체성을 잃겠지만 작가를 따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이야기들을 통해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불확실성‘ 자체를 확신한 순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이 이야기의 ’다음‘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지금 사천으로 직접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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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의 역행 내일의 숲 7
김명 지음 / 씨드북(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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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 작가의 『알바의 역행』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쓸모가 되기 위해 변질된 아이덴티티의 기능을 되짚어보는 작품이다. 미래사회, 인간의 노동력이 쓸모를 잃어가는 시대에 나름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인공신체’로 개조해버린다. 소위 ‘파워암, 파워레그’라고 불리는 이것은 인간 본연이 낼 수 있는 힘의 단계에서 한참 진화된 노동력을 보여준다.

한편 가족을 살리기 위해 열여섯에 노동을 시작한 ‘알바’는 메디바이오닉스라는 회사에서 ‘무자격 임시직’으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이 역시 어렵게 구한 일자리인데다 신체를 개조하지 않은 알바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보상을 받게 된다.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역량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범위에서 한참 높은 이상치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이 보여주는 메시지엔 지금 우리 가까이에 있는 청소년 노동자에 비춰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노동에 대한 이해와 정신적인 성숙이 성인에 비해 덜 여물어 있는 청소년에게 요구하는 부조리하고 획일화된 시선을 말이다.

메디바이오닉스가 보여주는 키워드는 결국 작가가 제목에서 강렬하게 언급한 바 있는‘역행’이다. 이곳에선 인공신체, 인공장기를 생산하는데, 이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인간 본연의 생체시계가 흐르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갈망한다. 의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훼손된 신체를 회복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불필요하게, 일차원적인 시선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신체를 ‘변주’하는 것은, 또 피부는 물론이요, 팔과 다리, 장기 등을 손쉽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 뒤틀린 미적 기준을 양산하고 인간을 향한 생명권이 위태하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흥미롭게 느껴졌던 지점은 여기였다. 알바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기만 한 ‘메디바이오닉스’와,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 본연의 기능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테러 집단 ‘레트로’사이에서 어떤 가치를 존중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선택의 기로에 서 있기보다는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한다.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기성세대의 갈등에 휘둘리지 않은 채 전혀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미래 세대에서 인간이 추구해나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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