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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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의 명과 운의 상호작용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오뒷세이아를 마치며 어떤 방식이로든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이끄는대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로 했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를 관통하는 단어는 운명(運命)이다.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도,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도 신의 예정된 운명에 비켜나지 못했다. 필멸의 존재이기에 삶과 죽음의 사이클에 던져질 수 밖에 없었고, 트랙 안으로 진입한 이상 정해진 과정을 온전히 이수해야 했다. 타고난 운명대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태티스는 바다의 여신으로 정해진 아들의 운명을 변경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어린 아킬레우스를 여장하여 숨겨놓는가 하면 분노하는 아킬레우스를 달래기 위해 모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예정된 죽음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삶이 삶으로 여겨지지 않기에 죽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증명했다.

오뒷세우스는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이타카로 귀향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퀴크롭스를 헤쳤다는 포세이돈의 노여움으로 그의 귀향은 번번히 가로막히며 예정된 고난을 다 겪은 후에야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를 만날 수 있었다.

 

명리학에서는 말하는 운명(運命)이란 명()과 운()을 합한 말이다. 명은 태어난 순간에 하늘로부터 받은 능력·기질이고, 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맞이하는 기회를 뜻한다. 명은 고정돼 있지 않고 운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삶은 운과 명의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고 본다. 상호관계를 주도하는 것은 명일까, 운일까. 사주풀이를 하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듯 사람의 명과 운도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명이 유전자라면 운은 환경이다. 명은 사주로 기호화된다. 우주와의 첫호흡에서 한 사람의 기질이 결정된다. 기질이 제어되지 않고 습이 되면 명은 운과 더딘 상호작용을 한다. 반면 타고난 기질이 제어되면 습의 변화에 따라 명은 운과 활발한 상호작용을 한다. 사주 명리학의 예측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례들의 통계치를 근거로 드는데, 통계는 확률일 뿐 개인의 삶을 온전히 말해 줄 수 없다. 확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조사 대상과 조사 시점에 따라 변한다.

20%의 확률과 80%의 확률은 다르다. 명이 운과 소통이 원활할수록 사주의 확률은 낮아진다. 명이 운에 개입하는 정도가 많을수록 사주 통계에서 벗어난 삶의 다양성이 만들어진다. 저마다 타고난 기질에서 벗어나 습을 변혁시킬 때 개인의 삶은 운명에서 빗겨간다.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는 정해진 운명을 알고 있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바꿀 수 없었다. 그의 기질이 그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는 고난과 모험의 과정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명이 운을 바꿀만큼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장 아킬레우스가 발각되었더라도 전쟁에 따라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가멤논의 이기심에 분노하지 않는 평정심을 지녔더라면,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신들의 고의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더라면 아킬레우스의 명은 운과 다른 방식으로 만나지 않았을까.

오뒷세우스가 퀴크롭스의 눈을 상하게 한 후 자신의 재기를 과시하지 않았더라면, 아이올리스에서 선물받은 바람 주머니를 동료들이 열지 않을 만큼 믿음을 주었더라면, 부하들이 태양신 희페리온의 소를 잡아먹지 않게 트리나키아 섬에 정박하자는 항의를 설득력있게 진압했더라면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빨라지지 않았을까.

 

타고난 기질인 명이 습으로 굳어지지 않고 유연하도록 깨어있을 것!

시간의 흐름을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읽어내며 운전(運轉)하는 능력을 기를 것!

명의 선택지를 다원화하여 운이 신의 변덕으로 다가오지 않게 한다면 우리는 다른 아킬레우스를, 오뒷세우스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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