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도시소설가, 농부과학자를 만나다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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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더라도 샘이 날만큼의 하늘빛이다. 더군다나 혼자 여행이라니. 이 좋은 날 맘에 둔 곳을 가는 이가 몇이나 될까. 고속도로를 달리며 굳이 한눈을 팔지 않아도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풍부한 신록이다. 때마침 큰 덩어리로 몰려드는 흰 구름은 여행길을 더 풍요롭게 하고.

국도로 빠지면서 속도를 줄인다. 급한 것 없는 길을 달리는 데 방해하는 이도 없다.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한적하다. 4차선 도로는 내 작은 애마를 위해 닦아 놓은 듯 잘 뻗어 있고 양 길가에 이름 모를 꽃나무는 저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하다. 낯선 방문객의 눈길에 더 흐드러진 모습으로.

남부럽지 않은 운전 실력으로 먼 길도 혼자 나서는 나지만 내게도 약점은 있었다. 길을 잘 못 찾는다는 거. 그런 이유로 친절한 내비녀는 내 여행에 뺄 수 없는 동행자다. 한 번씩 날 골탕 먹일 때는 땀을 좀 흘려야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한 안내를 하니 오늘도 믿고 출발했다. 목적지를 불과 몇백 미터 앞둔 상황에서 우회전하란다. 다 온 길이니 거스를 이유가 없다. 잘 뻗은 도로를 놔두고 좁은 길이 나온다. 혹시나 했지만, 목적지까지 거리가 줄어들고 있으니 믿었다. 더군다나 시골 마을 책방이니 좁은 길이 당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논길이다. 다행히 작은 차를 탔으니 통과할 만한 길이다. 웃음이 터졌다. 그럼 그렇지! 이 내비녀 오늘도 내 여행이 부러웠나 보군! 다 와서 엉뚱한 길을 알려 주다니. 결국엔 내 실수지만 탓을 할 그녀가 있어 웃어넘긴다. 논과 논 사이 좁은 길에 차를 멈췄다. 오! 멋지다! 그림엽서나 서정적인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나올 법한 풍경이다. 쭉 뻗은 논길. (내가 달리던 길보다 훨씬 넓다) 양옆으로 벼 이삭이 가벼운 바람에 흔들린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아까 본 구름과 다른 덩어리의 구름이 유유히 지나고 있다. 보통은 사진으로 남기는 게 버릇이지만 이번엔 눈으로 먼저 충분히 담는다. 잘못 들어선 길이지만 충분히 아름다움을 보여준 여행길이다. 마음이 꽉 차게 부풀어 오른다.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오른편에 건물이 있다. 내 목적지가 여기겠구나 싶다. 코 앞에 두고 헤매는 모습이라니 역시 나답다. 핸들을 돌리려는데 그 건물 앞에서 작은 손수레를 끌고 막 이동하려는 남자분이 보인다. 아마도 낯선 차가 헤매는 모양이 걱정스러우셨겠지. 낯선 이가 좁은 논길에서 뭐 하나 싶으셨겠지.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남자분과 나만 아는 에피소드가 생긴 셈이다. 어디 가서 소문내진 않으시겠지. 앞으로 조금 이동하니 큰 길이 보인다. 다시 우회전만 하면 책방이다.

가끔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스러운데 이렇게 넓은 마당(?) 주차장이라니 이것 또한 고민스럽다. 책방 주차장인지 다른 용도의 주차장인지 결국 전화를 걸어 고민스럽게 만든 주차장의 위치와 책방의 입구를 물었다. 미실란이란 식당과 같은 건물에서 운영하고 있어 주차장을 공용으로 사용한단다. 아무 곳에 주차해도 무방하며 마당을 지나 쭉 들어 오면 건물 중앙에 책방 입구가 있다고. 안내해 주신 대로 너른 터 한쪽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두 시간 반을 달려 온 길이니 굳은 몸엔 스트레칭이 필요했지만 눈은 이미 웃고 있다. 여행지의 첫발, 첫 시선, 첫 냄새 그리고 나머지 감각을 동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딱 이 시간이야말로 매번 혼자 여행을 종용하게 만드는 이유지. 핸드폰을 들어 파노라마를 찍는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려 눈에 담기는 것을 모두 내 것으로 삼았다. 여행. 참 좋은 것.

책방으로 다시 태어난 폐교. 교무실 자리의 짙은 고동색의 나무 바닥을 보니 아직 쓸만한 것 같다. 초를 문질러 열심히도 걸레질했을 어린 손길들이 떠오른다. 더불어 내 어린 시절 기억까지. 허허허.. 기억은 잠시 뒤로 무르고 책방을 살핀다. 탐구한다. 구조와 구성을 눈에 담고 분위기와 온도를 느낀다. 적당한 때에 입에 맞는 책을 찾으면 더없이 행복할 테니까. 여행자로서 임무를 수행 중인데 책방지기님께서 먼저 말을 건다. 공간과 사람에 대한 깊은 (셀프) 탐구 대신 그녀와 나누는 대화 중에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익혔다. 정확도는 말할 것도 없지. 아..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이 몹시 탐이 난다. 여행지로, 책방으로, 무엇보다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러니 집어 들어야 할 책은 하나로 결정 났다. 김탁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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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살아가며 많은 것을 잃고 잊는다.
그렇지만 되살펴 기억할 능력이 우리에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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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농부 과학자 이동현(내가 책방을 코앞에 두고 논길을 헤맬 때 손수레를 밀고 가다 멈춘 이다)이다. <들녘의 마음> 책방 입장 전 복도에서 본 사진으로 생각하자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인상 좋은 곡성 동네 농부 아저씨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곡성에서 발아현미를 연구하고 가공하는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을 15년째 이끌고 있는 기업가이자 미생물학 박사이며, 2019년 유엔식량기구 모범농민상을 받은 농부이다. 또한 동생물과 공존하는 생태계의 법칙과 인간다운 삶의 철학, 공동체에 흐르는 연대의 힘을 지키며 살아가며 (화려한 이력 뿐만 아니라) 순수한 고집으로 지킬 건 마땅히 지켜나가는 자기 모습을 충분히 어필하고 있다. 이렇게 삶의 겉과 속이 참된 농부 과학자 이동현을 통해 작가는 ‘아름다움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지키는 태도’라는 걸 알아차림과 동시에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거기에 소설가 김탁환 작가의 폭넓은 이야기 소재들이 글을 풍성하게 만들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곡성 지역의 색을 간간이 보여주는 문장들은 자못 여행 에세이같은 느낌마저 드니 이 책은 한 권으로 여러 분야를 만나게 하는 장점이 있다. 더불어 ‘치유 사진 작가’ 임종진 작가가 곡성과 미실란에서 찍은 사진은 깊어진 사고를 잠시 쉬었다 가게 만드는 편안함을 만들어 준다.

씨앗이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빗대어 두 사람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교차하며 담아낸 도시 소설가와 농부 과학자의 이야기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이 글을 마주한 이들은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공통적으로 자문하게 되겠지. 김탁환 작가의 통찰력으로 빚어낸 결이 다른 에세이.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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