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
박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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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 : 은희

* 저자 : 박유리

* 출판사 : 한겨레출판

* 2020. 5. 28. /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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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에 끌려가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갖게 된 은희. 자신의 출생 과정은 알지 못한 채 폴란드로 입양을 갔다가 엄마와 관련된 쪽지 하나를 전해 받고 한국으로 오게 된 은희의 아들 준. 그리고 준과 함께 자신의 기억을 발판 삼아 모든 것을 되돌려 놓고 싶어 하는 은희의 형제복지원 룸메이트이자 은희의 죽음을 목격한 미연. 이들의 기억과, 기억을 더듬어 만들어간 이야기가 불행하지만 아름답게 찾아왔다.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접했던 형제복지원 사건의 참혹한 진실이 저자의 메시지와 함께 소설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그 시대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개인의 이야기가 결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의 형제복지원에서는 많은 인권유린이 일어났다. 불법 감금, 폭행, 강간, 강제 노역, 암매장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니 그 이상의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던 형제복지원의 실체는 방송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전해진 바 있다. 하지만 그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법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이들은 법의 바깥으로 폐기된 지 오래였다. 법의 보호는 무산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법과 인간의 범위는 검찰 상부가 정한 그들만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법은 세상의 주류가 정한 범위 안에서 죄를 측량한다. 인간 밖으로 폐기된 자들에 대해 법은 무력하다.

 

국가의 복지 정책으로 시작된 형제복지원이기에 법마저도 피해자들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 상황이 나에게만 불합리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들의 기억에 기대어서라도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피해자들이 형제복지원 안에서 보냈던 시간과 그 곳에서 겪어야 했던 모든 참혹함을 우리는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다. 그러한 무력감이 더해져 우리는 더 비참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들의 기억을 토대로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에 맞서 우리는 보다 정의롭게 바로 서야 한다. 시대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개인의 이야기라 치부하기에는 당시 사회가 너무 비정상이었으니까...

 

우리를 가둔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세상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두 발을 내려다보며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향해 사죄하지 않는 세계, 내가 사라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의 평화로움이 소름끼치게 무서웠습니다.

은희와 미연, 준 그리고 병호의 아픔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아직도 제정되지 않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 뿐이다. 국가 정책에 의해 시작된 일이니 결국은 국가가 나서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우리도 목소리를 보태 피해자들의 기억이 피해자들만을 갉아먹지 않도록 연대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또 다른 세상 안에 갇혀 불행한 기억을 쌓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지 늘 타인을 향한 예민함을 드러내야 할 때이다.

 

*** 내게 온 문장

- 기억하지 않는 삶이 더 낫다면, 그녀에게 기억을 강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모든 것이 부식되고 사라지고 변하는데 그날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매년 새해 소망은 희미해졌으며 변치 않을 것 같던 약속들은 바람에 흩날렸다. 해가 바뀌면 새 달력이 벽에 걸렸으나 그날의 기억만은 그대로였다.

 

- 그들은 언제나 국회 앞에 서 있었다. 소리쳐도 들어줄 이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렸다. 삭발을 하고, 곡기를 끊고, 마이크를 들고 아무도 듣지 않는 거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곳은 서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이는 광장이었다.

 

-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력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커질수록 무력하게 견디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그들은 빈곤을 모아두면 풍요로워질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바퀴벌레와 쥐 퇴치 운동을 벌이듯이. 그렇게 우리는 청소됐다.

 

- 유전보다 더한 것이 기억이고 습관이었다. 표백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기억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가위를 들고 들러붙은 그림자를 잘라내도 하루가 지나면 잘린 부위에서 새 그림자가 돋았다.

 

- 여기, 시간이라는 기차가 출발하지. 오늘은 어제가 되고, 지금은 그때가 돼. 그걸 막을 수 있나? 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유한한 시간을 동시에 줬지. 다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시간은 가고 늙어 죽거나 늙기 전에 기억을 잃어. 사람에게 기억이라는 게 뭔가? 편집된 시간이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ᄄᆃ 전부로 여겨. 참 한심해. 사람들의 기억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어. 오늘 안에 어제가 있고, 미래 안에 지금이 있지.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마는 거지. 댐에 쌓아둬서 괴물이 되게 하느니, 그저 기억을 방류해버리는 거지.

 

- 어떤 기억도 갖지 못한 준, 기억에서 달아나려다 주저앉은 미연, 그리고 기억을 버렸다는 노인.

 

- 법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이들은 법의 바깥으로 폐기된 지 오래였다. 법의 보호는 무산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법과 인간의 범위는 검찰 상부가 정한 그들만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법은 세상의 주류가 정한 범위 안에서 죄를 측량한다. 인간 밖으로 폐기된 자들에 대해 법은 무력하다.

 

- 무열은 살려만 달라는 말을 들을 때만큼은 그들의 신이 된 것 같았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세상에서, 살려달라는 말을 들을 때만큼은 무언가가 된 것 같아서 그들이 생을 구걸할 때까지 각목을 휘둘렀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뒈지도록 두들겨 패면 그들은 살아 있기만을 바라는 자들이 되었다. 존엄한 삶은 인간이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자들은 삶이 아닌 살아 있음을 원했다. 삶을 갈망하다 절망한 자들은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가지만, 매일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자들은 죽음으로부터 달아났다.

 

- 우리를 가둔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세상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두 발을 내려다보며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향해 사죄하지 않는 세계, 내가 사라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의 평화로움이 소름끼치게 무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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