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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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폭력, 억압과 좌절, 불안과 공포는 임철우의 소설속에 시리도록 흐르는 강물이다.

전작 '백년여관'에서 작가가 ‘넌 늘 왜 그런 것만 쓰느냐, 
5월이나 6·25 이야기 말고 멋진 소설을 좀 써보라’며 타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임철우의 답변은 늘 확고하다. ,
‘삶의 굴레가 되어버린 고통스런 기억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그런 고통은 늘 현재형이고, 그 지옥의 시간에 결박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작가로서 내가 지닌 책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여전히 지금도 한국 현대사 속 그 고통의 현장에 머물러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보는 증인이고 작가이다,

임철우는 광주 오월에서 겪은 고통을 해방 이후의 역사적 기억 전체로 확장하면서 그 폭력과 고통을 반복적으로 현재화시킨다. 
아이, 여성, 노인 등 경계인/이방인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역사'에 포함되지 못한 주변부의 망각된 흉터를 드러낸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내재되고 축적되어가는 과거의 기억들, 삶의 흔적들을 부정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으로 경험적 현실로 받아들여야하죠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저에게는 단절된 두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명의식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서서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소설을 통해 만들어보고자합니다.(2004년 문학과 경계 대담 중에서)

임철우의 소설은 노인, 아이, 여인 등 주변부 존재들이 감지하는 정체불명의 것들과 그들의 ‘몸’에 나타난 병적 징후를 통해서 역사적 폭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들에게 유령/괴물들의 회귀가 계속되는 한, 현재는 고통이 지속되는 과거이며 도래할 미래 역시 역사적 고통이 반복되는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유령/괴물과 마주하고 그것을 새롭게 기억해야 비로서 잊을 수 있는 역설이 그의 소설속에 들어있다. 
역사적 기억이 왜곡되고 상처로만 남는 것에 저항하면서 온전한 진실과 기억됨을 통해 진정한 망각의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쓰기가 임철우의 소설이다.

앞으로 언제까지 소설을 쓰게 될지, 쓴다면 어떤 글이 될 것인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뭐라고 할까, 내가 세상의 시간의 흐름 안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다기보다는, 눈앞으로 지나가는 세상을, 그냥 혼자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그래도 뭔가를 쓰기는 할 겁니다.
분노가 아닌. 이런 슬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극적이거나 역동적이지는 않아도, 가만히 응시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2013년 실천문학과의 대담 중에서)

이 책에서도 임철우는 여전히 ‘기억의 작가’이고, 고통과 죽음, 그리고 후회를 말한다. 
이제 그는 역사적 아픔과 죄의식을 넘어 일상의 죄악과 악의 평범성을 사유하고 그 모든 아픔과 분노를 넘어 죽음으로 드러나는 슬픔과 서정의 정서가 깊게 담겨 있다.

표제작인 '연대기, 괴물' 은 육십대 노숙자의 지하철 투신 자살에서 시작한다. 
‘신원불명’으로 처리될 듯했던 이 사건은 그가 쥐고 있던 식칼의 지문 덕분에 1949년생, 송달규. 그의 “연대기”로 이어진다.
보도연맹 사건 서북청년단, 베트남 전쟁, 세월호 사건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대기 속 연속된 고통을 괴물의 환상으로 겪어내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긴 세월 무연고자로 살아오며 고엽제 후유증으로 물집에 뒤덮인 채 끝내 환각을 쫓아 지하철로 돌진해 생을 마감해버리는 그는 한 세대의 상징적 초상처럼 읽힌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그 많은 아이들이……. 순간, 그는 두 눈을 의심했다. 
거꾸로 처박힌 선체 주변의 수면 밑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놈이었다. 공룡 닮은 몸통, 뱀처럼 긴 꼬리,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정체불명의 괴물. 
그놈은 흐릿한 수면 밑에서 검은 지느러미를 부챗살처럼 펼친 채 뒤집힌 선체 주위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연대기, 괴물'중에서 )

모든 소설에 죽음이 등장한다. 
죽음 이후에 남겨질 내 몸뚱이의 모습에 고민하기도 하고 유년기에 우물을 들여다보던 소년이 냄비에 코를 박고 죽는 고독사의 노인으로도 사라진다.

임철우의 글은 역사적 상처와 서정적 치유가 공존한다.
새들과 교감하며 점치는 소녀와 소설속에서 울리는 징소리의 은유, 회고하고 후회하는 노인들 치유는 고통 그대로를 바라볼 때 비로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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