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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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가제본 책을 읽고 후기를 남깁니다

첩첩산중, 이름마저 평화로운 수평마을에 나타난 두 젊은 아가씨들이 참하고, 음전한 아가씨들인 줄 알았건만 ‘레즈비언’인 것이 밝혀지고, 다방 레지는 알아도 ‘레즈비언’이 뭔지도 모르는 마을 노인들이 레즈비언의 실체를 알게 되며 갈등이 생긴다.
나의 해방일지 정지아 작가의 신작, 찌니주의보.

레즈비언이라는 악귀들과 살 수 없다는 윤선생, 그녀들의 성생활이 궁금해 음담패설은 마구 내뱉어도, 반찬은 꼬박꼬박 챙겨다 주는 한 씨 댁, 마을 주민들 등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장을 필두로 우왕좌왕하는 마을 사람들의 야기다. 이제껏 꼭꼭 숨기던 레즈비언의 이야기가 수평 마을에 홀랑 벗겨지고, 둘의 이야기가 홀랑 벗겨지는 순간, 은밀하게 숨겨 두고 봐야 할 것 같던 레즈비언의 이야기가 하나도 거리낄 것 없는 유쾌한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 이상도 하지, 그 순간 레즈비언이라는 말에 내포된 은밀함, 비밀스러움 같은 것들이 햇빛 맑고 바람 좋은 오늘 같은 날 빨랫줄에 걸린 빨랫감처럼 순식간에 꼬들꼬들 말라 바사삭 부서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여자를 사랑하는 이상한 찌니들과 수많은 동물 중에 닭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찌니의 친구, 수평 마을에서 누구보다 목소리가 커져 버린 베트남 아내 쑤언. 주류일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어, 자신들의 이상함을 받아들이는 게 삶이었던 그녀들의 속사정이 펼쳐지며 이야기는 레즈비언 소설이 아닌 어쩌면 ‘조금은 이상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반반한 얼굴로 살고 있지만 어쩌면 조금은 이상하고, 나쁘기도 한, 자기 기준대로 살고, 비밀을 간직한 우리의 이야기다. 레즈비언이 됐든, 닭을 사랑하든, 혼인 이주 여성이든, 아니 어쩜 번듯한 누구든 우리에게는 말 못 할 속사정이 있으니 말이다.

사회의 최약자인 베트남 이주여성 쑤언에게 ‘년’ 소리를 듣고, 아침까지 얻어먹으며 위로를 받는 찌니들의 당황스러움처럼 수평마을에선 모두가 수평한 채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마을에서 쫓아내야 할 악귀들이었던 찌니들이 자신을 구해줄 동아줄로 변신하고, 사람도 못 먹는 홍삼을 먹여 애지중지 키우는 이상한 닭을 이해하는 수평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영원한 약자도 강자도 없는, 두 얼굴의 빌런도 영원한 천사도 없는 수평마을에 살짝 들른다면 이 마을에선 나의 작은 흠도, 비밀도 그저 개성이 되어 그럭저럭 둥글둥글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느그가 난 년 들이다, 난 년들이여. 한 년이 아프면 딴 년이라도 밥을 채릴 것 아니냐!”
김장 백오십 폭을 혼자 담고, 아침밥을 차리지 않아 남편에게 엉덩이를 차이고 나온 한 씨 댁에게 찌니들은 진한 믹스커피를 타준다. 한 씨 댁의 넋두리처럼 우리가 바란 것은 남자 여자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이 아프면 한 사람을 밥을 차리는 그런 관계일 지도 모른다. 아마 그곳은 남자와 여자, 네 편과 내 편으로 나뉘는 곳이 아닌 만수산 드렁칡처럼 얼기설기 얽혀 서로 기대고 기대어주는 그런 곳, 김장 김치를 나눠 먹고, 굽은 허리에 파스를 붙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침 댓바람부터 서러움에 집을 나온 한 씨에게 믹스커피를 내주는 찌니들이 레지인지 레즈인지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깔깔 웃으며 수평 마을의 레즈비언 출연이라는 역대급 사건을 찌니주의보에서 목격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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