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어쩌면 읽을 때마다 공부할 게 늘어만 가는지. 창비를 끊을 수 없는 까닭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메우고 시야를 넓히기 위함이다. 인류세, 자본세, 툴루세, 대농장세, 금융세. 지질학적 시대구분을 할 때 이런 언어, 개념이 사용되는구나. 입에 달고 사용하면서도 분명히 할 수 없던 신자유주의를 서동진의 글을 읽으며 다시 정의하며 나아가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익힌다. "신자유주의의 경제•사회적 질서에 기꺼이 침묵하면서 다양성과 차이 등에 근거한 이데올로기를 적극 동원"하는 것. "다원적 인정의 정치를 옹호하되 노동계급과 위한 분배의 정치를 포기한 것" 패션좌파, 좌회전 깜박이 켜고 우회전하는 이들이라 하면 좀 더 쉬울까. 언어화가 이래서 중요하구나. 다원적 인정을 외치기에 노동계급과 분배 문제의 빠진 걸 놓친 채 진보라 여겼고 지금의 계급화되는 사회•정치 질서를 타파하는데 조금이라도 그들이 무언가를 할 것이라 바랐지만 실상은 이러한 이들로 인해 더욱 고착화하고 있었는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말로 명확해진다. "영향력이 더디게 나타나는, 만연하기는 하되 손에는 잘 잡히지 않는 폭력"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이미지•상징" 또한 전유되고 있는 시대, 문화적 상징화를 통한 정치적 주체화를 꾀할 때 명심해야 할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