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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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페미니스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다. 고등학교 국사책에 나온, 고려시대보다도 조선시대가 더 가부장적이었다는 내용을 기억한다. 고려시대에는 이혼이 자유로웠으나 조선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 사상의 가부장적 성격이강화되면서 과부의 재가를 금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시간이 흐른다고 반드시 모든 것이 더 발전하고 좋아지기만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었다. 이 책은 조선 말 성별에 의한 차별과 일본의 식민 통치로 인한 차별을 동시에 받았던 조선의 페미니스트중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7인이 분투하고 주장하고 살아낸 모습을 생생하게 조명한다. 저자가 예로 든 페미니스트 작가인 치마만다 응고치 아다치에의 할머니처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몰랐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한 불합리한 차별과 배제를 거부하고, 항의하고, 나서서 이의를 제기한, 스스로가 욕망과 감정을 지닌 인간 주체이기를포기하지 않은사람들이었다.

여성해방운동을 지지하는 한국 여성으로서 내가 그동안 많이 접하지 못한 훌륭한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구한말과 일본 제국주의 시기 여성인사는나혜석으로 대표되는 공부하고 일하고 예술하고 자유연애를 시도했던 신여성이나, 김활란 등 기독교 계통교육에 힘쓴 여성운동가들(이후 친일행적이 있었지만) 정도였다. 그들의 말로는 비참하다는 방식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나혜석은 집안이 부유하고 부호와 결혼했지만 이혼한 행려병자로 죽었다는 식의 서사는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여성들을 향한 모종의 훈계가 전제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유관순 열사나 김마리아 같은 여성 독립운동투사들의 주장에 여성을 위한구체적인 의제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시절 사회에서 여성들을 얼마나 함부로 대했는지를 생각하면 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자체가 여성에 대한 차별에 도전한 것이지만 말이다.

 7인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계급차별과 젠더차별을 동시에 겪는 무산여성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대부분 좌우 합작의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1927~1931)에서 활동했다. 가진 것이 있고 먼저 깨친 여성들은 무산여성들을 돕자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2019년 오늘날 여성운동의 의제와 여전히 겹친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직장 내 차별 철폐, 여성을 무시하고 폄하하는언론 편집 방향에 대한 항의, 성적인 이중잣대의 폐기, 성교육실시, 국가와 자본이 보육시스템을 갖추고 여성의 사회진출에 장애물이었던 여성에게 육아가 전담되는 문제를해결할 것 등. 여성의 역사, 여성해방운동,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여성 문제, 무산여성의 현실 등(p.85)을 주제로 대중 여성의 각성을 위해 전국에서 강연을 했다. 이후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의견차가 커지고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근우회는 해산되었다(두산백과사전).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일을 했고, 경제적 독립을 중시했다. 의사로 일하면서 여의사 학교를 세우고(유영준) 감옥에서도 산파 역할을 하고(정종명), 편물기능교육(정칠성)을 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여성 운동을 하기위해 비혼을 선택한 사람(정종명)도 있었고, 사상과 행동을 존경할 수 있는 남성과는 결혼이라는 틀과 관계없이 동지로서 자유롭게 연애할 것을 주장하며 여성에게만 엄격하게 요구되던 남성중심적 정조관념에 항의했다.

  • 나는 여학생의 이성 교제라든지 연애 결혼 같은 것은 절대로 자유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간섭하든지 제재할 필요도 없거니와 제재하는 것이 아무러한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누구든지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소극적으로 회피하지 말고 직접 체험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우리나라 여학생들의 남성 교제가 풍기 문란에 이르렀다고까지 보지 아니하지마는 그렇다고 가정하더라도 나는부대껴보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영준, p.51)

 오늘날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모순을 드러내고, 이로 인해 사회재생산위기(장경섭,2018, “내일의 종언?(가족자유주의와 사회재생산위기)”)가촉발되었음에도(그러나 정말 위기인가? 누구에게 어떤 위기인가?) 다시금재생산의 문제를 국가적 과제로 호명함으로써 정부는 여성의신체와 인격을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 다수 언론은 사건 위주의 보도 위주이고 젠더 관계의 구조적인 불평등에는 눈을 감는다. 여기에 여성들이 하고 있는 요구는 조선 말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와 큰 틀에서 다르지않아 보인다. 지금은 조선시대와 비교해서 의식주의 모습이 달라지고, 극한의가난도 줄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장은 비슷하다. 여성들이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공적 영역인 직장의 차별 철폐와 사적영역인 개인의 공간에서여성의 무급가사노동을 신화화하거나 당연시하는 문화와 제도의 철폐다.

  • 우리의 당면한 일은 여성해방입니다. 여성이직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엌도 누구든지 쓸 수 있도록 개조하고 남편이든지아내든지 먼저 집에 돌아온 사람이 밥을 짓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선 만들고자 하는 것은 직장으로가는 부인을 위한 탁아소입니다. 유산 부인은 문제 아니지만 직장에 나가는 부인이나 농촌 부인은 탁아소가절대로 필요합니다. 조선 부인이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또 한가지는 빨래입니다. 공동 세탁소에서 빨아 입을 수 있는 옷감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칠성, p.162)

저자는 일곱 운동가의 일대기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조명했다. 각자는 한 명의 삶에 이렇게 많은 일이 있을 수 있나? 의문이 들정도로 왕성한 삶을 살았다. 특히 정칠성의 삶이 인상깊었다. 기생으로일하다가 3.1운동을 경험하고 소위 사상 기생이 되어 손님들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키고, 긴 머리를 자르고 기생 권번에서나오고, 사상을 체계화하기 위해 도쿄에 유학을 가고, 유학생모임을 조직하고, 물산장려운동, 근우회 활동, 기자로 근무, 광업소 근무, 조선부녀총동맹활동, 월북 후 숙청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에 감탄했다. 그의 말이다.

나의 오늘날까지걸어온 길이란 오로지 조선의 여성을 위해서이지만모두 다 조선의 여성에게 각성하라는, 현실을 잘 파악하는 여성이 되라는 것뿐이었지요. 다시 말하면 가장현실을 잘 알고 현실을 똑바로 보는 사람이 되라는 것뿐이었지요(정칠성,p.162).”

7인이 무슨 맥락에서어떤 주장을 했고, 그래서 어떻게 이슈가 되었는지, 왜 이들의활동과 행적은 조명되지 않고 묻혔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치열하고 구체적인 삶, 주장, 행적은 21세기남한의 상황에 여전히 유의미하고 인상적임에도 이름이나 행적이 너무 낯설다. 1945년 이후 1948년 남한과 북한이 각기 정부를 수립하기 전까지 해방공간에서 발언하던 사회주의 여성활동가들은 대부분 북한으로가서 여성을 위한 역할을 계속 맡거나(유영준), 숙청(정칠성) 또는 학살(고명자)된 것으로 추정되는 등 행방이 묘연해지고 이름이 남지 않았다. 한국전쟁이후 오랫동안 남한의 정서를 지배한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해방 이전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나 운동의기록도 교과서나 각종 매체에서 삭제되거나 축소되었기 때문일 게다.

나는 당시 언론이 그들의 활동을 서술한 남성중심적 방식도역사에서 그들이 너무나 축소된 이유라고 추측한다. 광산의 글에 정조에 대해 여성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유영준이 신문 사설에 투고했을 때, ‘감정에 치우쳐서 흥분한 상태로 말해서 판단력이 부족한 청년들에게 해를 입힐까 두렵다는 광산의 대응은 맨스플레인가스라이팅의 전형이다.정종명이 일본 제국주의 경찰에 붙잡혀 장기구금(고문 받은 것으로 추측) 재판 후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는 조선 여자 사회운동자의 대표인데그는 자기가 과거에 행한 여성운동이 전부 허영심에 관한 것임을 자백하고여자는 가정에서 남편을 돕고가사를 주관하는 것이 천직인 것을 깨달았다나는 한 개의 참된 여성이 될 것을 서약한다(p.105)”며 전향했다는 본인이 말했다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을 실었고(일본인재판장이 전향서를 발표할 수는 없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진홍은 이미 여성노동운동가로 체포된 전적이있는 활동가였으나, 유명한 조선공산당 운동가로 일본 경찰의 검거망을 피한 이재유를 숨겨주며 동거하고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 동안 애처”, “애인”, “하우스키퍼로 기사에 등장하고,이순금 역시 경성콤그룹 사건 등에 연루된 운동가였으나 삼각관계나 남성 사회주의운동가의여자로 기록되어, 여성 사회주의자가 얼마나 불온하고 위험하고불행한지(p.261~2)를 훈계하기 위한 소위 불행포르노로 소비되었다. 신여성에서 자유부인,된장녀, 꼴페미로 이어지는 멸시와 조롱의 익숙한 계보다.유영준은 여성이 자살하면 그 사실을 알아보기 전부터 첫말이 아량없는 여자니까 옹졸한 생각을 가진 여자니까’(p.51)”라는 선입견을버리고 좀더 친절하고 힘있게 여성에게 임해달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적 진보에 대한 대중의 반발인 백래시’(수잔 팔루디)의한 사례로, ‘페미니즘이 서양에서 시작된 사상이기 때문에이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비이성적으로 사대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위 비난을 위한 비난이 있었다. 이런 비난은 여성들의 생각과 행동이 무가치하고 비논리적이며 감정적이라고 낙인 찍어서, 여성들이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제약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다. 어디서처음 용어가 생겼든지 한 사회에서 차별당하는 주체의 권리운동은 차별 그 자체가 이유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호주제를 폐지하고, 재산 상속에서 여성들에게 불리한 법을 개정하고, 아내폭력 피해자를 돕고, 낙태죄 위헌판결까지 끌어낸 선배들 덕분에더디지만 예전보다 분명히 나아졌음을 기억한다. 2015년 이후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가장 뜨겁고, 어쩌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운동이다. 식민지 조선 여성운동가들이 깨뜨리려 했던 벽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여성들이 부딪히는 벽들과 여전히 닮아 있어서책을 읽으며 분노하기도 했다. 한편, 인류 역사가 시작된이래 켜켜이 쌓여 온 벽에 전과 비교해서 얼마나 많은 균열을 내어 왔는가 생각하고, 조선의 페미니스트들이얼마나 척박한 상황에서도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고 행동하며자기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는지를, “유쾌하게, 기운 있게, 씩씩하게 지나다니(p.170)”며 함께 활동한 그들의 삶과 저항정신이압축된 발언들을 읽으며 나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2권에 또 어떤 여성들이 발굴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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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지음, 임지호 옮김 / 경당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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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기를 두려워하는, 예술가의 열망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깨우친다. 이 책을 조금씩 실행하면서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느끼게 된다.

자기탐색의 너무나 좋은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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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자 예수
프란츠 알트 지음, 손성현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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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도 물질도 소유한 것 너무 적었으나

가장 많이 누리고 살았던 사람,  그리고  그 유일한 삶과 생존의 길로

자신있게, 기쁘게 초청하는 사람 예수.

  아주 실제적이고 시대에 부합하며 소망을 품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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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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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말할것 없이 만족합니다. 설날직전에 주문해서 배송은 너무 느렸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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